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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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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입니다.”''' >---- >[[앨프리드 히치콕]] [[스페인]]/[[멕시코]]의 [[영화감독]]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으로 불리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끌었으며, 사회 풍자적인 내용과 정렬된 서사를 파괴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동원해 영화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라틴]]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카를로스 사우라]], [[훌리오 메뎀]] 심지어 [[기예르모 델 토로]]까지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특히 부르주아와 가톨릭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 커리어 대부분이 [[신성모독]]적이며 [[소송방지]]급 유머로 가득한 편이다. 황금시대와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비리디아나]]는 신성 모독적인 내용으로 인해 스캔들로 번졌을 정도. 이러한 부뉴엘의 대담함은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선 과거에 루이스 부뉘엘, 루이 부뉘엘로 적었으나 전부 잘못된 표기로,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루이스 부뉴엘에 가깝다. == 생애 == 1900년 2월 22일 [[아라곤]](Aragon) 지방의 칼란다(Calanda)라는 시골 [* [[사라고사]]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굉장한 산골 깡촌이다. 인구는 3700 정도.]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귀족 집안이고, 아버지는 쿠바 [[아바나]]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다. 지방의 수도 사라고사에 위치한 예수회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자서전 '마지막 숨결'에 따르면 [* 후기 작업 파트너였던 각본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정리했으며, 2021년 11월 5일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참고로 초현실주의자답게 구술 내용에 허풍이 강한 편이니 적당히 필터링해서 보라는 얘기가 많다.] 매우 엄격한 종교교육을 행하고 중세 [[라틴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14살 때 신앙에 회의감을 느꼈고 오히려 거부감만 많아졌다고 한다. 성과 신성모독에 눈을 뜬 것도 이 시기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을 종교가 어떻게 억압하고 남은 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렬하게 체험한 이 유년기의 경험은 훗날 창작력의 원천으로 평생 자리잡는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마드리드]]의 대학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동안 [[살바도르 달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예술/인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게 된다. 졸업 후 파리로 건너가 [[프리츠 랑]]의 운명(Der Mude Tod, 192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장 엡스탱 감독이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어셔가의 몰락]](28년작)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의견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달리와 함께 꾸었던 꿈을 토대로 [[안달루시아의 개]]를 완성해 대중에 선보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드 누아유 자작(Viscount of Noailles)으로부터 지원받은 5백만 프랑으로 [[황금시대(1930년 영화)|황금시대]]를 연출, 11월 28일 '스튜디오28' 극장에서 상영됐으나 우파 지식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스크린에 잉크통과 연막탄을 던지는 등 수모를 겪었다.[* 시사회 당시 부르주아 관객층들은 "유대인 타도"를 외치면서 달리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1933년에는 '아신'이라는 가명의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어 받은 상금으로 우르데스 마을(Las Hurdes)의 빈민들의 시궁창스러운 일상을 담아낸 [[빵 없는 대지]]를 개봉해 국가와 종교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는 문구로 크레딧을 장식해서 프랑코파를 비롯한 보수층들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금지를 당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를 거두자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시]]의 [[MoMA]]에서 스페인어 더빙 편집 등 유성영화 기술을 익히지만 미국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 하루는 박물관 감독관들이 그에게 와서 정통 가톨릭을 부정하는 영화인 [[황금시대(1930년 영화)|황금시대]]를 [[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한 것이 사실이며 무신론적이고 불경한 작품이 맞냐고 물었고, 부뉴엘은 무신론적인 작품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독관들은 [[사직]]을 요구했고, 며칠 후 해고된 부뉴엘은 막스와 함께 달리가 살고있는 5번가로 찾아가 뺨을 때리고 그대로 나온 뒤 인연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괴수(The Beast with Five Fingers)를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달리가 자서전에 부뉴엘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는 사실 와전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정착해 시민권을 얻게 되고 1947년부터 1965년까지 21편의 영화를 감독하였으며[* [[새벽]]+[[애련의 장미]]와 [[로빈슨 크루소]]+[[젊은 연인]]의 경우 각각 프랑스, 미국 자본으로 제작했다.] 프랑스로 넘어가 [[세브린느]]를 포함한 후기 명작들에서도 스페인 혹은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된 문화 요소를 곳곳에 삽입했다. 1983년 7월 29일 [[멕시코시티]]에서 눈을 감는다. 도발적인 작풍과는 달리 아내하고는 50년동안 해로했다. 아들 역시 감독이 되었으나,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 특징 == 초현실주의로 이름을 알린 만큼 흔히 전형적인 논리적 관습을 전복하고 권력 및 상류층들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를 조롱하고 관음증을 특유의 도발로 빗나가게 만든다. 당장 데뷔작부터 개는 한 마리도 씬에 담겨있지 않고 "옛날 옛적에" "8년 후" "봄이 되어" 같은 자막 카드가 뒤죽박죽 섞여 관객들이 서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비웃으며, [[황금시대]]의 마지막 시퀀스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블랑지 공작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상화해 당시 프랑스의 우익, 반유태인 단체가 난동을 피우기까지 했다. 또한 [[트리스타나]]에서 극 중 주연인 [[카트린 드뇌브]]가 하인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녀가 냉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만을 비추어 관객들의 욕망을 걷어차 버린다. 또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틴 문화 특유의 세속적이고 뻔뻔한 상상력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태연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들이대면서 대상을 조롱하는 부뉴엘의 유머는 판타지 장르와 현대 [[부조리 코미디]]와 [[블랙 코미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뉴엘 본인이 밝히길 [[에른스트 루비치]], [[앨프리드 히치콕]],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프리츠 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루비치에게서는 코미디를, 히치콕에서는 시선의 영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랑에게서는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 작품 목록 == * [[안달루시아의 개]] (1929) * [[황금시대(1930년 영화)|황금시대]] (1930) * [[빵 없는 대지]] (1933) * [[그랑 카지노]] (1947) - 멕시코에서의 첫 영화이며, 평범한 뮤지컬 멜로물이다. * [[위대한 난봉꾼]] (1949) * [[잊혀진 사람들]] (1950) [[칸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 [[세계기록유산]] 등재 (2003)[[https://en.unesco.org/memoryoftheworld/registry/474|#]] * [[수산나]]/[[책략의 딸]] (1951) * [[멕시코에서 버스타기]]/[[사랑없는 여자]] (1952) * [[야만인]]/[[이상한 정열]] (1953) * [[엘]] (1953) * [[강과 죽음]]/[[환상의 전차를 타고 여행하다]]/[[로빈슨 크루소]]/[[폭풍의 언덕]] (1954) * [[범죄에 대한 수필]] (1955) * [[새벽]]/[[애련의 장미]] (1956) * [[나자린]]/[[죄의 공화국]] (1959) * [[젊은 연인]] (1960) * [[비리디아나]] (1961)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학살의 천사]] (1962) - <절멸의 천사>라고도 부른다. * [[어느 하녀의 일기]] (1964) * [[사막의 시몬]] (1965) * [[세브린느]] (1967)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 [[은하수]] (1969) * [[트리스타나]] (1970)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1972)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수상. * [[자유의 환상]] (1974)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77) [[분류:스페인 영화 감독]][[분류:멕시코 영화 감독]][[분류:1900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멕시코의 무종교인]][[분류:아라곤 지방 출신 인물]][[분류:복수국적자]][[분류:스페인계 멕시코인]][[분류:간경변으로 죽은 인물]][[분류: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