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br]{{{-1 [[라틴어]]: Luc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마실리아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증조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조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아버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양자)[br]코르넬리아(딸)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83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br][[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술라의 내전]]을 단행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맞섰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패한 뒤 마실리아에 망명했다.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며, [[스키피오]] 가문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북이탈리아의 [[켈트]]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5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기원전 259년 집정관 루키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1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각각 기원전 222년과 기원전 21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7년여간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대에 스키피오 가문의 영광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아버지와 삼촌이 불행히 전사한 히스파니아로 가서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바이쿨라 전투]], [[일리파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둬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축출한 뒤 아프리카로 진격해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무찌르고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 가문은 국난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고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에 로마의 패권을 구축한 영웅으로 부상했다. 포에니 전쟁 동안 부관으로서 동행했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형의 후광에 힘입어 기원전 190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쳐 로마의 패권이 아시아까지 미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대 카토]]를 비롯한 스키피오 형제의 정적들은 두 사람의 위세가 너무 강해졌다고 여기고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기원전 187년,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선불금으로 받아낸 500달란트를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았다. 급기야 "안티오코스의 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원로원에 설치되었고, 호민관 가이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이 문제를 맡아 루키우스에게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루키우스가 벌금을 내길 거부하고 결정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자, 미누키우스는 그를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형 푸블리우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8명의 호민관들에게 선처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고, 10번째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만이 거부권을 행사해 루키우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다. 이렇듯 정적들의 연이은 공세에 지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리테르눔으로 낙향해 기원전 183년 그곳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루키우스는 기원전 184년 [[감찰관]]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헀다. 그 후 아시아티쿠스의 가문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루키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재무관에 선임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고, 그의 아들 루키우스는 아예 관직을 맡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인 루키우스 대에 이르러 아시아티쿠스 가문은 재도약의 기회를 얻었다. 그는 기원전 104년경 주화 주조 담당관으로 활동했고, 기원전 100년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고자 [[포로 로마노]]에 집결한 귀족 무리에 가담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한 뒤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루키우스 아킬리우스와 함께 삼니움의 이세르니아를 수비했다. 그러나 반란군에게 포위된 이세르니아의 식량이 바닥나서 수많은 이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자, 두 사람은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노예로 변장한 뒤 달아났다. 기원전 88년, 그는 사제단의 일원에 들어갔다. 이후 기원전 88년 또는 86년에 [[법무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85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이탈리아에서 일리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연합하여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한 뒤 로마로 진군할 준비를 하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무찌르려 했다. 그러나 킨나가 기원전 84년에 병사들의 반란으로 살해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83년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83년 초, 술라가 5개 군단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상륙했다. 그와 노르바누스는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받들어 즉각 군대를 소집한 뒤 남하했다. 로마를 향해 천천히 진군하고 있던 술라는 티파타 산에서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군대와 처음으로 맞붙었다. 술라군은 이 전투에서 사상자 70명을 내면서 적병 6,00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바누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카푸아로 후퇴했다. 그 후 스키피오가 북쪽에서 술라에게 접근해오자, 술라는 분견대를 차출해 그를 맞이하러 진군했다. 양군은 칼라와 테아나 시 사이의 지역에서 조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40개 코호트를 이끈데 비해 술라에게는 20개 코호트만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신병이었던 스키피오의 병사들은 노르바누스의 패전에 겁을 먹고 술라와 싸우길 기피했다. 스키피오는 병사들이 동요하는 걸 보고 술라의 군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진을 친 뒤 협상을 제안했다. 술라는 즉각 동의했고, 두 사령관은 휴전을 선언하고 인질을 교환한 뒤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술라는 은밀히 휘하 병사들을 스키피오의 진영으로 보내 적병들을 회유하게 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이 동요하자, 스키피오의 부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스키피오에게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후 스키피오는 동료 집정관 노르바누스에게 휴전 협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세르토리우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도중에 방향을 틀어 술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소도시 수에사를 기습 공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결렬되자, 스키피오는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했다. 그러나 양측이 평원에 집결하고 술라가 신호를 보내자, 아시아티쿠스의 병사들은 술라 편으로 대거 이탈했다. 술라는 스키피오를 체포했다가 풀어줬고,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갔다. 그 후 세르토리우스는 에트루리아에서 4개 군단을 모집해 스키피오에게 넘겨줬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이끌고 피케눔으로 진군하여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대결했으나, 병사들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도 스키피오의 병사들이 폼페이우스 쪽으로 붙어버렸다. 스키피오는 로마로 달아났다가 기원전 82년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가 자신을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자 마실리아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기원전 78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78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막내 아들인 루키우스를 입양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인물은 훗날 친아버지와 함께 술라파가 장악하고 있던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전투에서 패배해 사망했다. 또한 그의 딸 코르넬리아는 기원전 55년 [[법무관]]을 역임하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 처음에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여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파르살루스 전투]]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돌아서서 아시아 총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부관이 된 푸블리우스 세스티우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