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RS[br]{{{+1 로버트 훅}}}[br]Robert Hook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3_Portrait_of_Robert_Hooke.jpg|width=100%]]}}} || ||<-2> 그를 그린 '''상상화'''[* 현재 로버트 훅의 초상화로 특정된 그림은 없고 왕립학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로버트 훅이 초상화를 남겼는지가 의문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내용 참조.] || ||<|2> '''출생''' ||1635년 7월 18일|| ||[[잉글랜드]] [[와이트 섬]] 프레시워터|| ||<|2> '''사망''' ||1703년 3월 3일 (향년 67세)|| ||[[잉글랜드]] [[런던]]|| || '''직업''' ||화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워덤 칼리지|| || '''종교''' ||[[기독교]]|| || '''서명''' ||[[파일:Robert_Hooke_Signature.png|width=175&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잉글랜드]]의 [[화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세포]](cell)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현대의 현미경학의 기본격인 《마이크로그라피아》를 1665년 저술하기도 하였다.[* Project Gutenberg books, Micrographia by Robert Hooke 1665 [[https://www.gutenberg.org/ebooks/15491]]] == 생애 == 1635년 7월 18일 잉글랜드 [[와이트 섬]] 프레시워터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훅이 어릴 때 사망하였고,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교장인 리처드 버스비가 훅을 데려가 교육을 받게 하였다. 1653년 훅은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졸업하였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이후 윌리스의 화학 실험 조수 일을 했다가 [[로버트 보일]]의 배기펌프 실험 조수가 되어, [[보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도왔다. 1658년에는 공기 펌프와 [[태엽시계]]를 만들었으며 판 풍속계를 제작하였다. 1662년 [[런던]]에 왕립협회가 설립되자 실험 [[큐레이터]]를 맡게 되었고, 1663년에는 왕립협회에서 실험 관리자 일을 하였다. 1665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기하학]]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현미경]]을 만들어 [[코르크]]를 관찰하면서 [[세포]]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마이크로그래피아(Micrographia)》를 출판하였다. 1674년에 [[연주시차]]와 관련해서 지구의 운동을 분석하여 인력에 관한 역제곱의 법칙을 연구하였다. 이는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에 대한 수리(數理)적 전개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훅과 [[아이작 뉴턴]]은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1678년에는 탄성체와 응력이 비례한다는 내용의 [[후크 법칙]]을 발견하였다. 1703년 3월 3일 사망하였다. == 업적 == * [[보일 법칙]]을 발견한 [[로버트 보일]]의 제자로 일하였다. 당시 제자였던 그는 진공펌프 제작에 관여, 보일 법칙을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1665년에는 [[세포]]를 처음 관찰하였다. 그가 관찰한 세포는 사실 코르크의 세포벽을 관찰한 것이다. 훅은 이 구조를 '작은 방'을 의미하는 라틴어 "cellulae"에 비유했고, 여기서 세포를 뜻하는 "cell"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다. * 그레고리안 [[망원경]]으로 [[화성]]과 [[금성]]을 관찰하기도 했고 [[목성]]의 대적점 역시 훅이 발견했다. * 그는 또한 당대의 아주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의 수가 적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런 채프먼은 훅을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 물리학 === ==== 광학 ==== 로버트 훅은 공교롭게도 '뉴턴의 고리'라는 것을 발견해낸 사람이다. 훅은 얇은 물질막이 만들어내는 색의 패턴들의 성질을 연구하였고, 그런 현상은 두 개의 층에서 반사된 빛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섭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훅은 두 장의 유리판을 약간의 각도를 유지하여 접근시키면서 빛이 색을 띤 둥근 고리 모양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은 '''뉴턴의 고리'''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뉴턴이 역사 다시 쓰기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빛에 대한 훅의 관점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하위헌스]]의 압축파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 진동하는 파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훅은 [[르네 데카르트]], 하위헌스와 같이 물체 내 입자들의 연속적인 진동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는 개념을 기초로 빛의 굴절을 해석하였고, 그 결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다. ==== [[후크 법칙|훅의 법칙]]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후크 법칙)] === 현미경학 === * 현미경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 현미경학의 기본 서적인 《마이크로그로피아》의 저자이다. * 복합 현미경을 설계하였고, 그의 제자인 크리스토퍼 콕이 완성하였다. === 천문학 === 로버트 훅은 다른 학문보다도 천문학에 더욱 매달렸고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망원경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행성]]에 대해 연구를 해 1655년 [[목성]]의 대적점[* [[목성]]의 표면에 있는 거대한 폭풍. 보통 목성을 생각하면 황색 줄무늬에 타원형 소용돌이 하나가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그 타원형 소용돌이가 대적점이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역제곱법칙도 발견하였다. === 화학 === * 연소와 호흡에 관해 '연소설'을 주장하여 열의 [[플로지스톤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 어렸을 때부터 몸이 상당히 약했고 등이 굽은 꼽추였다는 기록도 전해지는데, 훅의 이 장애는 [[결핵]]균이 [[척추]]에 침입해 발생하는 포트병(Pott disease)의 영향을 받은 후천적 장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가 되고 나서 하루에 3~4시간만 자며 실험에 몰두했다고 한다. == 기타 == [[파일:훅이 그린 파리.jpg|width=50%]] 로버트 훅이 직접 그린 [[파리(곤충)|파리]] 그림이다. 그는 실제로 미술에도 재능이 많았고 화가가 꿈이었다고.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화가를 포기하고 학자가 되었다. === 뉴턴과의 악연 === 중력의 존재를 처음으로 수식화해낸 것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은 1666년에 광학 실험을 시작했다는 문장에서, 그가 빛에 대한 관심을 마이크로그라피아를 통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뉴턴은 훅의 연구성과를 본격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훅 씨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어딘가에서 두 개의 쐐기 같은 투명한 용기를 만들었다고 보고했던 예기치 않은 실험"이라는 식으로 참고 사실만 표현하고, 그 저작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훅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뉴턴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에게 항상 그 불만을 표출했다. 이런 예화는 이것 뿐만은 아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했을 때, 훅은 중력의 법칙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선행연구(실제로 훅은 뉴턴보다 역제곱 법칙을 더 먼저 주장하였다.)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사실에 대하여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 사라진 초상화? === 위의 상상화에서 알 수 있듯이, 훅의 초상화가 없는데 이는 뉴턴이 [[왕립학회]]장 재임 당시 왕립학회가 크레인 코트로 이주하면서 로버트 훅의 유일했던 초상화가 사라졌고, 또한, 이때 로버트 훅의 친필 원고와 논문이 사라졌는데 이것이 뉴턴이 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저있다. 하지만, [[https://royalsociety.org/blog/2010/12/hooke-newton-and-the-missing-portrait/|왕립학회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훅 초상화가 실제로 존재했는지가 논란이라고 한다. 요약하면 훅의 초상화에 관한 기록은 훅 본인의 일기와 1710년에 왕립학회를 방문한 독일인의 기록 단 두 가지이라고 한다. 우선 훅 본인의 일기[*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훅의 기록이 잘 남아있다.]에 단 한줄 그것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형태로 나온다. 훅은 평소에 본인의 기록과 업적 관리에 상당한 신경을 썼었고 사후 이를 잘 정리한 사람들의 기록에서 초상화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한다. 또한, 1710년에 방문한 독일인의 경우에는 당시 왕립학회에 걸려있었던 테오도르 학[* Theodore Haak, 왕립학회회원으로 왕립학회에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있다.]의 초상화를 보고 이때 테오도르 학이 로버트 훅에 비해서 덜 유명했던 관계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1702년에 훅을 아주 잘 알던 사람[* 스코틀랜드에 살았던 외과의사인 James Yonge으로 왕립학회에 가입할 당시 훅의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이 왕립학회를 방문해서 왕립학회회원이 될 때 회의실에 있던 초상화를 언급한 기록에서 평소에 친했던 훅의 초상화에 관한 내용은 없고 오히려 테오도르 학의 초상화는 언급했다고 한다.[* 왕립학회는 훅의 초상화에 새로운 사실을 알고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하고 있다.] === 여담 === [[학자]]로서 빼어난 업적을 남긴 사실과는 별개로 외골수적이고, 불평, 질투심이 심한 성격으로 인해 인간관계는 엉망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의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에 67세까지 장수한것을 보면 그래도 건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리학]]도가 아닌이상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훅을 잘 모르고 있는데, 동시대에 과학혁명의 주도자였던 [[아이작 뉴턴]]이 워낙에 빼어났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분류:영국의 물리학자]][[분류:영국의 화학자]][[분류:영국의 천문학자]][[분류:1635년 출생]][[분류:170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