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 TCG 《매직 더 개더링》의 2002년 확장판, rd1=Onslaught)] [include(틀:송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e8b57 0%, #2e8b57 0%, #2e8b57 80%, #2e8b57)" '''{{{#ece5b6 {{{+1 남송의 명장[br]이충안왕(利忠安王)[br]{{{+1 孟珙 | 맹공}}}}}}}}}'''}}} || || '''{{{#ece5b6 시호}}}''' ||충안(忠安)[* 충양이라는 시호가 하나 더있긴 하지만 대표적인 시호는 충안이다.] || || '''{{{#ece5b6 작위}}}''' ||이왕(利王) || || '''{{{#ece5b6 성}}}''' ||맹(孟)|| || '''{{{#ece5b6 이름}}}''' ||공(珙) || || '''[[자|{{{#ece5b6 자}}}]]''' ||박옥(璞玉) || || '''{{{#ebe5b6 호}}}''' ||무암거사(無庵居士) || || '''{{{#ece5b6 생몰연대}}}''' ||1195년 ~ 1246년 || || '''{{{#ece5b6 출신}}}''' ||수주군(隨州軍) 조양현(棗陽縣) || || '''{{{#ece5b6 부친}}}''' ||맹종정(孟宗政) || || '''{{{#ece5b6 조부}}}''' ||맹림(孟琳)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의 [[명장]]. [[악비]], [[한세충]], [[오린(북송)|오린]]과 함께 송을 대표하는 무장이자 동시에 '''[[송나라]] 최후의 명장.''' 원적은 송나라 강주(絳州)이며 수주군(隨州軍) 조양현(棗陽縣) 출신이다. 자는 박옥(璞玉)이고 호는 무암거사(無庵居士)며 시호는 충양(忠襄) 또는 충안(忠安)이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최종 작위는 이왕(利王)이다. [[악비]]의 부하로 활약한 맹안의 증손, 악가군의 일원이었던 맹림의 손자이며, 일종의 사병인 충순군(忠順軍)을 이끌던 맹종정의 아들이다. == 생애 == === 젊은 시절 === 대대로 무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맹종정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훈을 세운 명장이었다. 맹공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잘 남아있지 않은 편이나, 일찍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격술에 능해서 적장을 쏘아 죽이는 일화가 여럿 있을 정도로 무예가 관우, 장비 못지 않았다고 한다. 1217년 금나라가 늘 그래왔듯이 남송을 침공하였으나 맹종정과 호재흥, 가섭이 양양과 조양 등지에서 이를 막아내었다. 이 때 맹공은 호재흥의 지원을 받아 적군에게 둘러싸인 아버지를 보고 기병과 함께 돌격해서 구해냈다고 한다. 사실 송나라에서 전문 무관은 장래적으로는 불우한 처지였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재상이 될 수 없는게 송나라 조정의 관례였기 때문. 그러거나 말거나 맹공은 스스로 장수처럼 행동하기보다는 되려 [[도인]]처럼 행동했는데, 본인을 스스로 무암거사(無庵居士)라고 칭하고 진영을 세웠다가 이를 거둘 때는 늘 그 자리를 치우고 향을 피웠다. 재물도 싫어했고 여자도 멀리했고, 심지어 식사 마저도 정말 간소하게 먹던,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모를 대단히 정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맹종정은 양양과 조양 지역의 군사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화북 지방에서 흘러온 유민들을 모아 충순군이라는 부대를 따로 조직하였고, 맹공이 맹종정의 뒤를 이으면서 2만 명이 넘는 이 병력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맹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군벌이 될 낌세가 보인다고 우려가 많았겠지만, 맹공이 워낙 고승같은 삶을 사는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다. === [[금나라]]와의 전쟁 === 1219년 [[금나라]]의 완안와가가 대군을 이끌고 조양을 공격해 오나 참패하여 물러났다. 맹공이 이 때 성 위에서 여러 명을 활로 쏴 죽이고 부친에게서 군사를 받아 적을 격파하여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1221년 광화현의 현위로 임명되어 정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군인으로만 대우받았고, 조정에서의 입지는 별로 없었다. 1223년 아버지 맹종정이 사망하여 3년동안 장례식을 치른뒤 맹공이 충순군을 물려받고 여타 유민들까지 합쳐 둔전을 시행하였으며, 그 와중에도 착착 승진을 해 나간다. [[금나라]]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나라]]와 [[남송]]의 경제력 차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비등하다 보니 금나라는 어떻게든 남송을 삥뜯어서 국력을 보충해야겠다는 발상으로 몽골에게 맞으면서도 계속 남송을 공격하였다. 금나라는 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패하고, 개봉에서 몽골군을 막아내었으나 버틸 수 없게 되자 채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금애종은 [[무선(금나라)|무선]]에게 근황의 명을 내렸고, 무선은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 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맹공은 이를 수 차례 격파하고 항복하는 자들은 잘 대우해 주어서 선무공작까지 잘 해냄으로써, 무선군이 복멸당하게 되었다.[* 무선은 대패한 뒤 도망쳤고, 금이 망하자 결국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는다.] 한편으로는 유민들을 받아 둔전에 포함시키고 군사력을 확충한다. 무선군은 전멸당했으나 금의 잔존 전투력은 완강했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금나라]] 애종은 남송에 화친과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남송은 이 때야말로 복수할 기회라고 여겨 몽골과 손을 잡고 금나라를 공격한다. 맹공은 [[금나라]]의 최후를 알린 채주 전투에 참전했다고 하며, 중국측 자료에서는 이때 몽골측 사령관이었던 타차르와 의형제까지 맺었고, 장유[* 양양 공방전에 참전하고, 애산 전투에 참전해 남송 정권을 멸망시키는 장홍범의 아버지이다.]와 동료였다고 한다.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 말제(완안승린)의 사후 애종의 머리는 맹공이 칼로 잘라 [[이종(송)|송이종]]에게 바친다. 거듭된 승전으로 맹공은 수도 임안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송 이종에게 극찬을 받는다. >송 이종: 그대는 명장의 아들로 충성스럽고 또 근면성실해 금나라를 멸했으니 공적이 뚜렷하오. >맹공: 이는 모두 폐하의 공인데 신이 어인 힘이 있었겠사옵니까? 이후 송 이종이 맹공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맹공은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폐하께옵서 백성의 힘을 부유하게 하시고 인재를 축적하시며 때를 기다리시길 바라옵니다. === [[단평의 입락]]과 [[몽골 제국]]과의 전쟁 ===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남송 중앙 정부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여론이 우세해졌고, 맹공은 반대파[* 찬성파는 적극론자들이였고 반대파는 신중론자들이었다.]였지만 명령을 따라 일부 공세를 지휘했다. 하지만 곧 반격에 물러나야 했다. 이에 이종이 맹공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맹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일개 무사로서 싸움을 말할지언정 화의를 말할 수는 없사옵니다. 몽골 제국은 1235년 쿠릴타이를 열고 남송을 멸망시킬 것을 결의하고 이를 목적으로 3군을 편성하여 전면적으로 침공한다.[* 이 때 4군은 [[고려]]를 [[여몽전쟁|침공했다]].] 이것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사천성, 동쪽으로는 지금의 황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고 몽골 제국이 남송을 멸하기 위해 작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몽골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같은 해 10월 사천의 성도가 함락됐고[* [[조우문]]이 양평관에서 몽골군에 맞섰으나, 끝내 패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적장이었던 왕세현의 극찬을 받았다.] 이듬해인 1236년 3월에는 금나라 앞에서 [[우주방어]]를 자랑하던 [[양양 공방전|양양]]도 함락되고 다음해인 1237년에는 맹공이 주둔중인 호북성 황주(黃州, 현 [[황강시]])까지 공격받았다. 이에 맹공은 우선 1236년 강릉[* 여담이지만 강릉은 맹공의 부하명장 [[왕견]]이 태어난곳 이기도 하다.] 전투에서는 허장성세와 기습을 동원해 몽골군을 물리쳤으며, 1237년 황주 방어전에서는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주방어는 물론이고 적 선단을 불사르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포위망을 뚫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 때 몽골군은 화포도 동원하였지만 성루 밖에는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곧 맹공은 전선의 3분의 2를 총괄하는 직책에 올랐고 1238년부터 공세에 나섰다. 각 방면의 지대장들이 연거푸 승리를 거두어 몽골군이 느슨해지자 맹공은 1239년 몽골군이 중시하지 않고 내버려둔 양양을 탈환하여 우주방어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240년에는 한때는 그의 동료였지만 이제는 몽골군의 대장이 된 장유[* 남송을 멸망시키는 [[장홍범]]의 아버지이다.]가 그의 방식을 흉내내며 공세를 준비하자 선제공격으로 몽골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패퇴시켰다. (등양 전투) 형주를 비롯한 중부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맹공은 서쪽으로 가서 사천 탈환과 방위에 진력했다.[* 사천 지역은 남송 정권의 세금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이 때 [[왕세현]]이 사천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맹공의 형제들도 휘하 장수로서 참여하였다. 맹공과 형제들은 역시 이번에도 우주방어를 펼치며 몽골군의 취약점을 찔러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대오채 전투) 1241년 [[오고타이 칸]]의 죽음과 함께 1차 송몽전쟁이 끝나자, 맹공은 몽골이 신경을 못 쓰는 틈을 타서 일부 지역을 추가로 되찾고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방어선을 탄탄히 다졌으며 형양(荊襄)에 진을 치고서 중원을 회복하는 일을 임무로 삼았다. 영무군절도사와 사천선무사 겸 기주지주(夔州知州)를 겸하고, 한동군후(漢東郡侯)에 봉해졌으며, 경호안무제치사(京湖安撫制置使)를 지냈으며, 나중에는 이왕(利王)의 왕호를 받았다. 또한, 몽골에 귀순한 남송의 무장들도 다시 받아들였다. 이렇게 맹공의 권한이 높아지니 맹공의 지나친 군권에 송나라 조정에서는 불안감을 느끼고 견제를 하려 했다. 하남을 지키던 범용길이 남송에 투항하려 하나, 송 황실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남송 황실은 범용길이 믿을 수 없다는 핑계로 이를 기각하였고 맹공은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30여년간 중원 사람들을 수습하였는데 지금은 그 지향은 오히려 다시 펼치기 부족하구나. 이에 맹공은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내었다. === 말년과 평가 === 소련의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박사는 맹공을 나치의 '''[[만슈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동방어의 대가라고 보았다. 일본에서도 평이 좋아 [[메이지 유신]] 때 편찬된 『통속송원군담』이라는 책에서는 맹공의 충의와 병략은 악비에 못지 않다고 평가했다. 맹공은 50세 정도의 이른 나이에 강릉(江陵) 치소에서 병사하나, 그가 확립시킨 방어선과 전술들은 한동안 남았다. 그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발생한 엄청나게 많은 유민들을 이용해 광대한 [[둔전]]을 개척하고 수리 사업을 실시, [[강릉]]과 [[사천]] 등지에서 몽골군을 막고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이르렀는데 그의 사후로도 남송이 30년 간 더 버티는데 일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형제들과 아들 맹지경(孟之經)도 무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주역]]에도 뛰어났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문무겸비의 명장이었다. 저서에 '경심역찬(警心易贊)'이 있다. 사후 그에게 충안과 충양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인품은 스스로를 무암거사라 칭했듯이 검소하고 청렴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황제가 의견을 묻자 본인은 사실 의견이 다르지만 무난하고 모범적인 대답으로 잘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장 천시와 모함이 일상이었던 송나라에서 사임하기 전까지 직책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승진까지 했다는 점에서 처세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단, 군기만큼은 엄정히 유지했고 멋대로 직무를 이탈하면 참수했다. 그럼에도 그는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면모를 보여 존경을 받았다. 당대 최강이라던 [[몽골 제국]]의 주력 부대를 방어전 뿐 아니라 야전에서도 여러 차례 격파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한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남송-원 전쟁이 다른 몽골제국의 전쟁에 비해선 부각이 잘 되지 않았는데다가 그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고 총사령관이라 직접 나서지 않은 전투도 있다보니 여러모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장군이다.[* 예를 들어, 일본 [[코에이]]의 턴제 게임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 시나리오 3(1229)에서 맹공이 구현되지 않았다. 게임상에서 맹공이 남송 장수로 나왔다면 [[금나라]]의 [[완안진화상]]처럼 위기에 처한 남송의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남송이 [[아인잘루트 전투|이집트]]나 [[쩐흥다오|베트남]]처럼 버텼으면 몰라도, 결국 멸망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 기타 == 광서 지역의 방비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는 광서 지역에 병사를 주둔시키는 대신 현지인을 차출해 지키는 것이 낫다면서 이를 통해 광서 지역을 방어하고자 했다.[* 나중에 [[여문덕]]이 이 전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맹공 사후, [[우량카다이]][* [[수부타이]]의 아들이자 [[아술]]의 아버지이다.]가 운남의 [[대리국]]을 멸망시킨 후 대월을 공격한 뒤 이 곳을 통해 담주(오늘날 후난성 창사시)를 거쳐 북진하였다. 양양 지역의 방어를 중시하였다. 맹공이 몽골군으로부터 양양을 수복하였을 때, 손오 최후의 명장 [[육항]]의 말을 인용하여 양양 지역의 중요성[* 양양 지역은 일찍이 [[남송]]을 비롯한 남방 정권에 있어 요충지였다. [[사미원]]의 조카였던 [[사숭지]]도 일찍이 양번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경호제치사로 부임해 양양 지역을 효율적으로 경영하였다고 한다.]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그의 수하에는 유명한 무장들이 많았다. 왕견과 [[유정(원나라)|유정]], [[이정지]]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인데, 먼저 [[왕견]]은 1259년 합주의 조어성에서 몽케 칸의 군대를 막아냈고, 유정도 맹공 수하에서 많은 활약을 했으나 나중에 1261년 [[여문덕]]의 무시 및 암해를 받고,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몽골에 노주를 바치며 투항했다.[* 유정의 투항으로 인해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노주는 1262년 여문덕이 수복하지만 이는 남송 정권에 있어 큰 손실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정지는 1241년부터 맹공의 수하로 활동했는데, 그는 맹공 사후 [[이단(원나라)|이단]]의 군대를 막아내는 등 양회 전선에서 활약하였고 이후 [[양양 공방전]]에도 참여하나 실패하고 파직당한다. 이후 1276년 남송 조정이 투항한 데 이어 회서를 지키던 [[하귀]]가 원에 투항했음에도 양주 지역에서 [[강재(남송)|강재]]와 함께 항복을 요구하는 원의 사신을 죽이는 등 원나라의 군대와 양주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장렬한 전쟁을 벌였으나, 부하 장수의 배신으로 인해 원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남송 최후의 권신 [[가사도]]가 맹공이 죽기 한해 전 맹공에게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1245년 가사도가 연강제치부사, 지강주 겸 강서안무사로 재직하던 시절 맹공이 가사도가 인재라는 것을 알고 당시 황제였던 송 이종에게 가사도를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대사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맹공의 휘하였던 이정지를 가사도에게 추천하였고, 가사도는 [[정강의 변]] 당시 훌륭한 변설을 하였던 진회 못지 않았다고 한다.[* "송사" '맹공전'에 이 사실이 나와 있다.] 이후 가사도는 1259년 [[악주 전투]]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악주성 주위에 목책을 쌓았다.], 쿠빌라이의 칭찬을 받았고 나중에 염희헌이 쿠빌라이에게 [[악주 전투]] 당시 쿠빌라이가 신료들에게 가사도 같은 인재를 어찌하면 장수로 얻어 쓸 수 있겠는지 말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송나라/인물]][[분류:샹양시 출신 인물]][[분류:1195년 출생]][[분류:1246년 사망]][[분류:송나라의 추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