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폴암]]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울 응암 출토 청동 투겁창.png|width=100%]]}}}|| || {{{#000,#fff {{{-1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출토 청동모.[br]초기 [[철기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모([[矛]]) 또는 투겁창은 동북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된 [[장병기]]로, [[창(무기)|창]]과 유사한 무기이다. 이 이름이 붙는 무기 중 유명한 것으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비]]의 [[장팔사모]]가 있다.[* [[관우]]가 실제로 쓴 무기도 [[청룡언월도]]가 아닌 모였을 것이다. 월도가 후한 시대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좁은 의미의 창과 마찬가지로 주로 적을 찌르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후대의 [[창(무기)|창]](槍)과 별다르지 않아 뚜렷한 구분점을 찾을 수가 없다. 국내에서 창은 칼처럼 슴베가 있어 날이 자루 안으로 들어가지만, 모(矛)는 날에 주머니처럼 달린 투겁식의 소켓에 나무 자루가 들어간다는 식으로 알려졌으나, 이것은 [[일본]]의 야리(槍)와 호코(矛)의 차이. 한국과 중국의 창이나 모는 소켓식, 슴베식이 둘다 존재하므로 정확한 구분이라 할 수 없다. 양자의 구분은 형태상의 특징보다는 시대와 용법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는 게 맞는다. 창은 주로 양손으로 사용하지만, 모는 대체로 방패와 함께 한손으로 사용한다. 모가 짧다는 말이 있지만 [[수]]나라의 모는 한 손으로 사용함에도 길이가 4.5 m, [[그리스]] [[아테네]]의 이피크라테스 군제개혁 당시의 한손창은 3.6 m 남짓했다. 이피크라테스 군제개혁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창대 길이를 늘리는 것이었다. 대체로 모와 [[방패]]의 조합에서 양손으로 쓰는 창으로 넘어가는 때는 7~13세기이다. 기병이 카우치드 랜스 전법과 등자의 보급 완료 등으로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양성 자체도 쉬워진 시기였다. 그 전까지 보조역할을 수행하던 기병이 전쟁에서 일약 주역으로 나서게 된 무렵이다. 보병이 방패를 버리고 창을 양손으로 쓰기 시작함은 기병의 전투력이 강해지자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에선 2세기 후반~4세기까지 경상도 지역에서는 판상철모라 하여 단면이 판상이고 날의 길이가 긴 철모가 많이 출토되는데, [[도검]]류 무기들 중 후대의 [[협도]]처럼 찌르기와 베기를 동시에 담당하는 장병기였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32107&cid=51293&categoryId=51293|참조:이뮤지엄]]) 또한 광형동모(廣形銅矛)라는 것도 있는데, 모처럼 생겼지만 날이 지나치게 넓고 얇아 실용성은 없는 구리 합금제 의례용 장식품으로 주로 일본에서 출토된다. 한반도에서는 일본과 자주 교류했던 김해, 고성 등 구 가야 지역에서 조금 출토된 바가 있다. 연발총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멧돼지]] 사냥용 창은 모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 관련 문서 == *[[무기 관련 정보]] *[[고대~근세기 무기]] *[[모순]][* 해당 고사성어의 모가 바로 이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