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www.wjhirten.com/400-1213.jpg]] Our Lady of Knock [목차] == 개요 == [[파일:external/stbrigidccd.com/OurLadyofKnock.jpg]] [[1879년]] [[8월 21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카운티 메이요(County Mayo)의 노크에서 일어난 [[성모 발현]] 사건.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성모 발현들 가운데 특이하게 메시지가 단 하나도 없는 발현 사례이다. 이 때 [[성모 마리아]]는 [[나자렛의 요셉]], [[사도 요한]]과 함께 발현했는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다른 발현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메시지를 남기고 간 것과 비교할 때 정말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의 성모|파티마에서의 발현]]은 다양한 메시지를 전했으며,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여러 차례 발현도 메시지를 동반한 것에 견주어 볼 때 아무 말도 않고 사라진 이 성모 발현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이례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의 유일한 성모 발현이기도 하다. [[성모 발현]] 당시에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차별과 박해를 받는 등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인]]의 대다수는 일찍부터 들어와 있던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세속화 물결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설상가상 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대기근|대기근]]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국외로 이민을 가는 등 문자 그대로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때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주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 반응 == 사건 직후인 [[1879년]] [[10월 7일]] [[가톨릭]]의 투암교구 대주교에 의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긴 시간동안 조사에 들어갔다.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현상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었다. 이후 [[1935년]]에 구성된 2차 조사위원회에서도 그 때까지 생존해 있던 증인들을 통해 1차 조사위원회의 증거들을 재확인했다.[* [[영어]]가 된다면 [[http://www.catholicpamphlets.net/pamphlets/KNOCK%20AND%20ITS%20SHRINE.pdf|이곳]]을 참고하자.] 결국 여러 [[교황]]들이 축복하거나 방문하는 등 [[교황청]]에서도 사실상 인정하게 된다.[* 당연히 [[성모 발현]]은 공적계시가 아니므로 반드시 믿어야 하는 교리는 아니다.] [[1963년]], 노크 성지에는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노크 대성당이 들어섰다. [[1979년]] [[9월 30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명단|역대 교황]] 최초로 [[아일랜드]]를 방문하였고, 노크 성지에서는 [[교황]] 방문 기념으로 [[황금장미]]를 기증했다. [[1993년]]에는 [[마더 테레사]]도 방문했다. 현재 일대는 양화진의 [[절두산 성지]]나 [[새남터 성지]]처럼 성지로 꾸며져 있다. [[가톨릭]] 신자라면 [[아일랜드]]에 갈 때 들러보고, 시간이 맞다면 ~~물론 [[영어]] 리스닝이 된다는 전제 하에~~ [[미사]]도 드려 볼 만하다.[* 실은 영어 리스닝 안 되어도 별 상관 없다. [[가톨릭]]은 전 세계 어디든 [[미사]] 순서와 주요 기도문이 같기 때문이다. 전세계 공통이며, 여전히 권장되는 [[라틴어 미사]]일 때야 말할 것도 없고.] [각주] [[분류:1879년/사건사고]][[분류:성모 발현]][[분류:아일랜드의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