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로이 뷰캐넌}}}[br]Roy Buchana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ROY_BUCHANAN_photo_by_Seymour_W._Duncan.jpg|width=100%]]}}} || || '''본명''' ||르로이 뷰캐넌[br]Leroy Buchanan|| ||<|2> '''출생''' ||[[1939년]] [[9월 23일]]|| ||[[미국]] [[아칸소 주]] 오자크|| ||<|2> '''사망''' ||[[1988년]] [[8월 14일]] (향년 48세)||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이발사|| || '''장르''' ||[[블루스]], [[블루스 록]], 일렉트릭 블루스, [[로큰롤]], [[로커빌리]], [[컨트리 뮤직|컨트리]], [[재즈]]|| || '''활동''' ||[[1955년]] ~ [[1988년]]|| [목차] [clearfix] == 개요 ==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 >로이 뷰캐넌 [[1960년대|1960]]~[[80년대]]의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가장 위대한 무명의 [[백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설적인 [[블루스]] 명연 [[The Messiah Will Come Again]] 의 주인공이고 숨겨진 명반 《You're Not Alone》의 〈Fly.. Night Bird〉 같은 소름 돋는 연주를 위시하며 많은 명곡을 남겼다. == 생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ROY_BUCHANAN_1957.jpg|width=250]]}}} || || [[1957년]]의 로이 뷰캐넌 || 로이 뷰캐넌은 [[1939년]] [[9월 23일]] [[아칸소주]] 오자크에서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약 세 살때 [[아칸소 주]]를 떠난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고 로이는 이 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5살 때부터 [[가스펠]]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는 자식들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부모님의 노력으로 9살 때 본격적인 기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3년이라는 기간동안 그를 가르쳤던 기타 교사 클라라 프레셔는 그가 3년이라는 레슨 기간동안 악보를 읽는 방법을 전혀 습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이는 이때부터 악보보다는 귀로 듣고 곡을 연주하는 자신만의 곡 습득법을 깨달았고, 클라라는 이런 로이에게 '''"감정적으로 연주하지 않을 거라면, 연주하지 말라."'''라는 조언을 해준다. 로이는 14살 때엔 이미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며 [[재즈]] [[기타리스트]]들과 교류하는 수준에까지 와 있었으며 얼마 후 로이 뷰캐넌은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를 만나 그의 백 밴드에서 3년 정도 일하게 되었다. 이 때 데일 호킨스 밴드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음과 동시에 데일 호킨스의 동생이었던 로니 호킨스와 함께 [[캐나다]]로 넘어가 그곳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나, 곧 밴드를 탈퇴한다. [[1960년]]에는 자신의 공연을 좋게 본 주디 오웬스라는 여성 관객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약 1년 뒤 이 둘은 결혼하여 곧 [[워싱턴 D.C.]]로 이주한다. [[1964년]]부터 [[1968년]]에는 [[비틀즈]]를 시작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었고, [[더 후]], [[지미 헨드릭스]]같은 거장들이 출연하며 [[미국]]은 음악적으로 급격한 태동의 시기를 겪던 때였다. 로이 뷰캐넌은 비록 무명이었으나, 여러 공연들에서 이러한 곡들을 연주하고, 스타일을 적용시켰으나,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직접 관람한 뒤, 그들과 대등해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본인이 가장 잘하는 '미국적'인 연주 스타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후 그가 만들어낸 특유의 스타일의 근원이 된다. 그러는 한 편, 그는 가족들을 부양할 몸이 되어있었고, 잠시 생업을 위해 기타 연주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이발 기술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는지 그는 다시 기타를 잡는다. 이맘 때 즈음 그는 [[브라이언 존스]]의 사망으로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필요로 하던 [[롤링 스톤스]]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절한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로이는 기타리스트로 점차 명성을 얻어가 [[PBS]]에선 그의 연주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방영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가장 유명한 무명의 기타리스트''''는 그의 가장 상징적인 이명이 된다. 추후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이는 폴리도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 '''《Roy Buchanan》'''을 발표하였다. [[1972년]]에 발표된 이 데뷔앨범에는 [[The Messiah Will Come Again]]같은 전설적인 명연이 수록되었다. 다만 이 곡이 본작의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이 곡과는 상반된다 느껴질 정도로 [[컨트리 뮤직|컨트리]] 색이 짙은 앨범이다. 해당 앨범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연주에 감동한 [[영국]]의 [[기타리스트]]인 [[제프 벡]]은 자신의 앨범 《[[Blow by Blow]]》에 〈Cause We've Ended As Lovers〉라는 곡을 수록하여 로이에게 헌정하였다. 로이 뷰캐넌 역시 제프 벡의 이러한 헌정에 답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경찰과의 다툼 끝에 구치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생존하였다.[* 실제 이러한 경력 탓에 그의 가장 유력한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985년]]에는 ''When a Guitar Plays the Blues''로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블루스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호주]]등을 투어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ROY_BUCHANAN_August_7th_1988.jpg|width=100%]]}}} || || [[1988년]] [[8월 7일]]에 찍힌 그의 사진. '''사망 단 1주일 전에 찍힌 사진이다.''' || 본인부터가 기타리스트로서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던 그의 성향과 동시에 상업적인 성공을 강요하는 레코드사의 압력과 불화를 빚기 시작한 로이 뷰캐넌은 점차 [[알코올]]과 약물에 빠져들면서 파멸로 치달았다. [[1988년]] [[8월 14일]] [[알코올 중독]]이 심해진 로이는 [[가정폭력|아내를 폭행하고]] 길거리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공공장소 주취 혐의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약식기소를 앞두고 그는 자신이 갇힌 유치장에서 셔츠로 [[교수형|목을 매달았으며]], 곧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그가 실제 본인의 의사로 자살했는지는 여전히 의혹이 있다. 사망 당시 그의 후두부에는 큰 상처가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가 경찰에 연행되기 전 누군가와의 시비로 인한 폭행을 당하여 사망했다는 설과, 자신을 연행하고 감금한 경찰관에게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일단 현재까지 그의 공식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 음악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deeBQZ8Aklc,width=100%)]}}} || || '''[[1976년]] [[텍사스]] 오스틴에서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라이브''' || 가장 위대한 백인 무명 블루스 기타리스트라는 별칭답게, 테크닉적으로 빼어나다기보다는 한 음 한 음이 매우 감정적이고 격렬한 블루스 연주를 보여주었다. 특히 많은 연주에서 버터스카치 색상의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를 사용하였는데, 텔레캐스터 특유의 쏘는 음색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감정적인 연주는 그가 왜 개척자라고도 불리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그는 나무 조각과 픽업의 조합에 불과한 [[일렉트릭 기타]]에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명연인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은 블루스 넘버의 가장 대표적인 연주곡 중 하나가 되어 [[게리 무어]]같은 후대 거장들이 헌정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 사용 악기 == || {{{#!wiki style="margin: -4px -10px" [[파일:펜더 텔레캐스터.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4px -10px" [[파일:A_Fritz_Brothers_Roy_Buchanan_Bluesmaster_Guitar.png|width=100%]]}}} || || '''1953 [[Fender]] [[Telecaster]]''' || '''Fritz Bothers Bluesmaster'''[* 실제로 그가 사용하였던 악기는 아니며, 같은 회사에서 만든, 게리 무어가 소유하고 있던 거의 동일한 스펙의 제품이다.] || 데뷔 초기에는 [[리켄배커]]에서 만든 랩 스틸 기타나 [[깁슨]]제 할로우 바디 기타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악기라 한다면 [[1953년]]에 제작된 버터스카치 색상 [[펜더]] [[텔레캐스터]]일 것이다.[* 커리어 초기에 사용하던 깁슨 할로우 바디 기타와 교환하여 얻게 되었다고 한다.] 위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라이브 영상에서도 사용하고 있으며, 그의 커리어의 많은 퍼포먼스들에서 해당 악기를 사용하였다. 텔레캐스터 특유의 쏘는 톤을 사용하여 마치 기타가 우는 듯한 사운드를 내었다고 평가받는다. [[1987년]]부터 사망 직전까지는 그 전까지 사용하던 텔레캐스터를 은퇴시키고 [[https://fritzbrothersguitars.com/|Fritz Brothers]]라는 미국의 소규모 공방에서 제작한 텔레캐스터형 기타인 '''Bluesmaster'''를 잠시 사용하였다.[* 로이는 그 전까지 사용하던 펜더 텔레캐스터를 여러 번 도난당할 뻔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Les Paul|레스폴]]이나 [[스트라토캐스터]]같은 여러 기타 모델들을 시험해보았으며, 최종적으로는 본인과 가장 잘 맞는 기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로이 뷰캐넌이 본인이 개발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내쉬빌 텔레캐스터처럼 세 개의 [[EMG]] 액티브 싱글 코일 픽업을 장착하였고, 금속 재질로 된 너트를 장착하여 강한 밴딩과 비브라토를 자주 사용하던 로이 뷰캐넌의 연주 습관에 최적화된 구성으로 고안되었다. [[1992년]]에 촬영된 그의 기타들 [[https://youtu.be/dHtPht6Ljo8|#]] [[분류:미국의 기타리스트]][[분류:1939년 출생]][[분류:1955년 데뷔]][[분류:1988년 사망]][[분류:프랭클린 카운티(아칸소)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자살한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