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원위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3 0%, #DC143C 20%, #DC143C 80%, #9C0013); color: #ece5b6" '''북위 제2대 황제[br]{{{+1 태종 명원황제 | 太宗 明元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운강19굴.webp|width=100%]]}}} || ||<-2> {{{#ece5b6 {{{-2 윈강 석굴 19굴[* [[윈강 석굴]]의 대불이 그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도 불교였고, [[남북조 시대]] 내에서도 가장 불교를 숭배한 국가가 [[북위]]였으니 그럴 법하다.]}}} }}} || ||<|2> '''출생''' ||[[392년]] || ||[[북위]] [[산시성(산서성)|대군]] [[다퉁시|평성]] 황궁 운중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시]]) || ||<|2> '''즉위''' ||[[409년]] [[11월 10일]] || ||[[북위]] [[산시성(산서성)|대군]] [[다퉁시|평성]] 황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시]]) || ||<|2> '''사망''' ||[[423년]] [[12월 24일]] (향년 31세) || ||[[북위]] [[산시성(산서성)|대군]] [[다퉁시|평성]] 황궁 서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시]]) || || '''능묘''' ||운중금릉(雲中金陵) || ||<|4> '''재위기간''' ||'''{{{#ece5b6 북위 황태자}}}''' || ||[[409년]] ~ [[409년]] [[10월 10일]] || ||'''{{{#ece5b6 제2대 황제}}}''' || ||[[409년]] [[11월 10일]] ~ [[423년]] [[12월 2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탁발부|탁발(拓跋)]] || || '''휘''' ||사(嗣) || || '''부모''' ||부황 [[탁발규|태조]][br]모후 선목황후 || || '''형제자매''' ||10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명원황후, 소애황후, 원밀황후 || || '''자녀''' ||7남 4녀 || || '''종교''' ||[[불교]] || || '''자''' ||목말(木末) || || '''작호''' ||제왕(齊王) || || '''묘호''' ||'''[[태종]](太宗)''' || || '''시호''' ||명원황제(明元皇帝) || || '''연호''' ||영흥(永興, [[409년]] ~ [[413년]])[br]신서(神瑞, [[414년]] ~ [[416년]])[br]태상(泰常, [[416년]] ~ [[423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위]]의 제2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명원제(明元帝)였다. 휘는 탁발사(拓跋嗣)였으며, 북위를 건국한 태조 도무제 [[탁발규]]의 아들로, 이복동생인 [[탁발소]]가 탁발규를 살해하고 황위 찬탈을 시도하자 이를 진압하여 탁발소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 생애 == 탁발사는 북위를 건국한 초대 황제인 [[도무제]] 탁발규와 황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제 즉위 전에는 제왕(濟王)이라는 작위에 봉해졌다가 [[상국]](相國)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인 탁발규가 한식산 중독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중, 자신이 죽고 나서 외척이 발호할 것을 염려하여 탁발사의 어머니인 황후 유씨를 죽이자 이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출궁하고 말았다. 탁발규는 탁발사의 어머니를 죽인 뒤 탁발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나라]]의 [[무제(전한)|무제]]가 장차 자신의 아들을 세우고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부인이 훗날 국정에 관여하여 외척들이 정치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네가 응당 황통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한나라의 무제를 본받아 오랫동안 이를 고려했다. 409년 10월, 결국 미쳐버린 탁발규가 또 다른 부인인 하란비마저 죽이려다가 그녀의 소생인 [[탁발소]](拓跋紹)에 의해 목숨을 잃자, 환궁하여 탁발소와 하란비 등을 제거한 후 마침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북위의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422년 남조 [[유송]]의 창업군주인 [[유유(송무제)|유유]]가 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조를 공격해 많은 성을 함락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해 성을 축조하여 방어에 전념했다. 423년 11월, 향년 3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북위 초기의 황제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병사했지만 장수하지 못했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명원황제(明元皇帝)로, 오늘날에는 흔히 북위 명원제라고 불린다. 기이하게도 탁발사는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인 황후 유씨를 죽여버린 아버지 탁발규에게 반발하여 궁에서 가출한 전적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이 황제가 된 후에는 아버지와 같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마찬가지로 자신의 태자를 낳아준 황후의 목숨을 스스로 끊고야 말았다. 이후로 태자의 생모에게 죽음을 내리는 일은 한동안 북위 황실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를 오늘날에는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라고도 부른다.[* 이 관습은 [[한무제]]가 늘그막에 어린 태자 [[소제(전한)|유불릉]]의 어머니인 구익부인 조씨를 죽인 일에서 유래했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각주]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탁발선비]][[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392년 출생]][[분류:423년 사망]][[분류:다퉁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