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주 국왕)] || '''[[시호]]''' ||난왕(赧王) / 은왕(隱王) || || '''[[성씨|성]]''' ||[[희]](姬) || || '''[[휘]]''' ||연(延) || || '''아버지''' ||[[신정왕]] || ||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256년 || || '''재위 기간''' ||기원전 314년 ~ 기원전 25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주나라]]의 제37대 [[왕]]이자, 마지막 [[천자]]. [[신정왕]]의 아들. '난'(赧)이 시호가 아닌 본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까닭은 본명인 '연'(延)자와 '난'(赧)자가 당시에는 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위 당시 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영토는 좁고, 인구는 3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갈라졌는데, 주 난왕은 서주에 머물렀다.[* 다만 왕실이 갈라진게 아닌 주공(周公)이 갈라진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난'(赧)이라는 시호는 '喪國心懈'(상국심해), 즉 '나라를 잃고 후회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시호가 '은왕'(隱王)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라클리오스|너무 오래 살아서 오히려 피본 사람]]~~[* 왕위에 59년이나 있었다.(...) 당시에 59살까지 산 사람도 드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장수인 셈. 언제 태어났는지가 미상이고, 아버지 신정왕이 왕위에 얼마 못 있었다지만 할아버지 현왕도 48년이나 재위하고 죽은 걸 보면 어지간하면 70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엄청난 장수. 물론 이 장수 때문에 나라의 멸망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봐야 했으니 오히려 오래 살아서 더 비참한 삶이 되고 만 것이다.(당장에 섭정없이 재위 초기부터 실권을 펼친 왕들도 30~40대에 죽는 왕들이 수두룩했다.)] 이 당시 [[진(통일왕조)|진나라]]는 [[위(전국시대)|위(魏)나라]], [[한(전국시대)|한(韓)나라]], [[조(전국시대)|조(趙)나라]]의 여러 지방을 차지했고, 주나라를 능멸해 주왕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 치세 == 난왕 원년(기원전 314년), [[진(통일왕조)|진(秦)나라]]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와 [[삼진(전국시대)|삼진]](三晉)을 쳤다. 난왕 2년(기원전 313년), 진나라에서 [[장의]](張儀)를 초나라에 보내 제나라와 절교하면 상오의 600리 땅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초회왕]]이 그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거기에 넘어가자 [[굴원]](屈原), [[진진]](陳軫), 소수(昭睢)가 그 말을 듣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간신 근상(靳尙)과 왕후 정수(鄭袖)는 그 말을 들으라고 권해 결국 진나라에게 놀아났다. 이에 대노한 회왕은 진나라를 쳤다. 난왕 3년(기원전 312년), 진나라가 단양을 점령하는 등 회왕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난왕 7년(기원전 308년), 진나라 군대가 함곡관을 나와 [[한(전국시대)|한(韓)나라]]의 요충지인 의양을 함락시켰다. 그래서 진나라는 동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게 되었다. 난왕 8년(기원전 307년), [[조(전국시대)|조(趙)나라]]의 [[조무령왕|무령왕]]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사 전법을 받아들이고, 호복무사를 만들어 강성해졌다. 난왕 9년(기원전 306년), 초회왕이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에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오기(전국시대)|오기]](吳起)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 초나라의 귀족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나라가 발전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고,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초나라는 다시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난왕 16년(기원전 299년), 진 [[소양왕]]은 초 회왕을 무관에서 회맹한다는 구실로 불러들였다. 굴원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회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함양에 감금되었다. 그 뒤 인질인 태자가 초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경양왕]]이다. 난왕 18년(기원전 297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이런 행동에 분노해 초나라를 쳐서 5만명을 죽이고 15개 성을 점령했다. 난왕 19년(기원전 296년), 조나라가 [[중산|중산국]]을 멸함으로써 호복기사의 위력을 보였다. 난왕 22년(기원전 293년), 한나라와 위나라가 힘을 합쳐 이궐에서 진군에게 저항했으나 [[백기(전국시대)|백기]](白起)가 대승을 거두어 위나라 군대와 한나라 군대 24만명을 몰살해 양국의 국력이 추락했다. 난왕 27년(기원전 288년), 진 소양왕은 [[제민왕]]에게 자신을 서제(西帝), 민왕을 동제(東帝)라 칭하자고 했으나, 제 민왕은 소대[* [[소진(전국시대)|소진]]의 동생]의 말을 듣고 소양왕의 말을 무시했다. 난왕 29년(기원전 286년), 이미 위나라와 한나라의 영토가 진나라에게 많이 넘어갔다. 난왕 31년(기원전 284년), 연나라는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와 힘을 합쳐 [[악의(전국시대)|악의]](樂毅)를 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쳐서 임치를 비롯한 70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래서 제나라 땅은 거와 즉묵만 남았다. 제 민왕은 거 땅에서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에게 시해당했다. 난왕 35년(기원전 280년), 진나라는 초나라의 영토를 많이 빼앗았다. 난왕 36년(기원전 279년), 제나라의 장군 [[전단(전국시대)|전단]](田單)의 화우지계 활약으로 제나라는 다시 부흥했고 연나라군은 대패했다.[* 그때 악의는 [[연혜왕]]의 의심을 받아 경질되었고, 그 자리를 [[기겁]](騎劫)이 대신했다. ~~이름만 보면 겁쟁이 같다.~~] 난왕 37년(기원전 278년), 진나라는 결국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켰고, 이에 초나라는 수도를 옮겼다. 이 일로 굴원이 멱라강에서 자결했다. 난왕 53년(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니, 한의 상당군수 풍정은 상당군을 조나라에 바쳤다. 이에 진나라가 조나라로부터 상당 땅을 취하려 하니 [[조효성왕]]은 [[염파]]를 보내 대항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 계략을 써서 염파로 하여금 효성왕의 의심을 받게 해 실각시켰고, 대신 명장 [[조사(전국시대)|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그 자리를 채우도록 했다. 그후 [[장평대전]]에서 조괄이 대패해 전사했고, 조나라에서 항복한 병사 40만명은 백기의 명령으로 생매장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백기는 실각하고[* 물론 백기의 공로가 높아지자 자기 자리를 위협받을까 두려운 [[범저]](范雎)가 손을 썼다.], 결국은 [[범저]](范雎)의 압박으로 자결했다.[* 이때 백기는 자신이 죽는 이유를 조나라 항졸들을 죽인 죄라고 말했다.] 난왕 59년(기원전 256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양성과 부서를 빼앗았다. 결국 난왕은 진나라가 마음대로 날뛰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진나라를 쳤다. 그러나 [[소양왕]]이 분노하여 장군 [[규]](摎)를 보내서 주나라를 치니 난왕은 진나라의 국력에 눌려서 투항했다. 그래서 주나라와 서주(西周)는 멸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왕이 붕어했고, 서주공(西周公)은 탄호 땅으로 쫓겨났으며, [[구정]]은 진나라에게 넘어갔다. 동주(東周)는 낙양의 주나라 본국과 서주가 망한지 7년 뒤(기원전 249년)에 멸망해 주나라는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후대에 한나라가 희성 후손들을 찾아서 작위를 주고 제사를 지내라고 배려해주었다.] [각주] [[분류:주 국왕]] [[분류:기원전 256년 사망]][[분류:망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