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남인)] [include(틀:역대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2>
<#94153E> {{{#fff {{{+1 '''류혁연''' [br] 柳赫然}}}}}} || ||<#94153E> {{{#fff '''본관'''}}} ||[[진주 류씨]][* 이류계 북부령공파 22세 연(然) 항렬.] || ||<#94153E> {{{#fff '''출생'''}}} ||[[1616년]] [[12월 19일]] || ||<#94153E> {{{#fff '''사망'''}}} ||[[1680년]] [[5월 20일]] (향년 64세) || ||<#94153E> {{{#fff '''자'''}}} ||회이(晦爾) || ||<#94153E> {{{#fff '''호'''}}} ||야당(野堂) || ||<#94153E> {{{#fff '''시호'''}}} ||무민(武愍) || ||<#94153E> {{{#fff '''부모'''}}} ||부친 - 류효걸(柳孝傑) 모친 - [[의령 남씨]] 남이흥(南以興)의 딸 || ||<#94153E> {{{#fff '''부인'''}}} ||[[전주 이씨]]({{{-3 1617 ~ ?}}}) - 이억(李繶)의 딸[*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21462|#]]] || ||<#94153E> {{{#fff '''붕당'''}}} ||[[남인]], [[탁남]]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무신. [[남인]] 집권기 당시 병권의 상징이었다. == 생애 == 1616년([[광해군]] 8) 12월 19일 대대로 무반으로 출사한 집안에서 [[황해도]]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류효걸(柳孝傑, 1594. 8. 18 ~ 1627. 8. 27)과 어머니 [[의령 남씨]](1594. 10. 28 ~ 1645. 6. 4)[* 남이흥(南以興)의 딸이다.]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갖고 있다가, 1644년([[인조]] 22)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644_007546|급제해]] 덕산현감, 선천도호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1653년 6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고, 이듬해엔 수원부사를 역임했다. [[효종(조선)|효종]]이 [[서인]], 특히 [[산당]]의 제어와 북벌론[* 다만 효종의 북벌론은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을 실행하려 [[이완(1602)|이완(李浣)]]과 함께 승지로 파격승진된 뒤 북벌론을 지원했다. 이후 충청병사, 삼도수군통제사, 공조참판, 어영대장, 형조참판, 한성좌윤 등을 지냈다. === 당쟁과 유혁연 === [[남인]] 계열이라 [[송시열]]에게 미움을 샀고,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항]]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피혐한 뒤 한직 동지중추부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때 어영대장직에선 물러나지 않았다. 1669년엔 어영대장의 직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하여 도제조 잠시 보직을 옮겼다 우포도대장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그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훈련도감]] 소속 5,000명 군사들에게 쓰이는 운영비가 많이 들자, 그는 훈련별대를 분리시켰다. 급료병의 수는 줄어서 운영비는 덜 들고 군액은 그대로였다. 훈련별대는 금위영(禁衛營)으로 합쳐진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현종 앞에서 현종이 조총의 길이를 묻자 손으로 조총 길이만큼 벌려서 "이만합니다"라고 했는데 그걸 옆에서 사관이 우물쭈물하면서 못 받아 적고 있는 것을 보고 사관을 욕하면서 ''''上問鳥銃之長於柳赫然. 然擧手尺餘, 以對曰如是''''[* 해석하면 "임금께서 조총의 길이를 유혁연에게 물으시니, 이에 손을 한 자 남짓으로 벌리고 이로써 대답하기를 이와 같나이다 하였다." 정도.]라고 쓰면 되지 그걸 뭘 고민하고 앉았냐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앞서 효종이 활 쏠 때 기존의 조선에서 쓰던 숫깍지 대신 [[만주족]]이 쓰는 암깍지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면서[* 숫깍지와 달리 암깍지는 튀어나온 부분이 없이 완전한 반지 형태를 띤다.] 만주족들이 하는 것처럼 [[깍지]]를 밤낮으로 끼고 다니면서 손에서 풀어 놓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숙종 6년에 유혁연이 김석주와 함께 암깍지 대신 숫깍지를 다시 쓸 것을 진언하면서 "지금 두어 겹으로 된 갑옷을 달아 놓고 쏘아 보니 혀가 있는 것(숫깍지)으로는 꿰뚫을 수 있는데 혀가 없는 것(암깍지)으로는 꿰뚫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일단 효종이 명한 것이라 함부로 고칠 수는 없지만 숫깍지도 암깍지랑 같이 사용할 것을 권했다고. 이로 인해 공조판서로 다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으나 또 문신들이 반발하여 잠시 중추부로 갔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다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 요직을 지낸 뒤 역임하고 본업인 훈련도감에 훈련대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윤휴]]의 북벌론에 '윤휴는 일을 맡아보지 못해서 쉽게 말을 하옵니다'[* 한마디로 "군사 업무를 맡아본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라고 여타 당시 대신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보였다. === [[경신환국]] === [[허적]]의 연회 때, 숙종은 비가 오는 것을 보곤 유악과 차일을 가져가 주라고 했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류혁연, [[김만기(조선)|김만기]]와 신여철을 패초(부름)한다. 여기서 유혁연의 훈련대장직은 김만기에게 넘어가며 유혁연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고, 남인은 병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가 시작된다. 허견과 [[인평대군]]의 삼남인 [[복선군]]은 [[김석주]]를 제거하기 위해 체찰부를 설치하고, 심지어는 숙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복선군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후 고변자 정원로가 말하기를, 2,000명 정도의 군사들을 사적으로 훈련시켜 김석주를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유혁연에게 책임이 갔다. 유혁연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잠시 유배된다. 위리안치까지 갔고,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사사된다. [[정조(조선)|정조]] 때 신원된다. == 가족관계 == * 증조부 : 류용(柳溶)[* 경원부사] * 조부: 류형(柳珩)[* 삼도수군통제사] * 부 : 류효걸(柳孝傑) * 모 : [[의령 남씨]] - 남이흥(南以興)의 딸 * 동생 : 류병연(柳炳然) * 부인 : [[전주 이씨]] - 이억(李繶)의 딸 * 손자 : 류득장(柳得章) * 외손부[* 외손자의 아내] : [[복녕군|복녕군]]의 딸 * 백부 : 류충걸(柳忠傑)[* [[주막]] 항목에 이 사람과 수원부사를 지내던 시절 류혁연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 숙부 : 류지걸(柳智傑) 부인은 이억(李繶)의 딸 [[전주 이씨]][*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21462|#]]]이며, 아들은 누구고 몇 명이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 1남 1녀는 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해남]]현감 유득장이 류혁연의 손자인데, 더한 짓을 저질렀다며 국문하라는 기사와, 복녕군의 딸이 류혁연의 외손자와 혼례를 치뤘다는 기사가 나온다. [[분류:진주 류씨(이류)]][[분류:1616년 출생]][[분류:1680년 사망]][[분류:조선의 무관]][[분류: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