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등장인물, rd1=은광의 타고르)] [include(틀: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include(틀:위대한 벵골인)] ||<-3> '''{{{+2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br] '''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 [[벵골어]]식 발음은 로빈드로나트 타쿠르] | Rabindranath Tagore'''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abindranath Tagore.jpg|width=100%]]}}} || ||<-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width=30]]''' [[노벨문학상|{{{#white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2> '''출생''' ||<-2>[[1861년]] [[5월 7일]] || ||<-2>[[서벵골]] 주 [[콜카타]] || ||<|2> '''사망''' ||<-2>[[1941년]] [[8월 7일]] (향년 80세) || ||<-2>[[서벵골]] 주 [[콜카타]] || || '''국적''' ||<-2>[include(틀:국기, 국명=인도 제국)] || || '''신장''' ||<-2>[[https://www.topbiography.xyz/2021/04/Rabindranath%20Tagore-wiki-biography.html|175cm]] || || '''학력''' ||<-2>[[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2 (법학 / 명예 학사)}}}[br]캘커타대학교 {{{-2 (벵골 문학 / 명예 학사)}}}[br]캘커타대학교 {{{-2 (철학 / 명예 박사)}}}|| || '''직업''' ||<-2>[[시인(문학)|시인]],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화가]], [[철학자]], [[작곡가]], [[작사가]], 교육자 || || '''종교''' ||<-2>[[힌두교]] || || '''서명''' ||<-2>{{{#!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Rabindranath Tagore Signature.pn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인도]]의 [[시인(문학)|시인]]. == 생애 ==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벵골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https://en.wikipedia.org/wiki/Debendranath_Tagore?wprov=sfla1|데벤드라나트 타고르]](দে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17~1905)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মহর্ষি,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까지 얻은 인물이었다. [[영국]]의 명문 대학이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간디]]가 졸업한 [[런던 대학교 그룹]] 소속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을 전공했으나 중퇴하였다.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8살 때부터 [[벵골어]]로 시를 썼고 16세에는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시집 《기탄잘리》(গীতাঞ্জলি, 신께 바치는 노래)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기록이다. 이는 직접 수상한 노벨 문학상 부문을 기준으로도 마찬가지. == 한국과의 관계 ==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시, 《동방의 등불》을 남겼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해준 짧은 시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402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4-02&officeId=00020&pageNo=2&printNo=3094&publishType=00020|기사]] 다음날 동아일보는 타고르가 써줬던 영어 원문도 실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 > 1929년 4월 3일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4030020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4-03&officeId=00020&pageNo=2&printNo=3095&publishType=00020|기사]] 이보다 더 긴 버전으로 돌아다니는 시는 누군가가 타고르의 다른 작품인 '기탄잘리 35'의 글귀를 짜깁기해 이어붙이고 마지막엔 출처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라는 문구가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6437|#]] 타고르의 또 다른 작품인《패자(敗者)의 노래》는 [[최남선]]의 요청에 따라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에 타고르 자신이 [[번역]]해 [[http://dongne.donga.com/2009/12/21/d-story-32-%ED%83%80%EA%B3%A0%EB%A5%B4%EC%9D%98-%EC%8B%9C%EC%99%80-%EA%B4%80%EB%A0%A8%EB%90%9C-%EC%98%A4%ED%95%B4%EB%93%A4/|미국에서 발간한 시집인 '채과집(Fruit-Gathering)'에 실린 것을 그냥 보낸 것]]이다. 최남선이 이를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쓴 창작물로 오해'''한 것. 거기다 문구도 원문과 비교하면 [[오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 위의 시들로 인해 한국을 우대한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된 [[자포네스크]]적 기질의 인물로 '일본은 시심을 자아내는 나라'라든지 '일본은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이 해 뜨는 나라에 감사한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일본을 5차례 방문하고 [[러일전쟁]]에 일본을 숭상하는 시를 써 기고하기도 했으며 군국주의를 밀어주던 일본 우익의 거물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C%95%BC%EB%A7%88_%EB%AF%B8%EC%93%B0%EB%A3%A8?wprov=sfla1|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마 일본의 힘이 커졌으니 일본이 (인도를 포함한) 대다수 국가들이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있는 아시아의 주권을 위해 서양 열강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아시아주의]]) [[수카르노]]나 [[찬드라 보스]]처럼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이전까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제법 많았었다. 한일병탄 이전에 쓰여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도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이승만]]도 1903, 1904년 정도까지만 해도 일본을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으며 일본에 우호적인 모습도 일부 있었으나, 일본이 스스로 서양 열강과 다름없이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자 강경한 반일로 돌아선다.] 다만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이 나라(일본)는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라고 하거나, "일본이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일본이 인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그 기원이 꽤 오래되었다. 이미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복한 다음에 중국 명나라도 점령하고 그 다음으로 인도에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1882년 12월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는 글을 남겼는데[[http://cafe.daum.net/historywar/Nwp/2490|출처]], 이는 중국과 인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굶주린 그들은 지금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고 있다"라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오히려 일본은 정신 면에 많이 낙후되었다고 비판하여 극우 일본인들에게 크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가 중시한 건 바로 마음과 정신이었다. 어쨌든 타고르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참 관심없는 국가였다. 하지만 그 시절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방탄소년단]]이 서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잘 알지도 못하는 약소국에서 팬이라고 계속 연락해오니 그 나라의 팬들을 위해 짧은 영상 하나 만들어 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 나라의 팬들에게는 매우 대단하게 생각되는 일이었을 것이니,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고 왜 그 시절에 타고르 열풍이 일었는지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최인훈]]의 소설 [[광장(소설)|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그토록 찾던 중립국으로 가는 배 이름인 '타고르 호'로 언급된다. == 기타 == * 타고르의 고향은 지금의 인도 영토인 서벵골 [[콜카타]]이고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인]]들에게 타고르는 독립영웅인 봉고본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다음가는 국가의 상징이다. 사실 종교만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다를 뿐 타고르도 [[벵골인]]이고, 그가 [[벵골어]]로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기 때문. 그리고 타고르는 가문이 소유한 토지를 관리하는 일로 10여년간 현재의 방글라데시 쿨나 주에서 살았었다. 여기서도 작품을 상당히 많이 썼는데, 타고르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안겨 준 기탄잘리가 이곳에서 쓴 작품이다. 방글라데시인들에게 타고르는 벵골의 자존심이자 벵골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문호기 때문에 그가 서벵골 콜카타 사람이란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방글라데시인의 자랑을 넘어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파키스탄]]의 벵골어 탄압정책에 따라 1967년 타고르의 작품을 국영 언론에서 다루는걸 금지한 것이다. 비록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함께하진 않았지만 방글라데시인의 정신세계를 만든 중요한 인물이라, 타고르가 죽고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독립국가로 독립한 지 35년이나 지난 [[1976년]]에 방글라데시에서 타고르에게 명예 시민권을 추서하기도 했고, 타고르 박물관 8곳 중 5곳이 방글라데시에 있을 정도이다. * 노벨문학상을 받은 공적으로 영국으로부터 191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800077&cid=43082&categoryId=43082|암리차르 학살사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 대표작 기탄잘리에 수록된 시 중 "생명의 흐름(Stream of Life)"은 [[맷 하딩]]의 영상에 쓰인 Praan의 가사로 사용되었다. * [[인도]]의 국가(國歌)인 [[자나 가나 마나]], [[방글라데시]]의 국가인 [[나의 황금빛 벵골|아마르 쇼나르 방라]]는 그의 작품이다. '자나 가나 마나'는 작사뿐만 아니라 직접 작곡까지 했고, 아마르 쇼나르 방라는 타고르의 작사에 벵골 지역의 가요 그를 어디서 만나야 합니까(কোথায় পাবো তারে ; Ami Kothay Pabo Tare)를 붙인 것이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마하트마"는 타고르가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이 있다. * 2003년 3월 바라티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메달과 시계 등 일부 유품이 도난당했다. 경찰이 현상금까지 걸며 4년 넘게 수사했지만 결국 물건도 범인도 찾지 못한채 2007년 수사를 종결지었다. 한편 스웨덴 노벨재단은 2004년에 메달 복제품을 만들어 인도 정부에 전달했다. [각주] [[분류:인도의 시인]][[분류:인도의 소설가]][[분류:노벨문학상 수상자]][[분류:1861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콜카타 출신 인물]][[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