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3년 출생]] [[분류:1945년 사망]]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나치당원]] [[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 [[분류:독일제국군/군인]] [[분류:자살한 나치 관련자]] [[분류:나치 독일/인물]][[분류:부퍼탈 출신 인물]]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include(틀:역대 제2SS기갑사단장)]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캄프3.jpg|width=100%]]}}}|||| ||<#666> {{{#FFF 이름}}} ||<(>'''Matthias Kleinheisterkamp'''[br]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 ||<#666> {{{#FFF 출생}}} ||<(>[[1893년]] [[6월 22일]][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5]]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주 엘버펠트[br](現 [[독일]] [[부퍼탈]]) || ||<#666> {{{#FFF 사망}}} ||<(>[[1945년]] [[4월 29일]] (51세)[br]소련군 점령지 [[브란덴부르크]]주 할베 || ||<#666> {{{#FFF 복무}}} ||<(>[[독일 제국군]] [br] [[국가방위군]] [br]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1933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br] [[폴란드 침공]] [br] [[베를린 공방전]] || ||<#666> {{{#FFF 주요 서훈}}} ||<(>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 백엽훈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캄프1.jpg|width=100%]] || || [[파일:캄프2.jpg|width=100%]]|| ||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Matthias Kleinheisterkamp)''' ||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참전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 오늘날의 [[부퍼탈]]에서 태어난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고교졸업 후 바로 독일육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서부전선]]에서 종군하다가 [[1915년]]부터 [[1916년]]에 [[동부전선]],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다시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소대장, 대대 부관, 연대 부관 등을 전전하다가 [[1918년]]에 큰 부상을 입은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제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슈츠슈타펠]]에 입대하다 == 1차 대전 후 [[자유군단]]에 참가한 그는 1921년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국가방위군]]으로 전속되어 대위까지 진급했고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5년]]에는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에 배치되어 [[파울 하우서]]의 부관이 되었다. [[1937년]] [[4월 20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1938년]]에 부대를 무단이탈해 친위대 내부의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사면되었다. [[1938년]] [[12월]]에 [[뮌헨]]으로 이동해 제2 SS 장갑사단<다스 라이히>에 배치된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제3대대장이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 [[파일:캄프4.jpg|width=100%]] || [[1939년]] [[폴란드 침공]]시 [[바르샤바]]에 있던 독일계 시민을 피신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그는 [[1940년]] [[5월]]에 제3 SS 장갑사단 <토텐코프>의 제3 보병연대장이 되었다. 당시 사단장이던 [[테오도어 아이케]]와 사이가 좋지 못했지만 [[1941년]] [[7월]]에 아이케가 부상당하자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잠시 토텐콥프의 사단장 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케와 불화가 더욱 심해지자 그는 석달 후 다시 다스 라이히로 돌아와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전공을 세워 기사십자장을 받은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1942년]] [[4월]]까지 다스 라이히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어졌다. [[1942년]] [[4월]]에 잠시 제6 SS 산악사단<노르트>의 사단장을 맡았지만 이 때는 임무가 주어지지 않아 [[1942년 ]] [[6월]]에 다시 새로 임명되어 [[1943년]] [[6월]]까지 노르트를 지휘해 [[핀란드]]에서 [[소련]]군과 [[참호전]]을 전개했다. 이 공적으로 [[핀란드]] 정부로부터 자유십자훈장을 받은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1943년]] [[6월]]까지 제7 SS 장갑군단, [[1944년]] [[6월]]에 제3 SS 장갑군단, [[1944년]] [[8월]]부터 패전까지 제 6 SS 장갑군단의 군단장을 역임했다. [[1945년]] [[4월 28일]]에 [[베를린]]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이던 클라인하이스터캄프는 [[소련]]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 최후 == 포로가 되어 [[베를린]] 남동쪽의 할베근처에 수용된 그는 포로가 된 다음날인 [[4월 29일]]에 [[자결]]했다. 그러나 [[베를린]]의 총통부는 그가 사망한 사실을 모르고 백엽훈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