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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00,#ddd 명나라-여진 관계 관련 틀}}}''' || ||<-7><:><#fff,#2d2f34>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중국의 역사)] [include(틀:명나라의 대외관계)] [include(틀:여진의 대외관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와 [[여진족]]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 및 [[시진핑]]의 신중화민족주의 사상하에서 명나라 초기부터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전역이 명나라의 영토였다는 근거없는 역사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 역사적 관계 == === 명나라-여진족 관계 === [[https://i.namu.wiki/i/o9UVY-E2zNqkvGabzloX-ZWOcpwac0EZrV5hrZs7BLx7fSO2E3K4ys2slYJjsgU08MsvqAVqy4iV_heVFiIsAuz6cYqeFwZAkaEDRe9HuwIWfeKgy148b-2pxJ8ZnMTsV-Xbd6ny__fLO_h3jvMM-w.webp]]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여진 및 [[우량카이]]의 지배를 위해 '''요동도지휘사사''', '''대녕도지휘사사'''를 만주 지역에 설치했으며, [[명성조|성조 영락제]] 시기 '''누르칸도지휘사사'''를 설치하여 [[기미]]제와 위소제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관리, 통제했다.[* 종종 보여지는 명나라 초기부터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까지 이르는 전역이 명나라의 영토였다는 [[크고 아름다운]] 명나라 지도는 이 명목적인 관할권을 모두 다 명나라의 직속 영토로 싸잡아넣은 지도이다.] 실제로는 요동도사만이 명나라 직속령으로써 군사 기능을 할 수 있었고, 대녕도사나 누르칸도사는 책봉의 기구로만 적용하여 곧 축소되었다.[* [[만주]] 지역에 한족들이 대거 이주하는 시점은 청나라 조정에서 1870년대 간쑤성 산시성 대기근으로 인한 부담을 덜고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족들을 대량으로 이주시킨 '''[[틈관동]]'''이 기원이다.] [[4군 6진]] 개척 이후에도 초기 명나라와 조선은 여진족때문에 서로 간의 국경을 좁히지 못했다가 전기 이후에야 국토를 접하게 된다.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여진족들은 누르하치에 의한 통일 이전,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명나라에 우호적인 부족들은 채집한 [[인삼]]을 명나라에 비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었고,[* 당시 여진족들은 주로 반농반렵 생활을 했고, 몽골처럼 명나라에 정기적으로 [[토목의 변|대규모 마시장을 여는 상황]]도 아니라서 산에서 채집하는 [[산삼]] 외에는 경쟁력 있는 수출 상품이 부족했다.] 명나라에 적대적인 부족들은 예방 전쟁 차원에서 명군과 조선군의 협공을 받았다. 명나라의 주적은 북쪽의 [[몽골]]이었지만 여진족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명나라 군대는 적군의 [[수급]]을 가져올 때 [[몽골족]]의 수급은 1급, 여진족과 티베트족의 수급은 2급, 남방의 [[소수민족]]과 [[왜구]]는 3급, 한족 반란군은 4급으로 나누어 포상했을 정도로 여진족을 크게 경계했다. === 명나라-[[후금]] 관계 === 친명파 여진족의 수장이던 [[누르하치]]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의 오발 사고로 사망하자 이를 명나라가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반명 운동을 준비하며 세력을 키웠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한 예방전쟁을 벌이지 못한 틈을 이용하여 [[여진어]]를 사용하는 각 부족들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부족이 친명파 부족이었던 예허부(엽혁부)를 제외한 나머지 여진 부족들을 전부 통일하고, 마지막 통일을 위해서 예허부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조선의 동맹군 및 예허부 포함 17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하여 누르하치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장수들은 서로 공을 탐내서 협조하지 않고 각개 공격을 하다 [[사르후 전투|사르후 대전]] 등에서 대패했으며 이를 계기로 여진족들의 위상 및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사르후 대전 대패 이후 명나라는 [[웅정필]]이란 장수에게 군대를 주어 후금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웅정필은 [[위충현]]에게 모함을 당해 파직당하고 여진족들은 이를 계기로 다시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였다. 판단 미스를 파악한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복직시켰으나 웅정필은 이번에는 여진족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웅정필이 처형당한 이후, [[원숭환]]이 성벽과 대포를 이용하여 '''[[영원성 전투|영원 대전]]'''과 '''영금 대전'''에서 후금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전임자와 비슷하게 '''기사의 변''' 이후 모함을 당해 처형당했다. 명나라는 압도적인 경제력과 국력을 가지고도 후금군에게 어이없이 [[송산 전투|송금 대전]] 등에서 대패를 반복했고, 후금은 한족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으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 [[청나라]]와 오삼계 ===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청나라와 대립하던 명나라는 1644년에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당해 멸망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오삼계의 친지들을 사로잡아 위협하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했다. 오삼계와 청나라의 연합군은 '''일편석 대전'''에서 순군을 대파하고, 이자성이 건국한 [[대순]]을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입경했다. 이후 청나라에 대항해 [[남명]]이 들어섰지만, 남명 역시 내분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정성공]]이 세운 [[동녕 왕국]], 즉 동녕국은 1683년까지 존재하다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 관련 사건 == * [[이자성의 난]] * [[사르후 전투]] * [[영원성 전투]] * [[송산 전투]] * [[삼번의 난]] == 같이 보기 == * [[명청교체기]] * [[조선구마사/논란 및 사건 사고/고증 오류 및 역사 왜곡]] [[분류:명청시대]][[분류:청나라의 역사]][[분류:전근대 중화권의 외교]][[분류:과거의 외교 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