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19년 출생]][[분류:967년 사망]][[분류:창저우시(허베이성)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盧懷忠 (919년 ~ 967년) [[북송]]의 관료로 영주(瀛州) 하간현(河間縣) 출신이다. == 생애 == 노회충은 젊은 시절에 육체적인 힘 있었고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다. 노회충은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건우(乾祐) 원년(948년)에 하중(河中)에 기거했는데, 이때 이수정이 배반하고 [[곽위]]가 이수정을 포위했다. 노회충은 밤에 성을 넘어 곽위를 알현하여 곽위에게 계책을 바쳤으며, 이수정의 반란이 평정된 뒤 공봉관이 되었다. [[후주]]가 들어선 뒤 노회충은 연주(兗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용언초를 토벌할 때 종군하였다. 그리고 현덕(顯德) 연간에 기주감군(沂州監軍)으로 전출되었으며, 해주(海州)를 함락시킬 때 큰 공을 세웠다. 뒤에 시영이 북벌을 논의할 때 먼저 노회충을 파견하여 도로를 살피게 했으며, 삼관(三關)이 평정된 뒤 여경부사(如京副使)로 임명되었다. 북송이 들어선 뒤 내주방부사(內酒坊副使)로 옮겼다. 963년, 주행봉 사후 낭주(朗州)에서 군란이 벌어지자, [[태조(송)|태조]]는 낭주의 군란을 진압하고자 먼저 노회충을 [[남평]]에 사신으로 파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남평의 인정과 거취는 물론 산천의 향배를 모두 알고 싶소. 남평에서 돌아온 노회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계충]]의 병사들은 비록 정연하지만 그 숫자가 3만을 넘지 못하며, 비록 풍년을 거두고 있지만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남평은 남쪽으로는 장사와 가깝고 동쪽으로는 금릉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파촉과 가깝고 북쪽으로는 조정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 형세를 보건대 대개 날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보권의 사신이 돌아온 뒤 태조는 재상 [[범질]] 등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릉은 사분오열하고 있으니 지금 호남으로 출병하되 형저(荊渚)에 임시로 길을 빌리고 거듭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만전책이오. 곧바로 노회충을 전군보군도감(前軍步軍都監)으로 삼으며, 남평이 평정된 뒤 노회충은 내주방사(內酒坊使)로 승진하였다. 964년, 판사방관사(判四方館事)로 전임되고 지강릉부(知江陵府)로 전출되었다. 966년, 북송이 [[후촉]]을 정벌할 때 노회충은 북송에 물자를 지원한 공으로 객성사(客省使)로 승진하였다. 967년 노회충은 [[남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중도에 병에 걸려서 가마에 올라 수도로 귀환했다. 태조는 의사를 보내 노회충의 병세를 살피게 했으나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 1011년, 노회충의 아들인 노희(盧熙)를 교서랑(校書郞)으로 등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