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구려-수 전쟁)] [include(틀:수서)] [include(틀:북사)] 來護兒 (? ~ 618년) [목차] == 개요 == [[수나라]]의 무장. 자는 숭선(崇善). [[내흡]]의 18세손이다. == 생애 == 남양 사람으로 [[진(육조)|진나라]](陳)가 멸망하고 590년에 옛 진나라였던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양소(수나라)#s-2|양소]]가 행군 총관이 되자 내호아는 자총관이 되어 고지혜(高智慧)를 토벌하는 것에 참여했는데, 고지혜가 절강의 동쪽 기슭을 점거하자 양소에게 군사 수천 명을 빌려주기를 요청해 군사를 받아서 가벼운 배 수백 척으로 강기슭에 올라가 군영을 기습해 격파하고 불을 질렀고 양소가 군사를 풀어 공격해 고지혜를 격파했다. 612년에 [[고구려]] 원정에 참가해 우교위 대장군을 지내면서 수군을 거느려 강회 지역의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패수를 거쳐 평양으로 향했는데, [[영류왕|고건무]]의 기습[* 과정은 평양성을 포기한다는 것으로 가장하여, 외성에 각종 물품들을 뿌리고 병사들을 매복시켰으며(물론 내호아가 오기까진 별도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내호아의 부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잔치를 벌이자(정확힌 외성에서 각종 물품들을 획득한 다음 내성까지 간 뒤 거기서 잔치를 벌인 것) 그제야 공격을 하여 내호아의 정예병들 상당수(총 10만 중 정예병력 4만 5천을 이끌고 쳐들어갔었다)를 전멸시켰다. 전략적으로 볼 때 시도한 작전 자체의 위험성을 제외한다면 2차 고수전쟁의 패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내호아가 유인책에 걸려들지만 않았더라도 우문술의 30만 별동군은 보급을 받고 기력을 회복해 평양성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평양성도 나름 강한 성이라 공성에 실패할 수도 있고 우문술의 기동 병력이 중간에 차단당하면 무장이 빈약한 수군을 이끄는 내호아가 그걸 해결해줄 수는 없으므로 성공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30만 대군이 공중분해 당하는 처참한 대실패는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으로 군사들이 패했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양제(수)|양제]]는 말 그대로 분노하여 내호아에게 참형을 명했으나, 그나마 다른 신료들이 말려 삭탈관직에 그쳤다. 이후 613년에 다시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지만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도를 포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우문술과 함께 이를 토벌하고 영국공(栄国公)에 봉해졌다. 614년에 고구려 원정을 해서 [[비사성]]에 도착해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 고수전쟁에서 수나라 최초로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이어 [[평양성]]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비사성이 함락되자 다급해진 고구려에서 [[곡사정]]을 돌려보내준다면서 형식적으로 귀부하는 것으로 화의를 제안하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한다. 내호아는 이때 군사를 돌리면 다시는 고구려를 멸망시킬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끝까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주변 인물들 모두가 반대해 결국 군사를 되돌린다.[* 당시 내부 반란으로 육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내호아의 병력으로만 평양성에 진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617년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将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618년에 [[우문화급]]이 강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양제(수)|수양제]]를 죽일 때 살해당했다. 공교롭게도 강도가 곧 양저우라 고향에서 죽은 셈이다. 내호아의 두 아들인 내항(來恒)과 내제(來濟)는 당나라에 등용되어 관직을 맡았다. == 대중매체에서 ==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정명환]]이 연기했다. 행적 자체는 역사와 비슷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우문화급]]이 [[양제(수)|수양제]]를 죽이려 할 때 무위장 독고성과 함께 이를 저지하려다 [[우문지급]]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 죽기 전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를 향해 "죽일 놈"이라고 일갈하며 수양제에게는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역사에 비해 다소 버프받았다. [[분류:618년 사망]][[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살해된 인물]][[분류:양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