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사)] 麻貴[* [[麻|삼 마]]에 [[貴|귀할 귀]]. [[악마|魔鬼]]가 아니다.] [[1543년]]([[가정제|가정]] 22) ~ [[1618년]]([[만력제|만력]] 46) [목차] == 개요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 본래 [[후이족]] 출신이었으나 전향하여 명에게 충성을 바쳤다. == 생애 == 1543년 [[산서성]] [[다퉁|대동]] 우위(右衛)[* 현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산서성)|산시성]] [[숴저우시]](朔州市) 유위현(右玉縣).]에서 대동 참장(大同參將)을 지낸 마록(麻祿)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 사람들에게 [[명나라]] 북방 지방의 [[명장]] 가문인 [[이성량]]의 철령 이씨 가문과 더불어 동이서마라고 불렸고,[* "마씨는 장수로서의 재능이 많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철령 이씨와 더불어 동이서마라 하였다(麻氏多將才. 人以方鐵嶺李氏, 曰 東李西麻)."라고 명사 마귀 열전에서는 말한다.] 이후에는 서북 제일의 명장이라 불렸으며 보바이의 난과 임진왜란에 종군하여 모두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북방의 이민족들(대개는 [[몽골인|몽골족]])에 의한 크고 작은 소요 사태들 또한 모두 평정하였다. 만력 3대정 중 첫 번째이자 [[네이멍구|내몽골]]에서 벌어진 보바이(발배)의 난에서는 보바이를 지원하던 [[몽골]]을 무찔러 보바이를 지원을 하는 것을 막았으며 몽골과 보바이가 연합하려 하자 직접 '''몽고 부락에 쳐들어가 근거지를 불태운다.'''[* 당시 장량보까지 진격한 [[이여송]]의 군대가 적과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밀고 밀리던 와중에, 몇백기 남짓의 기병을 이끌고 측면을 기습지원하며, [[이여송]]과 연계하여 적을 패퇴시켰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만력제]]에게 비왜총병관(備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명의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되었다. '''조선에서 정말 열심히 싸운 대표적인 명의 장수'''로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사로병진책]]이 개시되자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경상 등지에서 왜군을 압박하다가 1598년 왜군이 철수하자 명으로 귀환하였다. 분명 장수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고 열심히 전쟁에 임하였을 뿐 아니라, ~~[[사탄|이름]]과는 달리~~ 인품 또한 훌륭하여 [[조선]] 땅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적도 없는 [[명장]]이다. 그런데 어째 좀 묻히는 감이 있다.[* 보통 육군 총사령관 [[유정]]과 해군 제독 [[진린]], 그리고 여기에 (이순신 때문에 수군을 더 잘 아므로&정유재란 말기에는 노량 해전 빼고는 잘 안 알려져 있으므로) [[등자룡]] 정도가 유명하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뽑았다.[*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휘하 명나라 군졸이 조선 민간인을 약탈하다가 실수로 죽게 한 일이 있었는데, [[선조(조선)|선조]]는 그 군졸을 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귀에게 일렀으나 "그가 비록 꼭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살인]]하였으니 그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반드시 「살인을 했는데도 벌을 주지 않더라. 」고 하면서 앞으로 [[중국]]에는 법도가 없다고 말할 것이며, 우리 군사들도 또한 「살인을 한 자도 벌이 없더라. 」고 하여 장차 우리의 법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을 어기더라도 법도를 엄숙히 세우고자 하므로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고 말한 뒤 그 군졸을 처형했다.[* 선조 30년 7월 5일 갑오 2번째기사] 여타 거만하고 안하무인인 [[중국]] 장수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후 [[랴오둥 반도|요동 반도]]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1612년 [[차하르]]의 호돈토(虎墩兎)가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랴오양]] 목가보(穆家堡)[*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랴오양현(遼陽縣) 무지아진(穆家鎭).]에 들어가 약탈을 일삼자, 이를 소탕하여 격퇴, 궤멸시켰다. 같은 해 여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으며, 1618년 사망했다. == 기타 == 아들인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麻巖)은 조부와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에 [[후금]](後金)과의 싸움인 심하 전투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였다.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남경통판겸 조병독량사로 [[산둥성]] 등주의 군량을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조선 인조 5년) 9월에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조상이 되었다. 상곡은 중국 [[허베이성]]에 있는 지명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귀, version=51)] [[분류:숴저우시 출신 인물]][[분류:1543년 출생]][[분류:1607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후이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