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백제 제24대 국왕[br]{{{+1 東城王 | 동성왕}}}'''}}} || ||<|2> '''출생[br]{{{-3 (음력)}}}''' ||[[465년]] 추정[* 《일본서기》 479년 4월조에 따르면 삼근왕이 사망할 당시 동성왕은 '유년(幼年)'의 나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일찍 잡아도 465년 이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廿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王 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 ||[[백제]] [[위례성]][br](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2> '''사망[br]{{{-3 (음력)}}}''' ||[[501년]] [[12월]] (향년 36세 추정) || ||[[백제]] [[웅진성]][br](현 [[충청남도]] [[공주시]])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24대 국왕}}}''' || ||[[479년]] [[11월]] ~ [[501년]] [[12월]] {{{-2 (23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성씨)|부여(扶餘)]] || || '''휘''' ||모대(牟大)[* 《[[남제서]]》, 《[[양서]]》에서도 모대라 써있다.] · 마모(摩牟)[br]대(大) · 마제(麻帝)[* 《[[삼국유사]]》.][br]말다(末多)[* 《[[일본서기]]》. 훈은 '마타'.][br][[서동요|마동(麻童)]](?) || || '''부왕''' ||좌현왕 [[부여곤지]] || || '''왕후''' ||왕후 김씨[* 신라 [[이찬|이벌찬]] [[비지#s-5|김비지]]의 [[딸]].] || || '''아들''' ||아들, --[[무령왕|부여사마]]--[* 《[[삼국사기]]》의 기록. 이것을 신뢰한다면 무령왕은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과 다름이 확실시되었다.],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상기한 둘은 모두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왜국]]으로 파견된 사신들로 나오는데,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둘의 이름에서 겹치므로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 || '''후손''' ||동성도천(?)[* 마찬가지로 동성(東城)은 동성왕을 뜻한다고 볼 경우.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 || '''종교''' ||[[불교]] || || '''시호''' ||'''동성왕(東城王)''' || || '''별호''' ||모대왕(牟大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include(틀:영상 정렬, url=LlMj8jP8uAw)] [[백제]]의 제24대 [[군주]]([[건길지]]).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 摩牟는 摩帝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마제(麻帝)'[* 帝의 옛 음은 '뎨'. 황뎨 '뎨'. 즉 마뎨, 말다, 모대는 음이 통한다.],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마동(薯童) = 서동(薯童)'으로 [[서동요]]의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신라]]의 [[소지 마립간]]이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 [[선화공주]]처럼 [[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지는 [[진골]] 이상 신분이므로 김씨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이 동성왕과 [[결혼]]해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연계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담력이 컸고 특히 [[궁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생애 ==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로 [[권신]] [[해구(백제)|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진(성씨)|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중국]] 측 사서를 신뢰하여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나이가 적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왜 동성왕이 먼저 [[임금]]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자연스레 해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기록의 대부분은 부여곤지의 아들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설의 [[근거]]는 빈약한 실정이다. 일단 기록대로 부여곤지의 아들이라면 형인 무령왕처럼 [[일본]]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일본서기]]》에서는 479년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유년(幼年)의 나이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최소 10대 즈음에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씨 세력이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왕손]]을 고르다 보니 뽑힌게 바로 동성왕이라는 [[해석]]을 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이로 본다면 형인 [[무령왕|사마]]가 [[왕]]이 되어야 정상이었겠지만 진씨 세력의 입장에서는 [[성인]]인 부여사마는 자기들이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성왕을 옹립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름인 "말다"가 '맏'으로 읽힌다는 점, 무령왕이 [[개로왕]]의 [[후궁]] 소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여곤지에게 [[적자]]는 무령왕이 아닌 동성왕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이 백제로 [[귀국]]할 때 [[츠쿠시]][[국]](지금의 [[후쿠오카]])의 군사 500명으로 [[호위]]시켰다고 한다. 이 츠쿠시국 군사와 파견된 일본의 장수들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와 전투를 하게 된다.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츠쿠시의 아치노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 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 《일본서기》 유랴쿠 23년 (479년) 어쨌거나 진씨 세력이 [[삼근왕]]을 버리고[* 《삼국사기》에는 그냥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정황상 진씨 세력에 의해 시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왕을 뽑은 선택지는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자기들 손으로 자기들을 날려버릴 호랑이를 뽑은 최악의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진씨 세력의 도움을 받아가며 국정을 운영하던 삼근왕을 표면에 내세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상황이 되었다.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온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시켰는데 <백제본기>에는 없고 <신라본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482년 9월에는 말갈이 북쪽에서 침입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南齊)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87년에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반란으로 가야가 혼란 속에 빠지자 이에 개입해 가야 연맹에 대한 세력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마 기록상으로 보았을 때 가야가 백제에 도움을 요청한 듯 보인다. 489년(동성왕 11년) 남도 바닷가의 [[농부]]가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근초고왕]] 대의 경략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인정하는 불완전한 지배에 머물렀던 현재 [[호남]]권 지역의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 때 완벽히 끝나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적 통치로 전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은 백제의 혼란기를 틈타 [[대가야]]가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동성왕 이전의 백제는 너무 정신없는 혼란기여서 이때까지는 가야의 백제 변방 침범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듯하고 가야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이어졌다. 이 지역을 백제가 되찾으려는 시도는 이후 무령왕 대부터 본격화되어 끝내 대가야를 몰아내고 [[전라도]] 전체에 관한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다.] 현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동성왕이 파견한 왜국계 지방관의 묘라는 것이다. 493년(동성왕 15년)에는 당시 신라의 군주였던 [[소지 마립간]]에게 권유해서 [[정략결혼|혼인을 청하니]] [[이찬#s-1|이찬]] [[비지#s-5|비지]]의 [[딸#s-1|딸]]을 백제로 [[시집#s-1|시집]]을 보내기도 했고,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동성왕 17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했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무력에 의한 정벌을 중지한 후 탐라국을 [[속국]]화했다. 지리적으로 봐도 [[충청도]] 쪽이 중심인 백제는 [[전라도]]를 장악해야 [[제주도]]와 접하기 때문에 탐라국을 정벌하려 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도 위에서 나온 대로 호남권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미 거의 완료되었다는 정황 증거 중 하나다. 국방에도 힘을 쏟아서 반란의 이유로 언급되는 잦은 [[사냥]]이라는 것도 사실은 군사 [[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런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군사력을 회복하여 한때 [[한강]] 이남 저 남쪽까지 밀려났던 백제가 대략 이 시기부터 다시 한강 근처까지 진출해 고구려와의 한강 유역 쟁탈전이 벌어졌다.[* 애초에 문주왕 때에도 한강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동성왕 이전 백제 사정을 고려하면 물러났느냐를 떠나서 관리할 여력 자체가 부족했다.] 다만, [[나제동맹]]은 사서에 명확하게 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왕 재위 후반부에는 조금 흔들리는 듯한 정황이 보인다.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반란 때 엮여서 백제와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반파국]](대가야)과 신라가 친해지는 듯한 사건이 나오고, 어느 순간부터 고구려가 쳐들어오면 서로 지원군을 보내주던 게 끊겼으며, 501년에는 신라가 만에 하나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탄현]]에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뒤로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 전투]] 전까지는 직접 싸우지는 않아서 신라의 한강 병합으로 나제동맹이 확실히 깨지는 정설은 50년쯤 뒤인 554년이지만, 동성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나제동맹의 끈끈함은 전보다는 확실히 약해지는 듯 한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백제와 신라의 사이는 옛날부터 안 좋았으니 [[장수왕]]이라는 공공의 강적이 없어지고 나서는 살짝 멀어지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공주시|웅진]] [[천도]] 이후 [[막장]]을 향해 달리던 백제를 다시 어느 정도 추스려서 무령왕 시기 [[중흥]]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중흥군주로써의 [[평판#s-1|평판]]은 들을 만 하다.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고, 본 [[궤도]]에 올려놓는 등 뛰어난 [[업적]]들을 남기며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문제는 동성왕이 말년에 가면 ~~군기가 빠져~~ 긴장이 풀렸는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했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499년(동성왕 21년), [[한산]] 지역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려 결국 [[아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 과정에서 2,000여 명의 백성들이 적국인 고구려로 도망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까지도 무시해버리고 500년(동성왕 22년) 봄, 도리어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동물들을 키우는 정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조차 듣기 귀찮아 해서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았다. 결국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비 [[서원]]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그 동안 왕의 [[정책]]에 반발함과 동시에 임금에 의해 가림성으로 좌천된 것에 원한을 품은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동성왕은 반란 소식을 듣고 궁궐로 돌아가려는데, 이때 백가가 휘하 군대로 왕의 사냥단을 습격했고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 부랴부랴 도망치다가 백가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다만 《삼국사기》를 보면 동성왕의 승하 기사가 동성왕 23년 11월 조에 있지만 본문에 '''12월에 이르러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백가가 보낸 자객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바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중태에 빠진 뒤 얼마간 있다가 완전히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말다왕이 포학무도하므로 국인([[귀족]])이 제거했다"라는 《[[백제신찬]]》의 기록을 인용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백제)|성왕]] 시기에 [[부여군|사비]]로 천도할 때 준비 기간이 짧았다라고 추정되기도 하는데 이는 동성왕 시기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동성왕이 죽기 직전에 사비 서원에 간 것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었다라는 의견이 꽤 있는 편이다.] [[시호]](諡號)는 동성왕(東城王)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들로 무령왕이 된 부여사마가 있다고 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이 오기였음이 확실시되었다. == [[미스터리 관련 정보|미스터리]] == === [[북위]]와의 전투 ===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탁발선비]]족의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세 내용은 항목 참조.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벡제-북위 전쟁)] === 최후에 대한 의혹 === 동성왕은 재위 말년에 접어들면서 의도적으로 신진 세력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되었던 [[부여(성씨)|부여씨]] [[왕권강화|왕권을 다시금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한성]]에서 함께 내려온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공주시|웅진]] 출신의 신진 세력을 중용한 것이다. 문제는 동성왕 시해를 사주한 [[백가]]가 구 귀족 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백씨 가문의 백가는 웅진 출신의 신 세력이었고, 동시에 동성왕이 직접 위사좌평에 임명한 인물이었다. 위사좌평은 오늘날 [[대통령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가는 동성왕의 최측근이라고 봐도 좋을 인물이었다.[* 당연하지만 상식적으로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심복을 경호실장에 임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백가를 새로 신축한 [[부여 가림성|가림성]][*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성흥산성]].]의 성주로 임명했다. 백가는 이에 불만이 있었는지 병을 핑계로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으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불만을 품고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백가는 가림성으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동성왕의 형인 [[무령왕]]이 보낸 토벌군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하더니 그대로 [[처형]]당했다. [[10.26 사태|동성왕의 죽음과 뒤를 이은 백가의 황당한 반란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왕의 최측근이던 백가가 왕을 암살하고 저항도 하지 않은채 항복했다가 처형되었다는 점은 백가가 뭔가]] [[음모론|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토사구팽|무령왕이 배후에서 백가를 조종하고 백가를 팽했다는 학설이 그것.]] 백가 혼자서 동성왕을 암살했다기보다는 백가의 뒤에 배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누가 배후였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동성왕의 치세기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하지 않고 《삼국사기》의 [[제주도|탐라]]와 전라도 강진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으로 팽창정책[* 마한계 귀족 세력들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의 세력이 강해졌다는 추정이다.]을 한 것에 대비되게 후임자인 무령왕은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점에 착안해서 [[한강]] 일대에 경제권을 소유한 [[호족]][*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세력들이 동성왕의 영토 팽창정책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가설도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 치세기에 기록된 남산에서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에서 호랑이 두 마리는 각각 무령왕과 동성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게 아니냐는 학설도 있다. == 평가 == 전대의 [[삼근왕]]과는 대조적으로 전제군주라 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고집있는 [[왕권강화]] 정책을 펼쳤다. 진씨 세력의 추대로 옹립된 왕이다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권 강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권세를 휘두르는 진씨[* 대성팔족중 상당수는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며 4-5세기 무렵부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적에 있는 남래(南來)귀족 세력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또한 대성팔족으로 이들은 온조의 십제 시절부터 온조와 동행한 세력으로 추정하며 한강일대의 경제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파악된다.]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금강]] 유역권을 지배 기반으로 삼았던 신진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권력의 전면부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으로 사씨, 연씨, 백씨 등 [[대성팔족]]이 있다. [[웅진]] 천도 이후 바닥까지 추락했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과 국제적 위치를 정상 궤도에 안착시켜 백제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개로왕]] 이후 끊겨버린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되살렸고 [[신라]]의 [[소지 마립간]]에게 [[혼인]] 동맹을 제의하여 [[이찬]] 비지의 딸과 동성왕이 혼인하게 됨에 따라[* 비록 신라왕의 친딸인 고귀한 [[공주]]의 신분은 아니지만 이찬이라는 높은 신라 관등을 감안하면 비지 역시 신라 왕과 아주 밀접한 고위 종친일 가능성이 높다. 동성왕이나 소지 마립간에게 결혼 적령기의 딸이 없었기 때문에 종친의 딸을 대신 시집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런 사례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자주 있었다.] [[나제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말년에는 [[대신]]의 간언을 무시하며 성곽, 궁실, 정원 등을 과도하게 증축하고 향락에 빠지며 사냥에 지나칠 정도로 빠지는 등 과도한 왕권 강화 및 과시를 하며 백성에 대한 구제를 외면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 원인이 되었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95&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동성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동성왕이 즉위하다 四年春一月 [[진로(백제)|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五年夏四月 웅진 북쪽에서 [[신록|신성한 사슴]]을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남제에 사절을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七年夏五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八年春二月 [[백가]]를 위사 좌평에 임명하다 八年春三月 사절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다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年 '''[[북위|위]]가 [[백제-북위 전쟁|침입하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十一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十一年冬十一月 남당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다 十二年秋七月 사현성과 이산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연돌]]을 달솔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三年夏六月 웅천의 물이 불어 민가가 피해를 입다 十三年秋七月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四年冬十月 우명곡에서 사냥하다 十五年春三月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다[* 신라 측 기록과 관등이 다른데, 딸의 출자가 명확하게 기록된 것을 보아 신라 측 기록을 우선시한다. 따라서 비지의 관등은 [[이찬]]. 참고로 이 사건은 백제 측에서 그 유명한 [[서동요]]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해당 문서 참조.] 十六年秋七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다 十七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신라군이 구원하여 고구려가 물러나다 十九年夏五月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九年夏六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다 二十年 웅진교를 가설하다 二十年秋七月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를 보내 지키게 하다 二十年秋八月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국|탐라]]의 사죄를 받다 二十一年 백성이 굶주려 고구려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二十一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二十二年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夏五月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다 二十三年春一月 서울에서 [[노구화호|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다 二十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치다 二十三年夏五月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二十三年秋七月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다 二十三年秋八月 가림성을 축조하여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三年冬十一月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이다 '''기록이 상당히 많다. 재위 기간으로 비교하면 [[의자왕]]보다도 많을 정도. 백제에서 [[온조왕]], [[무왕(백제)|무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군주다.''' == 기타 == * 동성왕의 후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동성(東城)씨'''를 자처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성왕(백제)|성왕]] 시기 활동한 동성자막고, 동성자언, 동성도천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동성씨가 자신들의 조상을 밝히지 않은 점과 일시적으로만 나타나고 사라졌던 점 때문에 아닐 가능성도 있다.[* 참조문헌: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 *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일본 태생이거나 장기 체류한 것으로 보인다. 추정지는 [[후쿠오카]]이다. * 동맹국이자 같이 고구려군을 막아왔던 신라의 소지 마립간과 즉위한 해가 479년으로 같다. == 대중매체에서의 동성왕 == * 일대기를 다룬 [[소설]]로 《백제의 칼》이 있다. * 2013년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는 배우 [[정찬]]이 연기했다. == 같이보기 == * [[백제/왕사]] * [[백제-북위 전쟁]] * [[요서경략설]] [각주] [[분류:501년 사망]][[분류:백제 국왕]][[분류:불교도 군주]][[분류:폐위된 군주]] [include(틀:포크됨2, title=동성왕, d=2022-07-05 20:1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