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건국훈장 대통령장)] [include(틀:여성 독립운동가)]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남자현}}}[br]南慈賢 | Nam Ja-hyu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20140527101019745411.jpg|width=100%]]}}} || ||<#0047a0> {{{#FFFFFF '''본관'''}}} ||[[영양 남씨]][* 수의공파(修義公派)-안동 송동(松洞) 문중 22세 극(極) 항렬. 남자현의 오빠로 남극창(南極昌)이 있다. 아버지 남정한(南珽漢)은 21세 한(漢) 항렬.] || ||<|2><#0047a0> {{{#FFFFFF '''출생'''}}} ||[[1872년]] [[12월 7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일직현 송리[br](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 인근의 망호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장(독립운동가)|남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2016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생가가 조성되었는데 후손들의 주장에 의하면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가 출생지라고 한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813_0010223651&cID=10810&pID=10800|관련기사]]] || ||<|2><#0047a0> {{{#FFFFFF '''사망'''}}}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 || ||[[만주국]] [[지린성]] 하얼빈특별시[br](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 ||<#0047a0> {{{#FFFFFF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 [youtube(NpImMJET8x4)] ||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 놓고 하는 말 >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 >— 고정희.〈남자현의 무명지〉 [[대한민국|한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청산리 대첩]]의 부상자들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비판하고 [[독립]]을 위해 3번[* 각각 조국이 식민지가 되었음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민족끼리 싸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독립을 원하는 간절함을 담았다고 전한다.]이나 단지([[손가락]] 절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교양 수준 지식에서는 '여자 [[안중근]]'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사실은 남자현이 안중근보다 7살 위다.] == 생애 == 1872년 12월 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일직현 송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서 유학자인 아버지 남정한(南珽漢)과 어머니 [[진성 이씨]] 이원준(李元俊)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송리리 입향조 남창년(南昌年)의 12대손이다. 일찍이 아버지의 제자였던 [[의성 김씨]] 김영주(金永周)[* 족보명 김병주(金炳周).]와 [[결혼]]했으나 김영주는 그녀가 24살 되던 1895년에 [[을미의병]]에 가담했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평범한 전업 주부로 [[외아들]] 김선태(金善台)를 키우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할머니의 몸으로 아들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참여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위해 [[경성부]]에 잠입하였지만 거사 직전에 [[송학선]] 의사가 먼저 의거를 일으키는 바람에 경계가 강화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33년 주[[만주국]]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의 [[암살]]을 기획하였다. 거사일이 되어 얼굴에 상처를 내고 [[거지]]로 분장하여 잠입하였으나 삼엄한 경계 속에 불심 검문에 걸려서 체포되었다.[* 사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밀고하여 잡히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일제 밀정이자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 [[이종형]]이였다'''.] 일설에 의하면 체포되었을 당시 옷 속에 전사한 남편이 입었던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5일만에 [[사망]]하였다. || [[파일:external/image.kmib.co.kr/201509030053_23110923227376_2.jpg]] || || 남강 묘지 건립(좌) 묘지터 현재(우상) 현충원 허묘(우하)[*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국외 독립운동 가운데 사망했기 때문에 유해는 [[하얼빈]]에 있는 남강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근조화환은 암살 개봉 이후에 이경근 당시 서울지방보훈청장이 보낸 것이다.] || 남자현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중국]] 돈 248원(현재가치: 약3,500만원)[* 249원 설이 있다.] 80전을 주면서 200원은 독립을 하면 독립 정부에 축하금으로 전달하라[* 40원은 손자의 [[대학]] 진학금에 더하고 8원 80전은 본가에 전달하라고 했다.]고 유언을 남겼다. 1946년 첫 3.1운동 기념식에서 남자현이 남긴 돈 200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에게 정식으로 전달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국립현충원에 묘가 조성되었으나 유해의 한국 송환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묘를 만들었다. 1998년 [[후손]]들이 유해를 찾으려고 했으나 이때는 이미 남강 외국인 묘지 자체가 사라진 뒤였다. 이후 유해가 어디로 갔는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7698|행방이 묘연하다.]] 발굴 조사를 도와달라는 후손들의 요청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227376&code=23111111&sid1=mis|기사화]]되었으나 후속 대책은 없었다. == 창작물에서 ==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영화)|암살]]의 등장 인물 [[암살(영화)/등장인물#s-1|안옥윤]]의 모델이다. 덕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임에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남자현 의사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다소 환기되었다. 이후 생가가 조성되고 남자현 의사 기적비가 건립되었다. [[파일:external/newsimg.incruit.com/NISI20160601_0011755812.jpg]] 암살 개봉 이후 [[경상북도]] 우정청이 호국 영웅 [[우표]] 도안으로 [[주시경]]과 함께 안동 출신의 남자현을 포함시켰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암살(2015)/등장인물,version=89)]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72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영양 남씨]][[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