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Λουκάς Νοταράς ([[1402년]] [[4월 5일]] ~ [[1453년]] [[6월 3일]]) [[콘스탄티노스 11세]] 재위기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메가스 둑스. == 상세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인]]의 주교관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말이 씨가 된다|그 말이 씨가 됐는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튀르키예]]의 영토로 남아있다.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세명의 아들 중 막내 아들을 제외한 두 아들이 전사했다. 그의 최후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대 [[학자]]이자 [[성직자]]였던 마카리오스 멜리시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메흐메트 2세]]는 처음에는 루카스 노타라스를 좋게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메흐메트 2세는 루카스 노타라스의 아들인 14살짜리 막내 아들 야코보스 노타라스가 용모가 빼어난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을 [[하렘]]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는데 루카스 노타라스가 이를 거부하자 화가난 메흐메트 2세가 루카스 노타라스와 그의 사위, 막내 아들을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때 막내 아들은 처형당하지 않고 하렘으로 보내졌다가 20대 초반에 [[이탈리아]]로 탈출했다는 [[https://en.wikipedia.org/wiki/Jacob_Notaras|전승]]도 있다. >''' "내 아이들아, 용기를 잃지 말거라. 우리는 우리가 주인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이 도시]]에서 넘치는 부귀와 경이로운 영광을 누리다가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만이 남았지만 그 또한 영원할 수 없다. 때늦은 [[후회]]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황제 폐하]]와 우리에게 소중했던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그 날]] 죽어야 마땅했다. 더는 죄짓지 말자. 악마가 활을 우리에게 겨누고 있다. 사랑하는 [[로마인]]의 아들들아, [[예수|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이름으로, 우리 또한 죽어 그분에게로 가자.”''' 노타라스가 처형 직전 막내 아들과 사위에게 한 유언이라고 하며 자신이 먼저 처형 당하면 그것을 본 막내 아들이 마음이 약해져 술탄의 성적 욕망에 굴복하는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메흐메트 2세에게 아들을 먼저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한참 전에 딸과 누이를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로 피신 보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정복자]]로 입성한 메흐메트 앞에 국고에서 빼내 온 금은보화를 싸 들고 나타났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방위비로 썼어야지. 너 같은 놈을 두고 반역자라고 하는 거다."''' 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공방전 당시 병에 걸려 있던 부인은 노타라스의 처형 후 [[노예]]로 끌려가다가 사망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에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피신한 딸 안나 노타라스는 베네치아에서 동로마인 망명지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또 다른 딸들인 헬레나 노타라스와 테오도라 노타라스도 망명에 성공했다. [[튀르키예]] [[역사가]] 할릴 이난즉은 [[메흐메트 2세]]가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딜 찾아봐도 없다며 메흐메트 2세가 성적인 욕망 때문에 루카스 노타라스와 노타라스의 막내 아들을 처형했다는 설을 부인했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정치인]][[분류:1402년 출생]][[분류:1453년 사망]]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메흐메트 2세, version=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