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령군의 면]] [include(틀:고령군의 읍면)] ||<-2> '''[[파일:고령군 CI.svg|height=15]] [[고령군|{{{#000000,#dddddd 고령군}}}]]의 [[면(행정구역)|{{{#000000,#dddddd 면}}}]]'''[br]'''{{{+1 다산면}}}'''[br]茶山面 | Dasan-myeo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고령군 다산면, 너비=100%, 높이=100%)]}}} || || '''광역자치단체''' || 경상북도 || || '''기초자치단체''' || 고령군 || || '''행정표준코드''' || 5200032 || || '''관할 법정리''' || 10리 || || '''하위 행정구역''' || 20행정리 134반 || || '''면적''' || 45.86㎢ || || '''인구''' || 8,166명[* 2022년 11월 주민등록인구] || || '''인구밀도''' || 178.06명/㎢ || || '''정치''' ||<^|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2> '''국회의원 | {{{-1 고령군·성주군·칠곡군}}}''' || ||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 [[정희용]] ,,(초선),, || ||<-2> '''경상북도의원 | 고령군 선거구''' || ||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 노성환 ,,(초선),, || ||<-2> '''고령군의원 | 나 선거구''' || ||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 성낙철 ,,(초선),, || ||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 [[이달호]] ,,(4선),, ||}}}}}}}}} || ||<|2> [[행정복지센터|{{{#ffffff '''행정복지센터'''}}}]] || 다산로 681 || || [[http://www.goryeong.go.kr/dasan/index.do?sec=twn005|다산행정복합타운]] || [목차][clearfix] == 개요 == [[경상북도]] [[고령군]]의 [[면(행정구역)|면]]. [[낙동강]]을 끼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사문진교]]를 통해 이동 가능), [[논공읍]], [[다사읍]], [[하빈면]]과 맞닿아 있다. == 지명 유래 == 『여지도서』에는 다질면(茶叱面)과 벌지면(伐知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읍지』에는 다질면이 다기면(茶基面)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질면은 조선 말기에 다산면(茶山面)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신라 초기에 다사지현(多斯只縣)이었다가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하빈현(河濱縣)으로 고치고 수창군(壽昌郡) 또는 수성(壽城)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9년 하빈현을 지금의 달성군 하빈면 현내동(縣內洞)으로 옮기고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군]]]에 딸리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대구부(大邱府)에 속하였다가 다시 성주로 편입되면서 다기방(茶基坊)·다산방(茶山坊)·벌지방(伐知坊)이라 하였고, 1906년 고령군에 편입하였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다산면(茶山面)의 곽촌(藿村)·지내(池內)·법동(法洞)·신동(新洞)·상곡·좌학(侳鶴)·발산(鉢山)·평리(平里)·호촌(湖村)·사촌(沙村), 벌지면(伐知面)의 나정(羅亭)·아시(阿時)·벌지(伐知)·동암(東岩)·남촌(南村)·상로(上老)·하로(下老)·장척(長尺)·남양(南陽)·노곡(蘆谷)·삼동(三洞)을 병합하여 다산면(茶山面)이라고 하고 평리·좌학·상곡·호촌·곽촌·월성·나정·벌지·송곡·노곡의 10개동으로 개편하였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이(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 특징 == 고령 내 읍면 중 인구가 [[대가야읍]] 다음으로 많으며 군민의 30% 가량이 다산면에 살고 있다. 지리상 [[대가야읍]]과 맞닿아 있지 않은 유일한 면이다. 반면 [[달성군]] [[화원읍]]과는 지척에 있고 배차간격 10분대의 간선버스인 [[대구 버스 650]]가 절찬리에 들락거리는 곳이다. 이때문에 고령(대가야읍)과는 별로 교류가 없으며 주민들도 고령군민이라는 자각이 거의 없다. 생활권으로는 [[화원읍]] 생활권이며, 넓게는 [[월배]] 생활권에 들어간다. 다산면소재지를 기준으로 [[고령군청]] 보다 [[대구광역시청]]이 더 가깝다. 특산물로는 한약재로 쓰이는 향부자가 있다. 고령축산물공판장이 있다. 대구 시내를 지나가다 보면 고령 몇 번 중개인 하면서 고깃집이 있는 모습을 제법 볼 수 있는데, 다 고기를 여기서 떼오는 것. 고령 공판장 앞에도 고깃집이 몇 개 있다. 직접 구입도 가능하다. 윗 동네 [[성주군]]만큼은 아니지만, 참외 농사도 많이 짓는다. == 교통 == === 도로 === 다산면에서 [[화원읍]]을 잇는 [[사문진교]]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개통되었고, 다산면에서 성산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낙동강변 도로도 1990년대 이후에 개통되었다. 그 전에는 도로를 통해 다산면으로 진입하려면 벌지리~송곡리 간 고갯길([[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 득성리행이 다녔던 구길)로 진입했어야 했던 듯한데, 이 고갯길은 왕복 1.5차선 정도의 좁은 길이다. 게다가 [[이니셜D]]의 경사진 [[헤어핀]] 비슷한 코스가 송곡리와 벌지리 사이에 있는데, 2014년 11월부터 [[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에 투입 중인 [[저상버스]]가 헤어핀을 아슬아슬하게 꺾어서 들어갔다. 현재는 이 헤어핀 구간 옆에 신길이 생겼고, [[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도 신길로 운행 중이다. 그리고 신길 끄트머리에는 골프장이 하나있다. 물론 사문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화원읍]]으로 진입할 수는 있었지만 사문진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꽤나 고립된 곳이었다. 2013년에는 [[다사읍]]과 이어지는 길이 810m의 우륵교가 생겼다. 강정고령보에 지어진 다리로 따지고들면 보는 물길을 제어하는 장치며, 통행은 다리로 하기에 구분한 것이다. 우륵교 개통으로 대구 쪽으로 생활권이 더 넓어지나 했지만,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우륵교는 강정고령보를 유지 및 보수하는 공도교라고 못박으며 일반 차량의 통행은 계획에 없다고 한다. [[대구 버스 650|650번]]을 타고 가다 보면 차량통행을 열어 달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대신 강정고령보 상류 1km 지점에 곽촌교(가칭)를 신설할 예정이기는 하다. 대구 시내버스는 [[대구 버스 836|836번]] 노곡리/득성리행이 간간히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좌석버스였던 608번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다산면 주민들이 대구 시내로 나갈 때의 교통비 부담이 상당했었다. 이후 2006년 2월 개편 때 608번이 폐선되고 836번의 가지노선도 정리되어, 현재는 [[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과 [[대구 버스 650|650번]]이 운행 중이다. 이 때 대구 시내버스가 무료환승제를 실시하면서 다산에 들어오고 있었던 [[고령군]] 버스였던 607번은 [[대구 버스 650|650번]]에 밀려 공기화 됐다. 또한 2006년 7월에 [[다산회차지]]를 정비하여 [[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과 [[대구 버스 650|650번]]이 풀 타임으로 다산면에 들어오고 있다. 고령방면 버스교통은 굉장히 불편하다. 1일 7회 밖에 버스가 운행하며 이 마저도 1일 2회는 [[성산면]]을 거쳐가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닌 [[성주군]] [[용암면]]을 거쳐 [[굴곡 노선|돌아간다.]] 시간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이 화원까지 가서 [[고령 버스 606|606번]]을 타야한다. === 대중교통 === ==== 버스 ==== * [[대구 버스 650]] * [[대구 버스 달성1]] * [[고령 버스 고령-다산]] * [[다산회차지]] == 교육 == === 관내 학교 목록 === * 초등학교 - 다산초등학교 * 중학교 - 다산중학교 === 교육 환경 === 면 내에 고등학교가 없는 데다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 동네에 사는 중학생들은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고등학교로 진학이 가능하다. 그래서 등하교 시간에 상곡리의 [[다산회차지]]에서 출발하는 [[대구 버스 650|650번]]은 매우 혼잡하다. 실제로 다산면은 대구 2학군[* [[가창면]]을 제외한 달성군 전역, 달서구, 서구, 남구, 고령군 다산면. [[가창면]]은 달성군 소속이지만 [[수성구]] 생활권이라서 1학군이다.]에 지정되어 있다. == 환경 == == 주변 시설 == === 주거 === ==== 곽촌리 ==== * [[한국토지주택공사]] / (주)서한 다산3단지 LH 휴먼시아 - 2011년 3월 입주. ==== 상곡리 ==== * 우석건설 다산 월드메르디앙 엔라체 - 2023년 12월 입주 == 하위 리 일람 == === '''평리리''' === '''면사무소 소재지다.''' 매우 [[크고 아름답다|크고 아름다운]] 행정복지센터가 위치해 있다. === 호촌리 === 사문진교가 있다. === 곽촌리 === [[대구문화방송]] 라디오의 AM 송신소가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이나 [[옥포읍]], [[달서구]] [[성서(대구)|성서]]에서 곽촌리 방향으로 보면 멀리 보이는 뾰족한 뿔 모양의 철탑이 바로 AM 송신소다.[* 개국 초기에는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대명9동에 있었다. 이후 [[달서구]] 진천동으로 이전했다가 또 다시 [[달서구]] 월암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97년 말부터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력은 20kW. 현재는 AM 송출이 중단됐다.] === 상곡리 === 시내버스 종점이 있는 동네며 다산주공2단지 앞에 [[다산회차지]]가 있다. [[대구 버스 달성1|달성1번]]과 [[대구 버스 650|650번]]이 다니는 평리리와 상곡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앞으로 상곡지구가 들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더 생길 예정이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7596&yy=2015#axzz3WDr1Oo1X|「달성 넘어 고령까지…대구 베드타운의 확장」, 2015-04-02, 매일신문]]] === 좌학리 === === 월성리 === 다산중학교가 있다. === 노곡리 === === 송곡리 === 조선 말기 성주군 벌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06년(고종 43) 고령군에 편입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노동·삼동을 병합하여 송곡동이라 하고 다산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5월 1일 다산면 송곡리가 되었다. 송곡1리·송곡2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마을로는 송곡·삼동·하노다가 있다. - 송곡(松谷)·금곡·씨실 :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 속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가을에 단풍이 들면 비단같이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에서 금곡(金谷)이라하고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또한 송곡(松谷)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인봉산, 서쪽으로 덕적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 삼동(三洞) : 송곡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송곡2리 마을인데, 이 마을을 형성할 때 수성나씨(壽城羅氏), 함안조씨(咸安趙氏), 안동권씨(安東權氏)의 3성이 개척하였다 하여 삼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다산2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주민이 타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 하노다(下老多) : ① 삼동 동쪽의 낙동강가에 있는 마을인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영조 임금 아들(사도세자)의 경종사호(景宗賜號) 문제로 장희빈에게 휘말리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면서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가는 도중이곳에서 잠깐 쉬어갈 때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노다(老多)라고 불렀다. 음이 변하여 놉대기라 하고 아래 노다를 아래 놉대기라 부른다. 문화 유적으로는 1712년(숙종 38)에 세워 [[송시열|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노강서원'''과 [[문화재자료|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679호로 지정된 '''노강서원 고문헌''', 1938년에 건립하여 [[향토문화재|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된 [[조상(학자)|봉강 조상]]의 재실인 '''[[조상(학자)#s-7|후송재]]'''가 있다. 산업 시설로 다산지방산업단지가 있다. 다산지방산업단지는 총면적 64만 6055㎡으로, 2007년 현재 61개 업체, 2,086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 송곡1리 ==== 송곡1리 송곡마을은 [[창녕 조씨]] 집성촌으로 26세대가 모여 살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전(성씨)|담양 전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고, 1728년([[영조]] 4년) 경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의 현손(玄孫)인 조성좌(曺聖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적장자 조명상(曺明相)과 동생 조명협(曺明莢)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해 [[묘산면|합천군 묘산면]]에서 심산유곡(深山幽谷)인 [[가창면|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에 은거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어느정도 평정되자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입향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창녕 조씨]] 관련 유적'''으로는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송곡문중 후손들이 선조를 위한 추원보본(追遠報本)과 친목을 도모하는 종청(宗廳)으로 활용하기 위해 1916년에 창건한 '''경심재''', 개항기 성리학자 [[조상(학자)|봉강 조상]]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1938년에 건립한 '''[[조상(학자)#s-7|후송재]]'''[*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 10호'로 지정되었다.], [[조상(학자)|봉강]]의 증조모이자 창녕조씨 문중의 효부 해주오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0년에 세운 '''해주오씨 숭효각'''이 있다. 후송재 좌측에는 입향조 조명상·명협의 아버지 조성좌의 유허비인 '''창녕조공휘성좌유허비'''가 있고, 후송재 내부에는 2012년에 후학들이 [[조상(학자)|봉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가 있고, 후송재 우측에는 [[유학자]]였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학산창녕조공추모비'''가 있다. <창녕조씨(昌寧曺氏) 연원(淵源)> 조성좌(曺聖佐)는 대호부로 합천·고령 양 고을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으며 가신(家臣)이 800명이 넘었다 하며 식사 때마다 곡식 씻은 물이 몇 십리를 흘렀다고 합천 지방에서는 전해오고 있다. 혼탁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영조 4년(1728) 지방선비들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 [[이인좌의 난|무신사화]]다. 실패한 자손들은 역신(逆臣)이 두려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아들 형제인 조명상(曺明相)·명협(明莢)은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에 잠시 머물렀으나 불안하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의 막내 손자 조시민(曺時閔)이 합천에서 이거(移居)하여 칩거(蟄居) 중 이던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함께 거주하게 되어 송곡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때가 조선 영조4년 1728년 경이다. === 나정리 === === 벌지리 === 성산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고령군, version=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