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황제]][[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제국의 근위대장]][[분류:폐위된 군주]][[분류:164년 출생]][[분류:218년 사망]][[분류:티파자 주 출신 인물]][[분류:로마 제국의 고대 로마 다신교 신자]] [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 || '''{{{#FCE774 마크리누스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3세기)]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22대 황제}}}[br]{{{#FCE774,#FCE774 {{{+1 마크리누스}}}[br]MACRINVS}}}'''}}}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마크리누스.jp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br](Marcus Opellius Macrinus) || ||<|2> {{{#FCE774,#FCE774 '''출생'''}}} ||165년 || ||[[로마 제국]] [[마우레타니아]] || ||<|2> {{{#FCE774,#FCE774 '''사망'''}}} ||218년 6월 (향년 53세) || ||[[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 ||<|2>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로마 황제}}} || ||[[217년]] [[4월 11일]] ~ [[218년]] [[6월 8일]] '''(1년 58일)''' || || {{{#FCE774,#FCE774 '''전임자'''}}} ||[[카라칼라]] || || {{{#FCE774,#FCE774 '''후임자'''}}} ||[[엘라가발루스]] || || {{{#FCE774,#FCE774 '''배우자'''}}} ||[[노니아 켈사]] || || {{{#FCE774,#FCE774 '''자녀'''}}} ||[[디아두메니아누스]] || || {{{#FCE774,#FCE774 '''종교'''}}} ||[[로마 신화|로마 다신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 마크리누스는 카이사레아 출신의 무어인으로 아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정신력으로 궁정까지 올라간 나귀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특히 그는 무어인들의 관습에 따라 한쪽 귀를 뚫었다. 출신 등에서 오는 이러한 약점은 그의 강직한 성품에 가려졌다. 그러나 법과 판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법조문 등을 충실하게 따르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 >[[디오 카시우스]] 79. 11 제22-1대 [[로마 황제]].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 황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차지한 최초의 현직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순수 [[기사계급]]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 비(非) [[원로원]] 계급 출신의 황제로, 재위 내내 로마에 방문하지 않은 최초의 로마황제, 로마 제국 동부에서만 머문 황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무어인]] 황제로 유명했고 조각상이 흑인처럼 묘사되어 [[흑인]] 내지 [[흑백혼혈]]이라는 주장도 있었던 로마황제였다. 하지만 현대 이후에는 [[베르베르]] 혈통의 [[북아프리카|푸닉]] 지역 출신 로마인으로 밝혀지면서, 흑인이나 흑백혼혈 로마인이라는 주장은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 생애 == === 출신과 제위 전까지의 생애 === 164년에 마우레타니아 해안의 항구 도시 [[카이사레아]][* 현 [[셰르셸]]]에서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마크리누스는 대개의 [[베르베르]] 혈통 무어인답게 귀 한쪽에 [[귀걸이]]를 뚫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대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역사가들은 마크리누스가 비천한 태생의 마우레타니아 현지 로마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고대의 역사가들이 제시하듯이 그렇게 비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근현대 이후 학자들은 마크리누스가 즉위 당시 원로원 의석도 가지지 않은 마우레타니아 태생의 로마인이었던 만큼, 그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세습 원로원 의원 디오의 눈에는 매우 비천했다고 까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크리누스의 부모는 노동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에 속하는 에퀴테스[* 고대 로마의 기사 계급.]였고, 마크리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수년간 변호사 수업을 받아 능력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일찍이 날렸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을 지낸 막강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을 때였다. 플라우티아누스 밑에서 당시 로마 지도층과 인연을 맺게 되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행정관료 자리를 임명받아 출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크리누스를 신뢰해 그를 이끌어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라우티아누스와 [[견원지간]]이었던 공동황제 [[카라칼라]]였다. 따라서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의 신임 아래 승승장구를 계속했고, 212년에는 근위대장에 임명돼 동부에서 군사원정과 여행을 병행하던 카라칼라를 직접 모셨다. === 카라칼라 살해 === 카라칼라는 솔직하고 마초적인 매력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병사들의 사랑과 지지를 몸소 받았지만, 잔인하고 충동적이었다. 또 그는 독불장군 같은 성격을 가졌고, 부하들을 다룰 때 관용과 자비를 베푸는 성격도 아닌 황제였다. 이런 가운데 카라칼라는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연이어 잔혹한 행동을 벌이고,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잦은 실책을 저질러 병사들로부터 불만을 사게 된다. 그러나 마크리누스는 확실히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았던 만큼, 동부 순행 중인 카라칼라가 군사행동을 할 때마다 요직을 배정받았고 217년 [[파르티아]] 원정 계획 당시에도 경호 외의 다른 임무를 배정받았다. 기번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무렵 카라칼라가 폐위되고 마크리누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는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마크리누스를 크게 동요케 했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위해 예언만으로도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해 잔인하게 죽일 카라칼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이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됐고, 계획대로 217년 카라칼라는 루나 신전 침배 중 암살됐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당시 행군 중인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뒤의 내용을 보면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를 능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217년 4월 8일 카라칼라가 살해되었을 때 제국에는 제위를 계승할 만한 명백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다. 카라칼라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데다 공개적으로 후계자를 지목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살의 주역들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을 제위에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카라칼라를 살해한 목적 자체가 이미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계승 문제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지만, 암살 공모자들은 아주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마크리누스는 3일을 기다린 후 217년 4월 11일에 휘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크리누스가 속주 출신, 그것도 여타 다른 북아프리카 일대 속주들과 달리 로마 식민시 출신이 아닌 사람 중 처음 황제가 된 케이스였다. 아울러 그는 이전의 여타 다른 기사계급 출신 로마황제들과 달리 제위 등극 당시부터 원로원 의원이 아니면서 제위에 오른 최초의 황제였다. === 동방에서의 실책 === 제위에 오른 마크리누스는 꼭 필요한 몇몇 사람만을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했고[* 이때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카라칼라를 암살한 사람도 사형 크리를 먹었다.] 몇몇 속주 총독을 자신의 출신 계층 측근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바꿨다. 이때 마크리누스에게 속주 총독 자리에 임명된 원로원 의원 중 한명에 [[디오 카시우스]]도 있었다. 단, 마크리누스 몰락 이후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와 관계가 나쁘지 않은 탓에 디오가 계속 승승장구한 것을 보면, 디오 카시우스의 속주 총독 임명은 마크리누스 쪽 인사라서 벼락출세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크리누스의 최대 실수는 그가 카라칼라의 모후 [[율리아 돔나]]와 사이가 틀어졌고, 이 문제로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조치가 실책이 아님에도 이는 끝내 마크리누스 정부가 어이없이 붕괴된 이유가 됐다. 율리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가 암살된 이후, 안티오키아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군사들과 공모하는 유혹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유방암이 진전된 상태였던 그녀는 마크리누스가 안티오키아를 떠나라고 하자, 스스로 굶어 죽는 길을 선택했다. 돔나가 이런 극단적 선택한 진짜 이유는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된 뒤, 그녀와 에메사 왕가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누린 합법적, 편법적인 특권과 영예가 박탈되고 축적해놓은 재물이 모두 국고로 귀속조치된 것이 컸다. 따라서 율리아 돔나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온갖 치부가 드러난 채 몰락함을 슬퍼했고, 그렇게 죽었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율리아 돔나와 함께 시리아에 와 있던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 일가를 붙잡아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돔나의 여동생 마이사와 조카 소아이미아스, 마마이아 일가의 모든 재산은 동결됐다. 당연한 말인데, 마크리누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 에메사 여인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아래에서 받은 영예와 특권도 박탈됐다. 즉, 마크리누스는 편법적으로 누린 시리아 에메사 여인과 그 가족들의 황족 지위를 무효화했다. 이때의 이야기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마이사의 차녀 마마이아 남편으로 시리아 총독을 지낸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아버지]와 그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내외가 마크리누스의 명령으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모조리 살해됐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세베루스 왕조의 재건 가능성을 차단했다. 헌데 실질적인 관건은 파르티아인들이었다. 그들은 1년 전 카라칼라의 뒤통수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217년 가을까지 강력한 군대를 규합한 뒤 많은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기지로 진군해왔다. 이는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전 초기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승기를 잡다가,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무너진 모습과 묘하게 겹쳤다. 이때 두 진영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니시비스에서 충돌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사건이 바로 [[니시비스 전투]]인데, 어느 쪽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마크리누스는 여기에서 인생 최악의 실수를 범한다. 제위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는 파르티아 왕중왕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2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 협정은 비등비등한 졸전 속에서 완전히 패배하지 않은 로마군을 자극시켰고, 제국 동부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마크리누스가 맺은 굴욕적인 강화 협상 내용까지 알려지자 원로원 내 귀족들과 제국 전역의 시민들은 반발하였고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당연한 말인데 군인들은 겁쟁이 같은 행동을 벌인 마크리누스를 혐오했고, 군대 안에서의 인기는 급락했다. 게다가 카라칼라가 군에 부여한 특권들을 일부 없애기 시작하면서 군인들의 반발을 더 사고 말았고 스스로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그렇게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제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하여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강화 교섭[* 금관을 바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을 맺고는 전쟁을 끝내버림으로써 오히려 병사들의 눈 밖에 나고 그들이 다시 카라칼라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다.[* 추가적인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항목을 참고.] === 반란, 그리고 죽음 ===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다. 그는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Juila Maesa)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진 14살의 바리우스 아비투스였다. 마크리누스의 철저한 대비에도 율리아 마이사는 20년 세월 동안 쌓아둔 로마 제국 전역의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이 있는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올인해 재기의 도박을 벌였다. 때마침 언니 돔나가 자살 전, 카라칼라 측근 및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공모하면서 판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는 점, 이 문제로 마크리누스가 로마로 가지 못하고 강제로 안티오키아에 머물게 된 점도 율리아 마이사 입장에선 기회였다. 더욱이 로마에 동결된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재산을 되찾을 생각이라면, 마이사와 두 딸에게 토착 왕가로 에메사 일대에서 오래 부를 쌓아 둔 시리아 일대의 재산은 아깝지 않았다. 마이사의 큰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오랜 기간 연인인 간니스의 잔꾀에 따라, 그럴듯한 스토리가 완성되자 마이사 모녀는 동방에 있던 원로원 의원, 총독, 군사령관들과 접촉해 방문일을 정했다. 218년 5월 15일 밤,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율리아 마이사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의 라파나이아(Raphanaea)에 있는 제3군단 '갈라카' 병영으로 몰래 데리고 갔다. 다음 날 아침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정말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특히 열광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이전의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아홉살 난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림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야 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들에게 패한 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에 칼케돈(Chalcedon)[* 터키 이스탄불 맞은 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에 있던 고대의 해상도시.]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그의 아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에 있는 아르켈라이스(Archelais)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결국 그는 황제로서 로마는 고사하고 [[유럽]] 대륙에 발조차 못들인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지속되게 된다. 그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도, 엘라가발루스 지지 세력들과의 싸움에서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의 입지가 손상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군대의 급료와 특권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