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1 唐臨 | 당림}}}}}}'''}}} || ||<:>'''{{{#ece5b6 성}}}''' ||<(> 당(唐) || ||<:>'''{{{#ece5b6 이름}}}''' ||<(> 림(臨) || ||<:>'''{{{#ece5b6 자}}}''' ||<(> 본덕(本德) || ||<:>'''{{{#ece5b6 출신}}}''' ||<(> 경조(京兆) 장안현(長安縣) || ||<:>'''{{{#ece5b6 조부}}}''' ||<(> 당근(唐瑾) || ||<:>'''{{{#ece5b6 생몰년도}}}''' ||<(> 600년 ~ 65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인물로 자는 본덕(本德). == 생애 == 600년에 당근(唐謹)의 손자로 태어났다. 당림의 조상은 북해(北海)에서 관중으로 옮겨 살았고, 당림은 경조 장안현 출생이 되었다. 당림은 형인 당교(唐皎)와 함께 좋은 명성이 있었고, 무덕(武德) 연간 초에 [[이건성]]이 [[왕세충]]을 정벌할 때 왕세충을 정벌할 계책을 바쳤다. 이건성은 뒤에 당림을 전서방(典書坊)으로 끌어들였고 우위솔부(右衛率府) 개조참군(鎧曹參軍)으로 제수하였다. 626년, 진왕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 일파를 제거하고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태종(당)|당태종이었다. 당림은 이건성 일파의 인물이었기에 태종에 의해 만천현승(萬泉縣丞)으로 좌천되었다. 만천현승으로 부임할 때 만천현에는 죄가 가벼운 죄수들 수십 명이 갇혀 있었는데 늦봄에 단비가 내리자 당림은 이들을 모두 내보내기를 청하였다. 현령이 당림의 청을 허락하지 않자, 당림은 만약 의심하는 바가 있다면 자신이 죄를 감당하겠다고 나서면서, 현령은 어쩔 수 없이 당림의 청을 받아들였다. 당림은 죄수들을 불러들여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지은 다음에 시일이 다되면 돌아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죄수들은 당림에게 감복하여 과연 시일이 다되자 당림의 약속대로 모두 감옥으로 모여들었고, 당림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당림은 뒤에 시어사로 승진하였고 조정의 명에 따라 영외(嶺外)로 파견되었다. 영외에 이르러 당림은 교주(交州) 자사 이도언(李道彦)을 추궁하면서 이도언에 의해 억울하게 죄를 받은 죄수 3천여 명을 신원하였다. 당림은 뒤에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전임되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당림은 [[고종(당)|고종]]이 즉위하자, 검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郎)이 되었으며, 그 해에 대리경(大理卿)으로 전임되었다. 650년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651년, 화주(華州) 자사인 소영지(蕭齡之)가 이전에 광주(廣州) 도독으로 재임할 때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조정에서 이를 처리하도록 명하자, 당림은 상소를 올려 소영지를 영외로 유배시켰다. 당림은 뒤에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승진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더해졌으며, 뒤에 병부상서(兵部尙書), 탁지상서(度支尙書),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가, 659년에 죄를 받아 조주(潮州)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이윽고 죽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00년 출생]][[분류:65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