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감사원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deded, #ededed 20%, #ededed 80%, #ededed)" '''[[심계원장|{{{#000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br]{{{#000 {{{+1 명제세}}}[br]明濟世 | Myeong Je-s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명제세.jpg|width=100%]]}}} || ||<|2> '''출생''' ||[[1885년]] [[2월 4일]] || ||[[평안도]] [[영변군|영변대도호부]] 무산방 망일리[br](現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망일리 77-8) || ||<|2> '''사망''' ||[[1964년]] [[1월 4일]] (향년 78세) ||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묘소''' ||[[재북인사릉]]|| || '''본관''' ||[[서촉 명씨]] [* 21세. 濟O 항렬.]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0&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ia&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ia_1863_1463&position=-1|#]]] || ||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및 초대 [[감사원장|심계원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5년 2월 4일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무산방 망일리(현 평안북도 녕변군 망일리)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조선에서 보내다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3년 만에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09년 이후부터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남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0년 이후 광복단에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박은식]](朴殷植) 등 30명과 선언서도 작성하였다. 항일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홍(趙宣弘) 등 30여 명과 같이 같은 해 4월 18일 [[중국]] [[톈진]](天津) 시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톈진불변단(天津不變團)을 조직, 항일투쟁의 구심점을 삼았다. 톈진불변단에서 단장 조선홍을 도와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그 해 8월 15일에 단장이 되었다. 톈진불변단의 실질적인 핵심 책임자로서 상해임시정부의 광복정책에 협조하였으며, 중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동양 시찰을 목적으로 [[중화민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고자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거주하였으며, 대한광복단원 [[한훈]]·김동순(金東淳)·윤익중(尹益重) 등과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주살을 계획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그 해 9월 22일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http://db.history.go.kr/id/ia_1863_1463|#]] || [[파일:70e25a13-6ae6-4c.png]] || || [[http://db.history.go.kr/id/ia_1863_1463|1920년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전·후면 ||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죄|강도]], [[살인예비음모죄|살인예비]],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공문서 위조, 공갈취재 미수, [[사기]] 등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19&evntId=0034974490&evntdowngbn=Y&indpnId=000000668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에서 나열한 혐의 중 공문서 위조와 공갈취재 미수 혐의를 제외한 나머지 6가지 혐의에 대해 징역 3년(미결 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19&evntId=0034974506&evntdowngbn=Y&indpnId=000000670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1926년 11월 29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046|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조직에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신간회]](新幹會)와의 합작 통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건국 및 통일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48년 9월 4일부터 1949년 11월 23일까지 초대 심계원장(審計院長)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명제세&ridx=0&tot=1124|출처]]]. 납북된 이후 삶은 별로 알려진 게 없으며,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게 전부이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에서는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서촉 명씨]][[분류:영변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1964년 사망]][[분류:납북자]][[분류:감사원장]][[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이승만 정부/인사]][[분류:재북인사릉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