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br]{{{+1 루이제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아말리}}}[br]Luise zu Mecklenburg-Strelitz'''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uise_of_Mecklenburg-Strelitz.png|width=100%]]}}} || || '''이름''' ||루이제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아말리[br](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 || || '''출생''' ||[[1776년]] [[3월 10일]][br][[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 || '''사망''' ||[[1810년]] [[7월 19일]] (향년 34세)[br][[프로이센 왕국]] 호엔치리츠 성 || || '''배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3년 결혼),, || ||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샤를로테]], 프레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알브레히트|알브레히트]] || || '''아버지''' ||[[카를 2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 ||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 ''' 형제'''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카를, 테레즈,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프리데리케]], [[게오르크(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테 알베르티네, 카를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프로이센의 루이제 왕비.jpg|height=500]] [[카를 2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의 넷째 딸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 == 생애 == [[1776년]] [[3월 10일]] [[하노버 왕국|하노버]]에서 [[카를 2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와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의 여섯째 아이이자 넷째 딸로 태어났다.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부부.jpg|width=500]] 179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결혼해 9명의[* 사산된 아이까지 합치면 10명(5남 5녀)이다.]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루이제 왕비는 당차고 엄청난 [[미녀]]로 유명해서 프로이센 왕국의 백성들과 신하들 사이에서 남편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미모뿐만 아니라 키도 160대 후반의 장신이기까지 해서 168cm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과 비슷했다. 아름답고 친절한데다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한 루이제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여성상이었다.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문란하고 가정에서 개막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아버지]]와는 달리 가정적이고 부부 사이도 좋아서 루이제는 당대 왕비들 중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남편이 즉위한 후, 루이제는 원로 장관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많은 국정 사안을 루이제와 논의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버지의 외교 정책에 따라 [[프랑스 제1공화국]]과의 분쟁 초기에 중립을 선호했다. 루이제는 이 견해를 지지하며, 만약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의 연합국 편을 든다면, 군사적 지원을 위해 후자의 힘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프로이센이 강대국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동맹의 결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랑스의 침략은 왕이 결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와 연합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루이즈 왕비와 그의 장관들의 많은 다른 의견들을 상담했고, 결국 최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파일:1807년 나폴레옹과 루이제 왕비.jpg|width=500]] 이런 루이제 왕비의 명성 때문에 웃지못할 일화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독일·폴란드 원정|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탈탈 털린 뒤]] [[틸지트 조약|평화협상으로 영토의 절반 이상과 과중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매력넘치는 유능한 루이제 왕비 를 협상단 대표로 보냈다. 나폴레옹도 루이제의 우아함과 결단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구사항은 칼같이 관철시켜서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려는 루이제 왕비의 노력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자녀들.jpg|width=500]] 나폴레옹 전쟁 도중에도 프로이센의 왕비로서 국가를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고, 힘들어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했다. [[파일:루이제 왕비 사망 당시 모습 석관.jpg|width=500]]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동프로이센]]의 [[메멜]]까지 피신하는 등, 고생한 여파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부검 결과 폐 중 하나가 파괴되었고 심장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1814년 8월 3일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죽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루이제 훈장'을 제정했다.[[https://de.m.wikipedia.org/wiki/Louisenorden|훈장의 모습]] 루이제 훈장은 1918년까지 독일 최고의 여성 훈장이었다. 1920년대에 보수적인 독일 여성들이 퀸 루이제 리그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부터 딱 60년 뒤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국]] 사이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남 [[빌헬름 1세]]가 다스리는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여 [[보나파르트 왕조]]의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복수해줬다. 빌헬름 1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졌고,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고 이듬해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1871년 3월 17일에 빌헬름 1세는 다시 베를린에 있는 어머니의 묘를 찾았다. == 평가와 인기 == >'''나의 아름다운 적.'''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왕]]은 최고의 장관을 잃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국가의 미덕의 영혼''' >'''프로이센 민족주의의 의인화''' 루이제 왕비는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여성이였다. 루이제 왕비는 역사, 독일어 및 종교뿐만 아니라 수학과 지리에서도 학습, 읽기 및 교화 자료로 거의 모든 곳에서 언급되었다. 애국적인 기념식은 루이제 왕비와의 유대감을 롤모델로 삼아 더욱 깊어졌다. 점차적으로 루이제 왕비의 숭배의 모성적 측면은 프로이센 왕국의 발전과 독일 제국의 건국 과정에서 그녀의 아들들이 한 역할에 상응하여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 이후 루이제의 생애와 업적은 없어서는 안 될 제국의 건국신화로 체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정이 폐지되고 들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인기는 많았지만 국가에서 숭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래도 독일 국민당과 왕비 루이제 연맹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정치단체 에서 역할 모델로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여성의 모성애적 이미지보다 남성의 강인함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개념과는 맞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또다시 독일이 패한 이후 1947년 연합국은 프로이센을 완전히 해체했다. 1970년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에 대해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대에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왕비 중 하나다. == 어록 == >'''그이는 모든 점에서 날 기쁘게 해주고, 나 역시 그를 기쁘게 하죠. 우리는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 가족관계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br]{{{-2 (Friedrich Wilhelm IV)}}} ||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3녀.] || || '''2남''' || [[빌헬름 1세]][br]{{{-2 (Wilhelm I)}}} ||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파벨 1세]]의 외손녀(3녀 [[마리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6)|마리야 파블로브나]]의 차녀)다. 사위 [[니콜라이 1세]]의 외조카(마리야가 니콜라이의 누나)이기도 하다.][br]슬하 1남 1녀[*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루이제 마리 엘리사베트|바덴의 대공비 루이제]] ] || || '''1녀'''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br]{{{-2 (Alexandra Feodorovna, Empress of Russia)}}} || [[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니콜라이 1세]][br]슬하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19)|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1822)|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 || '''2녀''' || 프리데리케 공주[br]{{{-2 (Princess Frederica)}}} || [[1799년]] [[10월 14일]] || [[1800년]] [[3월 30일]] || || || '''3남''' || 카를 왕자[br]{{{-2 (Prince Charles)}}} || [[1801년]] [[6월 29일]] || [[1883년]] [[1월 21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마리[* 위에서 나온 빌헬름 1세의 아내 아우구스타의 언니다. 즉, [[겹사돈]].][br]슬하 1남 2녀[*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프리드리히 카를 왕자]] 등.] || || '''3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알렉산드리네[br]{{{-2 (Alexandrine,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 [[1803년]] [[2월 23일]] || [[1892년]] [[4월 21일]] || [[파울 프리드리히|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 [[파벨 1세]]의 외손자(차녀 [[옐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옐레나 파블로브나]]의 아들)다.][br]슬하 2남 4녀[*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등.] || || '''4남''' || 페르디난트 왕자[br]{{{-2 (Prince Ferdinand)}}} || [[1804년]] [[12월 13일]] || [[1806년]] [[4월 1일]] || || || '''4녀''' ||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비 루이제[br]{{{-2 (Louise, Princess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 [[1808년]] [[2월 1일]] || [[1870년]] [[12월 6일]] ||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br]슬하 2남 2녀[* [[네덜란드의 루이제|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제]] 등.] || ||<|2> '''5남''' ||<|2>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알브레히트|알브레히트 왕자]][br]{{{-2 (Prince Albert)}}} ||<|2> [[1809년]] [[10월 4일]] ||<|2> [[1872년]] [[10월 14일]] || 네덜란드의 마리아너[* 1830년 결혼 / 1849년 이혼][br]슬하 1남 3녀 || || 로잘리 폰 라우흐,,(1853년 결혼),,[* [[귀천상혼]]이다.][br]슬하 2남 || == 기타 ==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데리케 왕비의 석상.jpg|width=500]] * 루이제와 그녀의 여동생 프리데리케의 석상.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는 형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동생 루트비히 카를 왕자와 결혼하며 겹사돈을 맺었고 고모인 [[조피 샤를로테|샬럿 왕비]]와 언니 루이제처럼 자녀를 많이 낳았다. 다만 3번 결혼했고 세번째 결혼상대가 하노버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 아들 [[게오르크 5세]]는 [[빌헬름 1세]]의 이종사촌동생이다. * 고모가 [[조지 3세]]의 왕비인 [[조피 샤를로테|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라, 한때 루이제와 여동생은 샬럿의 장남인 왕세자 [[조지 4세]]의 아내로 고려되었다. 근데 조지는 루이제의 얼굴도 안 보고 혼담을 걷어차버렸다. 조지 4세의 막장성(...)을 고려하면 오히려 고마운 일. * [[니콜라이 1세]]의 황후가 된 장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는 어머니 루이제를 닮아 미녀로 유명했다. 니콜라이 1세와 금슬이 좋아 많은 자녀들을 낳은 것도 비슷하다. 다만 루이제의 허약한 체질도 물려받아서 샤를로테는 추운 러시아 기후 속에서 고생을 자주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version=61)] [[분류:프로이센 왕비]][[분류:호엔촐레른 가문]][[분류: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분류:1776년 출생]][[분류:1810년 사망]][[분류:샤를로텐부르크 성 안장자]][[분류:하노버 출신 인물]][[분류:프로이센의 왕세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