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兄 || ||<-2>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br]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 ||<-2>[[파일:1699756733567.jpg|width=100%]]|| || 출생 || [[1862년]] [[10월 19일]] || || 사망 || [[1954년]] [[4월 10일]] || ||<-2> 弟 || ||<-2>[[파일:1699756846868.jpg|width=100%]]|| ||<-2> 루이 장 뤼미에르[br]Louis Jean Lumière || || 출생 || [[1864년]] [[10월 5일]] || || 사망 || [[1948년]] [[6월 6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발명가]]이자 [[영화 감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다.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 == 시네마토그래프 제작과 최초의 영화 제작 == [[브장송]] 태생이지만, 어렸을적인 1870년 [[리옹]]으로 이사해 기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진 회사를 운영해서 그런지, 사진에 익숙했다고 하며 오귀스트는 경영자로, 루이는 기술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은퇴한 후, 사진을 가지고 발명품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영화 필름이었다. 1895년 2월 13일에 시네마토그래프 특허를 얻고, 1달 뒤 영상을 찍기 시작해 공개했다. 이전에도 영상이라는 개념은 발명가 사이에서 알음알음 존속해왔고 이들이 만든 필름도 발견되었지만, 그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한 건 이들이 최초다. 뤼미에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이나 [[열차의 도착]] 같은 영화들은 공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켜 영화의 도래를 알리게 했다. 극영화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선조로도 불린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단순히 유행에 그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 영화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지 않았다. 결국 영화 산업에는 제대로 끼어들지 못하고 파테에게 찍었던 영화 필름을 매각했다. 이후 컬러 및 입체 사진 연구로 넘어갔다. 그래도, 영화가 발전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감탄해서인지 1930년 유성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가 나온지 100년이 지났을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 나와 지금 영화랑 전혀 다른게 나와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출처는 90년대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 나온 뤼미에르 형제 특집기사.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형제지만 굉장히 장수하여 형은 91세, 동생은 83세를 살았다. 하지만 둘의 장수는 [[크누트 함순]]처럼 형제의 명예에 치명타를 남게 하였다. 형제 모두 [[파시스트]]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루이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파시스트 국가가 미국 영화에 대항하길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귀스트 역시 동생에 동조했으며 비시 프랑스 하에서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https://fr.wikipedia.org/wiki/Auguste_et_Louis_Lumi%C3%A8re#Les_ann%C3%A9es_de_guerre_et_de_collaboration|출처]] 이로 인해 프랑스 [[프랑스 프랑|200 프랑]] 지폐 초상화로 선정될 뻔한 당시 크게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결국 초판을 모조리 갈아야만 했었고 그 자리엔 100 프랑에 들어갈 예정이였던 [[귀스타브 에펠]]로 대체되었고, 100 프랑 자리엔 [[폴 세잔]]이 얼떨결에 차지했다. == 최초의 영화제작자들이 아니다? ==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888년 프랑스인 루이 르 프랭스(Louis Le Prince, 1841.8.28~1890.9.16 ?)가 촬영한 12프레임짜리 단편영화 《라운데이 정원》(Roundhay Garden Scene)이 최초의 영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https://youtu.be/tc-L9_4jGc4|영상]]] 유감스럽게도 루이 드 프랭스가 1890년 원인 모를 행방불명을 당해서 이 영화가 묻혀졌던 것이다. 프랭스는 1890년 디종 역에서 열차를 탄 것을 형이 본 게 마지막 목격이었고 이후 영원히 사라졌다. 1897년 프랑스 경찰은 사망처리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어떤 행방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라운데이 정원은 내용이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랑 달리 2초짜리 클립인데다 개인 소장품이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발표한 영화의 형태하고는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만약 프랭스의 영화가 최초의 영화라 인정받더라도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상업영화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다. 최초의 영화 타이틀의 경우 영화의 정의에 따라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데, 단순 영상이 아닌 대중 상영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영화라고 취급할 경우 여전히 최초의 영화 타이틀은 유지하게 된다. == 여담 == * 만든 영화들이 초분 단위 클립 수준이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짜잘히 올라와있다. 공식적으로는 이 필름들을 엮은 뒤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나레이션을 덧붙인 2016년 뤼미에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 성의 '뤼미에르 Lumière'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영화가 빛하고 연계가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우연의 일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 [[분류:프랑스 영화 감독]][[분류:프랑스의 발명가]][[분류:브장송 출신 인물]][[분류:1862년 출생]][[분류:1954년 사망]][[분류:1864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