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66년 출생]][[분류:1028년 사망]][[분류:보저우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2> '''{{{+1 魯宗道[br]노종도}}}''' || || '''시호''' ||숙간(肅簡) || || '''성''' ||노(魯) || || '''이름''' ||종도(宗道) || || '''자''' ||관지(貫之) || || '''출신''' ||박주(亳州) 초현(譙縣) || || '''생몰''' ||966년 ~ 102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관료로 자는 관지(貫之). == 생애 == 박주(亳州) 초현(譙縣)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자랐다. 노종도의 외삼촌들은 모두 무인으로 노종도를 매우 경시했지만 노종도는 더욱 학문에 열중했다. 이전에 자신이 쓴 글을 소매 속에 숨기고 척륜(戚綸)을 만났을 때 척륜은 노종도를 매우 중시했다. 뒤에 노종도는 진사에 급제하여 호주(濠州) 정원현위(定遠縣尉)가 되었고 다시 해염현령(海鹽縣令)으로 전임되었다. 현의 동남쪽에는 도랑이 있어서 해수를 성 아래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도랑이 막혀버리자 노종도는 향정을 징발하여 치수사업을 벌였고 사람들은 노종도의 치수사업을 칭송하며 노종도를 '노공포(魯公浦)'로 불렀다. 이후 흡주(歙州) 군사판관(軍事判官)으로 전임되고 다시 비서승(秘書丞)으로 옮겼으며, 진요수(陳堯叟)가 통판으로 벽소하였다. 1017년, 중서성과 문하성에 간관 6명을 둔다는 조서가 선포되었다. 이때 노종도는 고과가 가장 높았기에 유엽(劉燁)과 함께 우정언(右正言)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간관의 상주문은 모두 각문(閣門)을 거쳐 황제에게 전달되었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노종도는 황제와 직접 대면해서 의논하고 상주문을 통진사(通進司)를 통해 전달하는 것을 주청했으며, 노종도의 주청은 곧 관례로 남았다. [[장헌명숙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노종도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장헌명숙황후: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어떤 군주였소? >노종도: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죄인으로 당나라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했습니다. 장헌명숙황후는 노종도의 대답을 듣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뒤에 유씨칠묘를 세우자는 청원이 조정에 올라오자, 장헌명숙황후가 대신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물었는데 대신들은 여기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종도는 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유씨칠묘를 세운다면 사군(嗣君)은 어떻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