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파시즘)] ||<-2><:>[[파일:깃밣.png|width=100%]]|| ||<-2><:>{{{#000000 '''만주국 협화회'''}}}|| ||<-2><:>{{{#000000 '''滿洲國協和會'''}}}|| ||<-2><:>{{{#000000 '''満州国協和会'''}}}|| ||<:>'''창당일'''||[[1932년]] [[7월 25일]]|| ||<:>'''해산일'''||[[1945년]] [[8월]]|| ||<:>'''명예회장'''||[[선통제|강덕제]]|| ||<:>'''정치적 스펙트럼'''||[[극우]]|| ||<:>'''이념'''||[[민족주의]][br][[전체주의]][br][[군국주의]]|| [목차] [clearfix] == 개요 == [[만주국]]의 공적 정치 단체. 협화회라는 명칭에서 보듯, 만주국의 건국 이념이었던 [[오족협화]](五族協和)를 확립해 왕도낙토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는 것이 최종 목표로 설정된 단체였다. 하나뿐인 합법적 정치 조직으로, 사실상 [[일당제]]를 실시하였다. == 상세 ==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일본 제국]]의 방침에 따라 이 국가의 건설에 대내외적으로 내세울 그럴 듯한 이념이 필요했는데, 건국 직전까지는 공식적인 조직 없이 자치지도부나 이런저런 단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국 후 만주사변과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시와라 간지]] 등 몇몇 고위 장교들이 한시적인 조직이 아닌 영구적으로 활동할 이념 조직이 필요하다고 상부에 적극적으로 건의했고, 그 결과 세워진 단체가 이 협화회였다. 공식 결성은 1932년 7월 25일에 만주국 국무원 회의에서 이루어졌고, 협화회 5대 강령도 이 때 발표되었다. 1. 건국정신을 선양한다 (建国精神を顕揚し) 2. 민족협화를 실현한다 (民族協和を実現し) 3. 국민생활을 향상한다 (国民生活を向上し) 4. 선덕달성을 철저히 한다 (宣徳達情を徹底し) 5. 국민동원을 완성한다 (国民動員を完成し) 정식 정부 기관이나 정당 단체는 아니었지만, 만주국 황제 [[선통제|푸이]]가 명예회장에 추대되어 정부 조직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는 단체임을 과시했다. 이외에도 만주국 내에 거주하던 [[만주족]], [[한족|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등이 이 단체의 하부 단체장이나 고문, 이사 등으로 영입되었다. 하지만 단체의 실권은 일본인, 특히 [[관동군]]의 고위 장교들에게 주어져 있어서 사실상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이기도 했다. 다만 드러내놓고 일본이랑 [[일본군]]이 [[킹왕짱]]이라고 나대면 다른 피지배 민족들의 시선이 영 좋지 않았을 것을 분명히 예상했기 때문에, 일단 민주적인 정부 기구를 모방해 지역별로 연합협의회를 만들어 지역 유지나 관료들과 협력하거나 중앙연합회의 같은 의결권이 주어진 조직을 만드는 등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정치 조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위장술과 더불어 만주국 내의 항일·항만 비밀결사나 무장단체들에 대한 회유나 포섭, 와해를 꾀하는 스파이 조직을 휘하에 두어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들에 의해 반정부 조직이 발견된 마을의 경우 해당 조직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도 연대 책임을 묻는 [[연좌제]] 등 가혹한 탄압 방식이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운동의 중심지가 만주에서 [[연해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오족협화를 홍보하기 위해 만주영화회사나 신징음악원, 백계 [[러시아인]]들이 결성한 교향악단이나 오페라단의 운영과 활동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만주국의 일본인 실권자들이나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도 협화회의 발언권과 영향력 강화를 고깝게 보는 이들이 많았고, 결국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관동군의 군정 체제와 일본 정부의 영향력 확대 등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표면상으로 오족협화를 추구한 단체였기 때문에, 이 단체에 관여했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인증을 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최남선]]과 [[윤상필]], [[이범익]], [[이선근]] 등이 대표적인 협화회 회원들이었고, 관동군 참모부 소속 장교였던 윤상필은 본부이사까지 역임했다. 물론 여기에 협력한 조선인 외의 다른 민족 인사들도 대부분 전후 [[소련군]] 군정이나 국민당 정부, 중국공산당 정부 등에 의해 친일 부역자로 단죄되었다. 일본의 [[극우]] 인사들 중에서는 이 단체가 고도의 군국주의 홍보 단체임을 인정하면서도, 협화회 내에서 비일본인들의 권리를 옹호한 몇몇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나름대로 민주적인 단체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온건파들 조차 일본인이 만주국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으며, 다른 민족들의 [[현시창]]이었던 생활이나 대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주도로 1940년 10월 12일에 이 협화회의 조직과 이념을 모방해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를 창립했다. 이 단체는 그래도 겉으로나마 뭔가 평화와 화합을 추구한 듯이 보였던 협화회와 달리 대놓고 군국주의 [[우왕ㅋ굳ㅋ]]을 내건 관제 단체였고, 협화회가 그랬던 것처럼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면서 군부의 영향력 밑에 [[떡실신]]했다. [[분류:만주국]][[분류:유사 파시즘 정당]][[분류:왕당파 정당]][[분류:일본 제국의 역사]][[분류:과거의 독재정당]][[분류:중화민국의 없어진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