[include(틀:역대 계동궁 주인)]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F7C22, #6B8E23 20%, #6B8E23 80%, #5F7C22); color: #FFD400" '''계동궁 2대 궁주'''}}} || ||<-3> {{{#gold '''조선 숙종의 손자 '''[br]{{{+1 '''낙천군 | 洛川君'''}}}}}} || ||<-2> '''[[봉호|{{{#gold 봉호}}}]]''' ||<(> 낙천군(洛川君)[* 봉호는 양모(상주 김씨)의 본관인 [[상주시|상주]]의 별호인 '낙양'에서 따왔다.] || ||||<:>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 || ||||<:> '''[[이름|{{{#gold 이름}}}]]''' ||<(> 수신(守愼) → 온(縕) || ||||<:> '''[[자(이름)|{{{#gold 자}}}]]''' ||<(> 온중(蘊仲) || ||||<:> '''{{{#gold 양부}}}''' ||<(> [[연령군]] || ||||<:> '''{{{#gold 양모}}}''' ||<(>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br](商山郡夫人 商山 金氏) || ||||<:> '''{{{#gold 생부}}}''' ||<(> 이채(李埰) || ||||<:> '''{{{#gold 생모}}}''' ||<(> [[진주 류씨]](晉州 柳氏) || ||||<:> '''{{{#gold 부인}}}''' ||<(> 달성군부인 [[달성 서씨]][br](達城郡夫人 達城 徐氏) || ||||<:> '''{{{#gold 자녀}}}''' ||<(> 양자 [[은신군|1남]] || ||||<:> '''{{{#gold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720년]] [[10월 21일]] ~ [[1737년]] [[9월 5일]] || ||<:> '''[[태양력|{{{#gold 양력}}}]]''' ||[[1720년]] [[11월 26일]] ~ [[1737년]] [[9월 28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숙종(조선)|숙종]]과 명빈 박씨 소생 서자 [[연령군]]의 양자다. == 생애 == 1720년([[경종(조선)|경종]] 즉위년)에 [[한성부]]에서 권지승문원부정자와 [[홍문관]] 정자를 지낸 [[문신]] 이채와 부인 [[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6대손으로, 조선 왕실 직계와는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100여 년이 지난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1734년(영조 10년) 12월 21일(음력 11월 27일 무술) 영조의 어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숙종(조선)|숙종]]의 3남 [[연령군]]의 양자로 입적해 왕족이 되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U0_A10_11A_27A_00090|#]] 사실 연령군의 원래 양자는 따로 있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탄의 아들 [[상원군]] 공을 연령군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상원군은 아들 없이 죽고, 상원군의 생부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에 엮여 파양당했다. 그래서 다시 대가 끊긴 연령군의 양자로 낙천군이 지명받은 것이다. 낙천군은 입양 후 이름을 실사 변(糸) 항렬에 맞추어 '수신(守愼)'에서 '온(縕)'으로 [[개명|바꾸었다.]]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과 도총관을 역임했다. 1737년([[영조]] 13년) 2월에 서종수의 딸과 혼인했다. 그러나 혼인한 지 7달이 채 못 지난 그해 9월에 사망했다. 향년 16세.[*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으로는 18세.] == 가족 관계 == * 양부 :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년 ~ 1719년) * 양모 :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 [[임해군]]의 양자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의 손자인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의 외손녀](商山郡夫人 商山 金氏, 1698 ~ 1725) - 김동필(樂健亭 金東弼)의 딸 * 생부 : 이채(李埰, 1700 ~ 1762) - [[경창군]](慶昌君)의 5대손 * 생모 : [[진주 유씨]](晋州 柳氏) - 유만중(柳萬重)의 딸 * 동생 : 이유형(李惟馨, 1730 ~ ?) - 숙부 이게(李垍)의 아들 * 부인 : 달성군부인 [[달성 서씨]](郡夫人 達城 達城 徐氏, ? ~ 1784) - 서종수(徐宗秀)의 딸 * 양자 : [[달선군]] 이영(達善君 李泳, 1731 ~ 1748) - 양모에 핍박에 자살함, 후에 파양됨 * 양자 :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1월 11일 ~ 1771) == 사후 == [[덕흥대원군]]의 8대 사손인 동지돈녕부사 [[이형종(1706)|이형종]]의 아들 이영을 [[달선군]]으로 봉하고 낙천군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낙천군부인 [[달성 서씨]]가 달선군부인 신씨를 괴롭히자 [[달선군]]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 [[달선군]]은 자식이 없었고, 더군다나 [[달선군]]이 죽은 뒤 서씨 부인이 [[영조]]에게 건의해 [[달선군]]은 사후 파양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연령군]] - 낙천군의 대는 또다시 끊겼으며, 이에 [[영조]]의 손자 [[정조(조선)|정조]]는 이복동생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4010_001|#]] 그런데 이게 [[은신군]]이 죽은 후에 정한 데다가,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 조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 ' 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정조(조선)|정조]]가 " [[은신군]]이 낙천군의 제사를 받들기 주저해서 곧장 [[연령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라고 밝혔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5011_001|#]] 생전에 입적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쨌든, 그 [[은신군]]도 자식이 없어서 한동안은 예관들이 대신 제사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년)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1512015_002|#]]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 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식은 여러 기록과 정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92년에 편찬한 《선원계보기략》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한 《선원보》, 1892년(고종 29년)에 발행한 《선원계보기략》에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자녀로 적혀있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899년(광무 3년)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그의 후손들에게 [[황족]] 자격으로 [[군(작위)|군(君)]]으로 봉할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시켰다. [[https://ko.wikipedia.org/wiki/은신군|#]] 그러나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97%B0%EB%A0%B9%EA%B5%B0%ED%8C%8C%5E%EC%97%B0%EB%A0%B9%EA%B5%B0%ED%8C%8C|《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 연령군파》]]에는 [[은신군]]이 [[연령군]]의 후계로 나와있다.[* 1면.] 그런데 낙천군을 건너 뛴 채 바로 [[은신군]]이 연령군의 대를 잇는 것으로 나왔다. 낙천군은 본가인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3%5E%EA%B2%BD%EC%B0%BD%EA%B5%B0%ED%8C%8C%5E%EA%B2%BD%EC%B0%BD%EA%B5%B0%ED%8C%8C|《선원속보 - [[선조(조선)|선조대왕]] 자손록 권3 : [[경창군]]파, [[경평군(1600)|경평군]]파보》]]에 이름이 올라와있으며[* 25면.] ' [[정조(조선)|정조]] 때 특명으로 파양당한 뒤 본가로 돌아왔다(正廟朝特命罷歸本宗) '라고 쓰여있다. 그러니 [[남연군]]의 자손들은 항렬을 건너 뛴 채 [[연령군]]의 후손도 되고 [[사도세자]]의 후손도 되는, 족보 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놓였다. 이렇게 복잡한 [[연령군]]가의 계보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낙천군의 첫 무덤은 [[연령군]]과 [[명빈 박씨]] 묘가 자리하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서울)|대방동]]에 있었다. 이후 [[연령군]] 묘는 [[남연군]] 묘가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갔고, 낙천군 묘는 2000년대에 [[운현궁]] 4대 사손 [[이청]]이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들 [[의친왕|의친왕 이강]]의 2남이자 [[영선군|영선군 이준용]]의 [[양자(가족)|양자]].]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낙천군 뿐 아니라 [[은신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1882)|이문용]], 이우, [[이종#s-5|이종]][* [[이우]]의 아들이자 [[이청]]의 동생. 1966년 12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했다.]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 여담 == * [[혼인]]하기 정말 힘들었다. [[영조]]는 처음에 낙천군의 부인으로 세자시강원에서 일하던 시직 김치만(金致萬)의 딸을 지목했다. 그런데 이미 약혼한 상대가 있어서 거절당했다. 그러자 영조는 김치만을 체포하고 계속 설득했지만 김치만이 끝까지 반대하자 그를 삭탈관직시켰다. 한 번 물먹은 영조는 대신 [[정성왕후]]의 일족인 서종수(徐宗秀)의 딸과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서종수도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자 영조는 서종수를 옥에 가둔 다음 종부시[* 조선 왕실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친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했던 기관.]에 엄명을 내려 날짜를 정하게 한 다음 1737년(영조 13년) 4월에 혼인을 성사시켰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은신군, version=66, paragraph=3, title2=연령군, version2=73, paragraph2=4, title3=운현궁, version3=144, paragraph3=3)] [[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계동궁 종주]][[분류:1720년 출생]][[분류:1737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