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에도 막부/역대 쇼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3400 0%,#003400 30%, #003400 70%, #003400)" {{{#fff '''도쿠가와 이에노부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정1위)] ---- [include(틀:역대 일본 내대신)]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3400 0%,#003400 30%, #003400 70%, #003400)" '''{{{#fff [[에도 막부|{{{#fff 에도 막부 제6대 정이대장군}}}]][br]{{{+1 도쿠가와 이에노부}}}[br]徳川家宣}}}'''}}}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0px-Tokugawa_Ienobu.jpg|width=100%]]}}}|| || '''{{{#fff 생몰년도}}}''' ||<(> [[1662년]] [[6월 11일|06월 11일]] ~ [[1712년]] [[11월 12일]] (50세) || || '''{{{#fff 신체}}}''' ||<(> '''160cm'''[* 156cm는 위패의 키이고, 160cm와 혈액형 O형은 유골 조사의 키와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60cm가 신빙성이 높다.][* 당시 일본인 평균보다도 컸으며, 역대 쇼군 중 유일하게 키가 160cm여서 역대 쇼군 중 키가 가장 컸다.], [[O형]] || || '''{{{#fff 원호}}}''' ||<(> 분쇼인(文昭院) || || '''{{{#fff 재임기간}}}''' ||<(> [[1709년]] ~ [[171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에도 막부]]의 제6대 [[쇼군]]. 코후의 번주 도쿠가와 츠나시게의 아들로, 제5대 쇼군 츠나요시의 조카이자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손자였다. == 생애 == 이에미츠의 3남인 도쿠가와 츠나시게(徳川綱重, 1644 ~ 1678)가 정실이 아닌 [[유모]]의 하녀인 조쇼인(長昌院, 1637 ~ 1664)로부터 얻은 아들로, 츠나시게가 정실을 맞을 즈음이었기 때문에 파혼을 염려한 [[센히메]][* 츠나시게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츠나시게의 유모는 그녀의 시녀이기도 했다. 여기에서의 센히메는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을 말한다.]의 수배로 어린 시절에는 가신 신미 마사노부(新見正信, ? ~ ?)의 아들로서 신미 사콘(新見左近) 살았다가 츠나시게가 다른 아들을 얻지 못하자 9세에 다시 츠나시게의 아들로 정식 인정받았다. 1678년 부친인 츠나시게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코후의 번주가 되었다. 원래는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후계자로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에노부는 정실 소생이 아니었던 탓에 이에츠나의 동생인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제5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가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게 되자 [[1709년]] 48세의 나이로 제6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 치세에 가장 큰 문제였던 동물 애호 법령인 <생류연령>을 즉각 폐지하고, 츠나요시 치세의 실권자였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막부에서 쫓아냈으며 제4대 쇼군 이에츠나의 문치정치를 계승했다. 츠나요시는 죽어가면서 후임인 이에노부에게 >'''"내가 죽더라도 <생류연령>은 계속 유지해달라"''' 고 말했으나, 이에노부는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돌아가신 분의 유지는 받드는 것이 원칙이나, <생류연령>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돼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천하만민을 위해서 <생류연령>을 폐지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법령을 보면, 처벌한다는 법령은 폐지하지만,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계속 유지하라고 했다. 전임 세이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이었던 츠나요시의 <화폐주조령>을 유지하여 재임 2년차([[1710년]])에 '겐로쿠 금•은'을 또 발행하는 실책[*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했다.]을 빼면 그다지 큰 우를 범한 적은 없었다. 쇼군직에 오른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큰 실책을 찾기가 더 어렵지만. 츠나요시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 흔적이 보이는데 사실 <생류연령>과 사찰 및 천황가의 능묘 재건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다 계승했다. 주자학(성리학)을 이용한 명분론이라든가 낮은 계급의 인재들을 뽑아쓰는 것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한 부분이었다. 특히 낮은 계급을 등용한 부분은 도자마 다이묘들을 우대한 츠나요시의 그것을 넘어서 로닌[* 여기에서는 [[추신구라]]의 죄인을 가리키는 낭인이 아니라 다이묘급 가문이 아닌 그에 훨씬 못미치는 계급을 의미한다.]들을 최고 관직에 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 ~ 1725)로 [[주자학]]자를 최고 관직에 두었다는 점과 로닌(낭인) 계급이 최고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했다는 좋은 반증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제대로 먹혀들어가 이때의 치세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아이디어로 상당 부분 효과를 보게 된다. 재정정책으로는 츠나요시가 했던 사업들의 대부분을 접어서 긴축재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겐로쿠]] 금•은'의 실책 이후, [[금]]과 [[은]]의 함량을 초대 쇼군 이에야스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711년]]에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직접 나서서 (조선에서 일개 왕자 따위의 칭호인) [[타이쿤|대군]]이라고 부르지 말고 [[일본국왕]][* 참 아이러니 한 게, 무로마치 막부시절 명나라에게서 일본국왕 칭호를 하사받았는데, 19세기에 국학의 발흥으로 요시미츠는 "외세에 굴종했다" 등의 악평을 받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자신 3대의 목상이 참수되어 길바닥에 효수되었다.]이라고 부를 것을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예우도 상의 없이 간소화시키려고 했으나, 쇼군인 이에노부가 고작 1년 뒤에 죽고 아라이 하쿠세키도 따라 실각하자 [[롤백]]되었다. 허나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통신사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달리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본격적인 무역 통제가 이루어진 시기도 이에노부의 치세하였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총수입 규모를 낮추는 한편, 대금 결재 방식을 금, 은, [[구리]]같은 현금화하기 쉬운 귀금속류 내지는 광물류에서 전복 같은 해산물로 교체하는 방식을 취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처음에는 '''좀 많이''' 당황했으나 네덜란드(서양물품) → [[나가사키]](서양물품 - 해산물) → [[난징]](해산물 - 중국산 차 및 도자기 등) → 네덜란드(중국산 물품 - 서양물품) 무역 루트로 전환하여 이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이때는 전 세계적으로 광물의 생산이 많았기 때문에 광물류로 결재하는 것보다는 해산물을 통해 중국측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무역 루트의 다변화가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감정음미방'''(勘定吟味方)이라는 재정 감찰 기구를 두고 상인들의 부정을 막고자 하는 시도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시도는 좋았으나 선대 츠나요시때 이미 막부의 상인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너무 높았기에 설치는 했으나 성과는 그다지 낸 것이 없었다. 워낙 츠나요시 치세가 빡빡했었던(적어도 서민들에게는 그랬다) 탓에 <생류연령>을 폐지한 것만으로도 서민들의 지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정 개혁을 시도하던 중인 [[1712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는 이에노부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이었다. 당시 이에츠구의 나이는 5세. 상냥한 성격에 학문을 좋아하는 쇼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대 쇼군 츠나요시와는 썩 관계가 좋지는 못했는데 츠나요시의 아들 도쿠마츠가 사망하자 츠나요시에게 후계자로 지명을 받았다고 한다. 재위 4년만에 사망한 탓에 많은 사람들과 당시의 [[나카미카도 덴노]] 및 교토 조정에서는 아쉬워했다고 한다. 더 오래 살았다면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치세를 재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에도 시대]]의 역사서들에는 '''진정한 인자(仁者)'''라고 평가받았다고. 학문을 좋아했고 덕이 있었으며, 나름의 업적을 남겼으나 어린 후계자를 남기고 짧은 치세 끝에 죽었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문종(조선)|문종]]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짧은 그의 재임기는 [[조선]]의 [[숙종(조선)|숙종]] 재위기 후반과 일치하며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 재위기하고 일치하다. [[분류:에도 막부 쇼군]][[분류:1662년 출생]][[분류:1712년 사망]][[분류:정1위]][[분류:다이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