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도어즈)] ||<-2><#000> '''{{{+1 레이 만자렉}}}[br]Ray Manzarek'''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레이 만자렉.jpg|width=100%]]}}}|| || '''본명''' ||레이몬드 대니얼 맨저렉 주니어[br]{{{-1 Raymond Daniel Manzarek Jr.}}} || ||<|2> '''출생''' ||[[1939년]] [[2월 12일]] ||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2> '''사망''' ||[[2013년]] [[5월 20일]] {{{-1 (향년 74세)}}} || ||[[독일]] [[바이에른]] 로젠하임 || || '''직업''' ||[[음악가]], [[프로듀서]], [[영화 감독]] || || '''소속''' ||[[도어즈]] ^^(1965 – 1973)^^ || || '''가족''' ||^^'''아내'''^^ 도로시 아이코 후지카와[br]자녀 1명 || || '''학력''' ||[[드폴 대학교]] ,,(경제학 / 학사),,[br][[UCLA]] ,,(영상영화학[* 입학 당시에는 법학도였으나 적성이 안맞아 전과했다.] / M.F.A),, || || '''장르''' ||[[사이키델릭 록]], [[재즈 퓨전]] || || '''활동 기간''' ||[[1959년|1959년 –]] [[2013년]] || || '''사용 악기''' ||[[키보디스트|키보드]], [[베이시스트|베이스 피아노]], [[보컬리스트|보컬]] || || '''레이블''' ||엘렉트라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짐 모리슨 레이 만자렉.jpg|width=100%]]}}}|| || {{{#FFE260 '''▲ 나란히 앉아있는 짐 모리슨과 레이 만자렉의 모습.'''}}} || 미국의 음악가. 유명한 [[사이키델릭 록]] 밴드인 [[도어즈]]의 창립 멤버로 유명하다. == 생애 == === 도어즈 이전 === 1939년[* [[짐 모리슨]]보다 4살 많다.] 시카고에서 노동자 계급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의 음악 학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고 드폴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UCLA 법과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2주 후 학교를 중퇴하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웨스트우드 지점에서 수습 관리직으로 일했다. 석 달 동안 이 일을 하고 UCLA로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영화예술학부의 대학원생으로서였다. 이런 불안정한 학창 생활은 1961년 12월 레이가 육군에 입대하면서 끝났다. 그의 보직은 오키나와와 태국[* 그가 마리화나에 심취했던 곳이다.]에서 3군 밴드에 몸담고 피아노 연주를 하는 쉬운 일이었지만, 그만두고 싶었던 레이는 부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1년 일찍 제대하여 짐이 이 학교에 온 바로 그 시기에 UCLA 영화 학교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UCLA에서 레이는 특출하게 우수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전적이었고, 모두가 그의 일본계 미국인 여자친구 도로시 후지카와의 관능성을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그중 하나인 상록수라는 작품에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에게 느린 동작으로 달려가는 반복되는 컷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한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와 도로시가 샤워실에서 발거벗은 채 만난다. 교수들은 그 장면을 편집하기를 원했고, 그는 동의했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이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비판하자, 합의를 번복하고 왜 이 영화가 상영되지 않았는지를 해명한 전단지를 12월의 학생 시사회에서 배포했다(결국 그 영화와 레이가 만든 다른 모든 작품은 상영되어 찬사를 받게 된다). 6월에 그가 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학장인 콜린 영은 레이가 그해 장편 영화로 넘어갈 준비가 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뉴스위크]]에서도 레이의 초기 성과를 인정했다. === 도어즈 === 레이는 대학교에서 [[짐 모리슨]]을 만나, 영화 취향을 공유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어느날 레이 만자렉은 짐 모리슨의 엄청난 작사 실력을 보고 즉석에서 밴드를 결성하자고 했으며, 이 밴드가 [[도어즈]]가 되었다. 도어즈는 무수한 히트곡을 썼고 1968년에는 앨범 [[Waiting for the Sun]]이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밟으며 미국 출신 록밴드로는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짐 모리슨은 마약 중독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갔고, 1971년 파리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실제 사인은 불명.] 짐 모리슨이 죽은 이후, 레이는 밴드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Other Voices]], [[Full Circle]] 등 두장의 앨범을 발매했으나, 평가는 형편 없었고 대중들에게도 외면받으며 망했다. === 도어즈 해체 이후 === 이후 그는 [[이기 팝]] 등 후배와 합동 공연도 가지는 등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했고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미국의 펑크 록 밴드 X의 명반 "Los Angeles"를 프로듀싱했고 이후 4집까지 프로듀싱했다. 2002년에는 젊었을때 밴드를 같이 했던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와 함께 만자렉-크리거라는 듀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20일,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독일 로젠하임에서 숨을 거두었다. == 음악적 유산 == 보통 사람들은 [[도어즈]]에서 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으로 불리는 [[짐 모리슨]]을 주로 기억하지만, 레이 만자렉은 역대 손꼽히는 키보드 연주를 보여줬고 1960년대 말엽 사이키델릭 록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 도어즈 멤버들의 연주 실력은 전부 수준급이다.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는 이 둘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평가가 매우 높고,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도 [[다임백 대럴]], [[알렉스 라이프슨]]보다 높은 76위에 랭크되어있다.] 이 분야에서 [[릭 라이트]], 릭 웨이크만, [[키스 에머슨]]등과 같은 레전드급 프로그레시브 아티스트들과 함께 '''다섯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다. 그의 키보드 연주는 신디사이저 연주의 교본이라고 불린다. Touch Me, [[Light My Fire]] 등 도어즈의 인상적인 키보드 인트로는 모두 이 사람이 연주했다.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도 [[잭 블랙]]이 록 음악 신디 연주법을 배우라면서 [[도어즈]]의 키보드 악보를 빌려줄 정도다. 레이는 키보디스트였지만 동시에 밴드의 베이시스트 포지션이기도 했다. 보통의 베이시스트들이 대체로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를 잡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 때문에 도어즈 특유의 뽕끼도는 사운드가 더욱 극화되는 점도 있다. 해체 후로도 LA 음악씬에서 영향을 발휘했는데, 후배 펑크록 밴드인 X 전담 프로듀서로 활약하면서 [[펑크 록]]에도 어느정도 족적을 남겼다. == 여담 == * 그는 도로시 아이코 후지카와라는 여성과 1967년 결혼해, 1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일본계 미국인이다. 보통의 락스타들이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던것과 달리 레이 만자렉과 도로시 후지카와 부부는 평생을 함께한 록 음악계에서 보기 힘든 잉꼬부부 사이다. 그녀는 레이의 UCLA 영화학과 동창생이며 레이가 음악 활동을 하며 영화에서 멀어졌지만, 도로시 후지카와는 영화 감독으로 활동했다. * 손가락이 정말 길다. [[분류:도어즈]][[분류:미국의 키보디스트]][[분류:미국의 보컬리스트]][[분류:미국의 베이시스트]][[분류:미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1939년 출생]][[분류:시카고 출신 인물]][[분류:2013년 사망]][[분류:미국의 객사한 인물]][[분류: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분류:폴란드계 미국인]][[분류:드폴 대학교 출신]][[분류:UCLA 대학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