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통치 기구]][[분류:조선의 통치 기구]] [include(틀: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 [목차] == 개요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최고 의결기관이다. 고려 초기 [[도병마사]]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여러 관청의 관원이 참여하는 합의기관이며 국방기관이었다가 정무를 아우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비변사]]와 비교된다. == 연혁 == [[고려시대]]의 도병마사는 원래 재추(宰樞), 즉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밀(樞密)이 모여 [[5도 양계|양계]]의 국방 문제를 다루던 회의로 여기에는 [[삼국시대]]의 [[화백회의]]와 같은 귀족 회의 전통이 나타난다.[* 고려의 전신 [[태봉]]의 [[광평성]]이 '신라의 제도'에 기초했다는 짤막한 기록을 근거로 해서 실제로 [[신라]] 화백회의-태봉 광평성-고려 도평의사사로 계승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신라의 제도'가 화백회의만 있는 게 아니므로 다른 설도 존재한다.] 고려 중기 이후 구휼을 담당하면서 기능이 확대되다가 [[고종(고려)|고종]] 연간(1213 ~ 1259) 말기에 이르러 도당이라 불리며 재추 전원이 참여하여 국정 전반을 다루기 시작했다. [[원 간섭기]] 관제 격하로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僉議府)가 되고 [[중추원|추밀원]]이 밀직사(密直司)로 바뀌자 [[1279년]](충렬왕 5) 도평의사사라는 이름의 관청이 되어 중국에서 [[북송]] 때 [[3성 6부제|중서문하]](中書門下)와 추밀원을 아울러 이부(二府)라고 부른 것처럼 첨의부와 밀직사의 양부합좌(兩府合座)로 운영되었다. 관제 복구 이후에도 [[중서문하성|문하부]], [[삼사(관청)|삼사]], [[밀직사]] 관원이 합좌하는 최고 의결기관으로 남았으며 참여하는 관원의 수가 70명에 달하는 것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에도 문하부, 삼사, 중추원이 합좌하는 형태로 남아있다가 [[1400년]](정종 2) [[의정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여러 관청의 합의기관이라는 성격도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없어지고 재신의 소속이 의정부로 옮겨지면서 사라졌다. 단 도당이란 이름은 여전히 의정부의 별칭으로 계속 쓰였다. == 구성 == 조선 * 판사(判事) 2인(정1품 [[문하시중|문하좌·우시중]]) * 동판사(同判事) 11인(문하부와 삼사의 정2품 이상) * 사(使) 1인(정2품 판중추원사) * 부사(副使) 15인(중추원의 종2품) == 관련 문서 == * [[도병마사]] * [[중서문하성]] * [[중추원]] * [[삼사(관청)]] * [[의정부]] * [[비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