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6.25 전쟁/전쟁범죄]][[분류:1950년/사건사고]][[분류:대한민국의 학살]][[분류:미국의 학살]][[분류:테러리즘]][[분류:영동군의 사건사고]][[분류:제1공화국/사건사고]][[분류:미군/사건 사고]][[분류:한미관계]] [include(틀:사건사고)] [youtube(YAHNJJxKigw)]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12C97505496B6831C.jpg|width=100%]]}}}|| || 당시 학살이 발생한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현재도 이 이름으로 같은 위치에서 사용되고 있다.[[https://naver.me/xpWD0vS3|#]]] || >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미군이 '''숫자 미상'''의 피난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 U.S. soldiers killed or injured '''an unconfirmed number''' of Korean refugees in the last week of July 1950 during...(후략) >---- > 한.미 공동발표문에서 발췌 [목차] == 개요 == [[6.25 전쟁]] 초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한동안 조명되지 않았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되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북한의 해방 일보는 영동군에서 미군이 양민 학살을 자행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미군은 영동군의 2개 마을에서 2,000명 정도의 민간인을 모아 유격대가 들끓는 인근 산악 지대로 데리고 간 뒤 대전이 함락되자 학살했다고 한다.또한 대부분은 공습으로 죽었지만, 여성들은 사살되기 전 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고도 보도했다.] 이후 [[미국]]과 [[한국]] 두 나라는 [[2000년]]에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 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했다. 다만 우발적 사고인지, 명령에 의한 사건인지를 두고 미국과 피해자 간의 이견이 있으며 이 사건은 미군이 [[독소전쟁]] 때의 [[독일 국방군]]과 마찬가지로 점령지 주민들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는 면모, 즉 전쟁에 대한 기초 상식이나 [[민사작전]] 능력이 부족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측면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미군]]과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현지에 대한 기초 상식이 매우 결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베트남]]을 [[중국]], [[소련]]과 같은 공산권이라는 이유로 한통속이라 착각했다든가... [[이라크]]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보여준 모습을 보면 현지에 대한 이해력이 아직도 부족하다.] == 사건 전개 ==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전략)"...인솔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미 육군 참전장병들은 마을에서 주민들을 호송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지명과 날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 공동 발표문 중]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 쟁점 == === 사격명령 여부 === 사건 당시 남측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 중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육군]] 병력이 숨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피난민 통제에 고심하던 미 육군 [[미8군|제8군]]은 사건 전날인 25일 저녁 주한미국대사관과 한국 정부와 함께 피난민 통제 대책회의를 실시했다. 이 회의에서 관계자들은 피난민을 "구호의 대상이 아닌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무초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차후 미국 내 논란이 걱정된다."는 서한을 작성, 보고하였다. 다음날인 26일 오전 10시, 미 육군 제8군사령부는 전 부대에 피난민이 미군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을 명령한다.[* "No repeat no refugees will be permitted to cross battle lines at any times." 청주문화방송 특집다큐멘터리. '노근리는 살아있다' 1부 내용 중] [[사령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예하 [[사단장]]들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예하부대에 명령을 하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All civilians seen in this area are to be considered as enemy and action taken accordingly." 1950년 7월 27일 미 육군 제25보병사단장의 명령. 출처 전동][* "Now anyone seen is considered enemy" 1950년 7월 29일 미 육군 제1기병사단 61[[포병]][[대대]] 전투일지. 출처 전동][* "Any refugees approching our defense position will be considered to be En and will be disperwde(?) by all available fires including Art. 1950년 8월 17일 제25보병사단 제35보병연대 전투일지. 출처 전동][* "No refugees to crosr the front line. Fire everyone trying to cross lines. Use discretion in case of women and children. 1950년 7월 24일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전쟁일지. 출처 전동] 그러나 노근리 피해자들에게 공격을 가한 미 육군 제1[[기병]][[사단(군사)|사단]] 제7기병[[연대(군대)|연대]][* 영화 [[위워솔저스]]가 배경으로 했던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됐던 그 부대다. [[리틀 빅혼 전투]] 당시 전멸했고, 이후 [[운디드니 학살사건]]을 저지른 주범이기도 하다. 그때의 전멸 때문인지 중간에 재창설된 전적이 있다.] 2[[대대]]의 전투관련 문서 중에서는 이러한 명령이 포함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아 미 조사단은 해당 부대에는 피난민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적이 없으므로 미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대신 미 조사단은 공동발표문을 통해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나이가 어리고 훈련 및 장비가 부족했다고 언급했다. === 공중폭격 여부 === 26일 철로로 이동 중이던 피난민들에게 가해진 공중폭격에 대해 한.미 조사단은 당시 노근리 주변에 몇 차례의 [[공군]] 작전이 수행된 사실은 있으나 피난민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는지는 해당 작전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피해자 측은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 후, 또 다른 비행기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 생존자 양해숙, 금초자의 증언], '미군이 소지품 검사 이후 무전을 날렸고 이후 폭격이 시작됐다."[* 생존자 금초자, 박선용의 증언. 이상 증언은 nogunri.net 에서 인용]고 일관적으로 증언했다. == 조사결과 발표 후 == 2004년 2월 9일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195590#0000|'''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같은 해 3월 5일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공포되었다. 이후 피해자 가족들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현재까지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공식조사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용사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양심적 진술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 고 밝혔고 이후 AP통신을 통해 증언했던 참전용사들은 증언내용을 번복했다. 이후 증언자들의 사망과 연락두절, 증언 거부 등으로 인해 미군측 증언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 이후 == 현재도 노근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서송원천의 쌍굴다리 위로는 [[경부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영동역]]과 [[황간역]][* 특히 황간역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목록|스탬프]] 도안은 노근리 쌍굴다리이다.] 사이에 위치한 사건 현장인 개근철교(쌍굴)에는 여전히 총탄자국 수백 개가 남아 있다(○, △표시). 길 건너편에는 노근리 역사공원과 노근리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방문을 원한다면 자가용으로 운전할 시 [[황간IC]]에서 '''대전•영동''' 방면으로 내려오면 되고 버스를 탈 시 [[영동역]]이나 [[황간역]]에서 영동 - 황간간 [[동일버스|농어촌버스]]를 타면 된다. 생각보다 자주 다니니 시간표를 확인하고 맞춰서 타면 된다.[[https://naver.me/xpWD0vS3|네이버 거리뷰]] 1999년 이 사건을 조명한 AP 취재팀(최상훈, 찰스 J. 헨리, 마사 멘도자)은 2000년 탐사 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법원]]은 경찰 직무유기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https://www.scourt.go.kr/portal/news/NewsViewAction.work?seqnum=4581&gubun=2&searchOption=&searchWord=|2018다214562]] == 문화에서 == *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투자자들과 영화사의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끝내 촬영을 끝마치고 2010년 개봉하였다. 쟁쟁한 배우들이 무보수로 열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소설로 유족 정은용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노근리 이야기>라는 만화를 그렸다. 또 다른 소설로는 이현수의 <나흘>과 김정희의 <노근리, 그 해 여름>이 있다. * 넷플릭스의 드라마 [[메시아(드라마)|메시아]]에서 알 마사히가 미국 대통령에게 심문받을 때 언급한다. 이외에 [[미라이 학살]] 같은 미군들이 저질렀던 대표적인 [[전쟁범죄]]들을 언급한다. * 노근리사건 70주년 추모시 공모전에는 강은아의 시 <노근리의 봄>이 최우수로 당선되었다. * 미국 해군 법무관을 주인공으로 한 미드 JAG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한 바 있다.[[https://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PRINT/222833.html|#]][* 참고로 이 드라마의 [[스핀오프]]가 바로 [[NCIS(드라마)|NCI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