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에도 시대/인물]] [[분류:1843년 출생]] [[분류:1890년 사망]][[분류:일본의 교육인]] [[분류:일본의 목사]] [[분류:대학교 설립자]][[분류:치요다구 출신 인물]][[분류:종4위]] ||<-2>
{{{+1 '''{{{#white 니지마 조(新島襄)}}}'''}}}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3173fb593505281c6134918fb44b63e2844350.jpg|width=100%]]}}} || || '''{{{#white 본명}}}''' ||'''니지마 조'''[br]{{{-1 ''新島襄(にいじま じょう), 新島七五三太(にいじま しめた, 니지마 시메타)[* 어릴적 이름이다.]''}}}|| || '''{{{#white 별명}}}''' ||Joseph Hardy Neesima|| || '''{{{#white 국적}}}''' ||[[일본]]|| || '''{{{#white 종교}}}''' ||[[개신교]] || || '''{{{#white 출생}}}''' ||[[1843년]] [[2월 12일]] [[일본]] [[무사시노쿠니]] [[에도]] [[칸다]]|| || '''{{{#white 사망}}}''' ||[[1890년]] [[1월 23일]](46세), [[일본]] [[카나가와현]] 유루기군 오오이소마치|| || '''{{{#white 학력}}}''' ||[[애머스트 칼리지]], Andover Theological Seminary|| || '''{{{#white 직업}}}''' ||교육자, [[목사]]|| || '''{{{#white 배우자}}}''' ||니지마 야에(新島八重)|| [목차] [clearfix] == 개요 == >人一人は大切なり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배다 >我が校の門をくぐりたるものは、政治家になるもよし、宗教家になるもよし、実業家になるもよし、教育家になるもよし、文学家になるもよし、且つ少々角あるも可、気骨あるも可。ただかの優柔不断にして安逸を貪り、苟も姑息の計を為すが如き軟骨漢には決してならぬこと、これ予の切に望み、ひとえに希うところである >우리 학교의 문을 넘는 이들이 정치가가 되든, 종교인이 되든, 문학가가 되든, 또한 조금 서투르든, 갖은 일로 근심이 있다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유유부단하여 매일을 허무하게 보내지 아니하며, 적어도 고식지계[* 姑息之計, 잠시의 이득과 안정을 위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일삼는 가벼운 인간이 되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며 한결같이 희망하는 바다. >私の胸中には一点の曇りもない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구름조차 없다 니지마 조는 [[일본]]의 [[개신교]]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영어권]] 국가에서는 [[미국]] [[유학]] 중에 사용한 이름인 조지프 하디 니지마(영어: Joseph Hardy Neesim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교토시]]에 [[도시샤대학]]과 [[도시샤여자대학]]의 전신인 도시샤 영학교(同志社英學校)를 설립했다. [[메이지시대]]의 6대 교육자(明治六大教育者)중 한명으로[* 니지마 외의 나머지 5명은 오오키 타카토, 모리 아리노리, 콘도 마코토,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람이다. 아내인 니지마 야에(新島八重)와 함께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 생애 == === 미국으로의 유학 === [[무사(역사)|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4년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에 의한 출국 금지령에도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에 걸친 항해 끝에 [[보스턴]]에 도착하여 [[애머스트 칼리지]][* 니지마 조가 유학한 [[애머스트 칼리지]]에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후, 클라크 박사는 니지마 조의 소개로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 [[홋카이도]]의 개척을 위하여 삿포로농학교에 초빙되어 1876년 7월에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등에서 약 10년간 유학했다. [[보스턴]]으로 밀항하기전 우선 [[하코다테시|하코다테]]로 향한 니지마는, 그곳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이자 성인인 니콜라이 야폰스키와 만나 교류를 하였다. 니콜라이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권유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미국]]으로 향할 의지를 비치자, 그와 [[사카모토 료마]]의 친척인 사제(司祭) 사와베 타쿠마, 후쿠시 나리토요가 니지마의 밀항을 도왔다. 그후 니지마는 [[하코다테]]에서 밀항해 일단 [[상하이시|상하이]]까지 간후 다른 배로 갈아탔다고 한다. 이때 선장에게 joe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을 추후에도 사용하게 된다. [[미국]] 유학 중에 [[에도 막부]]가 무너져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고, 초대 주미공사인 모리 아리노리의 도움으로 밀항 죄가 사라지면서, 공식적으로 유학생 신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애머스트 칼리지]]에서는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는 서구권 대학에서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받은 정식 학사학위라고 한다.[* 정확히는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통틀어 최초이다.] 졸업 후에는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또한, 유학 당시에는 [[미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행하여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통역과 교육제도 설립계획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 재정의 2%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파견한 사절단 내에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후일 일본의 정치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이때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근대국가의 형태에 대해 알게 된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견인했다.] === [[도시샤]] 영학교 설립 === 귀국 후 '기독교주의에 입각한 [[양심]]적이고 능력있는 젊은이를 양성하겠다'는 목적 하에 모금운동을 시작했고, 후에 [[오사카]]에 학교설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당시 일본은 [[가톨릭]]이 다수파였기에, 가톨릭파가 없는 오사카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반대파에 의한 반대가 심해 좌절되고 마침내 [[교토]]에 1875년에 [[도시샤대학]]의 전신인 도시샤영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년 후에는 여성들을 위한 학교인 [[도시샤여자대학|도시샤여학교]]도 세웠다. 니지마 야에와 만난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에는 학생교육과 학교의 발전에 전념했으나, 지병이었던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4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 여담 == * 니지마 조는 2013년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의 여주인공, 니지마 야에(新島八重)의 남편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해당 드라마에서는 [[오다기리 죠]]가 니지마 역을 맡았다. [[야에의 벚꽃]] 외에도 [[메이지 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역사 드라마에 여러 번 나온 적이 있다. [[파일:2027262_201308110834622001376168432c.jpg|width=70%]]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니지마 조 * 조선의 종교가 [[이수정(1842)]]과 함께 찍힌 사진이 있다. [[한복]]을 입은 인물이 이수정이고 그 바로 위가 니지마 조이다. 니지마 조의 왼쪽은 [[우치무라 칸조]](内村鑑三)이다. [[파일:external/kccj.jp/3436ca53ce3c6fe6bf962ff06eb3b160.jpg|width=700]] * [[홋카이도]]의 개척자이자 [[홋카이도대학]](당시 삿포로농학교)의 초대 학장을 지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를 [[애머스트 칼리지]]에서의 인연으로 일본 정부에 소개해 일본으로 초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도시샤대학]] 캠퍼스 안에는 그의 이름을 딴 클라크 기념관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사상가들이 그와 크고 작은 교류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들은 [[도시샤대학]]에 설치되어있는 니지마 조, 건학에 관련된 수업이나 그에 대한 연구 서적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