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고려양)] [목차] {{{+1 [[蒙]][[古]][[風]]}}} == 개요 == [[원 간섭기]]에 [[고려]]에서 유행했던 [[원나라]]([[몽골]])의 풍속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양]]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 설명 == [[http://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025r_0030_0080_0070|몽골은 고려에게 자기네 문화를 강요하지 않기로 협상했다.]] 그럼에도 몽골의 문화가 고려로 퍼져나간 주요한 경로는 당시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들, 몽골 황실에서 성장했던 [[왕자]]들[* 이 왕자들을 한자로 질자(質子)라고 부르며 [[몽골어]]로는 툴루게(禿魯花)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려 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 [[덕녕공주]], [[노국대장공주]]]을 통해 들어오거나 고려에서 실용적인 이유로 직접 수입하여 받아들인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찾자면 먼저 식생활에서는 [[알코올]]을 증류해서 빚는 [[소주]], [[소]]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서 만든 [[타락죽]]과 [[순대]] 등을 들 수 있다.[* [[순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순대가 몽골풍이라는 견해는 몽골의 [[전투식량]] 중 게데스라는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다. 게데스는 양의 피에 메밀가루, 야생 마늘, 부추를 넣고 소금을 섞어 간을 해 돼지 창자에 담아 솥에서 찐 음식이다.] 또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도 몽골풍 중 하나다. 의생활에서는 일부 남자들이 [[변발]][* 이것이 변형되어 조선시대 [[상투]]의 특징인 백호치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예장에서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 한복에서 허리띠를 대체하게 된 [[옷고름]], 무관들이 주로 입고 나중에는 사대부들도 널리 입게 된 [[철릭]]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번갑]]과 [[두정갑]]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과 [[환도(무기)|환도]]가 [[곡도]] 형태가 된 것도 이러한 몽골풍의 영향이었다. 언어생활에서는 당시 [[몽골어]]와 [[원나라]] 시대 [[중국어]]가 어원인 단어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임금님의 밥상을 부르는 [[수라]], 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치(赤)를 붙이던 것도 이 때부터다.[* 이렇게 어미에 -치를 붙이는 몽골어 방식은 고려시대의 인명에서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363년에 역적 [[김용(고려)|김용]]이 흥왕사에서 [[공민왕]] 암살을 시도했을 때 공민왕을 대피시키고 대신 죽음을 맞은 환관이 '[[안도치]]'라는 인물인데 한자로는 '安都赤'라고 쓴다. 여기서 赤은 몽골어 단어 '치'의 음차이므로, [[한국 한자음]]인 안도적이 아니라 안도치로 읽는 것이 옳다.][* 하필이면 赤이 '적' 음가도 아닌 '치' 음가를 옮기는데 쓰인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북방 중국어는 이미 [[근고한어]]로 이행하면서 입성(入聲) 운미가 약화하여 赤의 발음이 /t͡sʰiʔ/ 로 변했기에 그리 된 것이다. 실제로 파스파문자로 한자발음을 표기한 원대의 운서 '몽고자운'에서도 赤은 齒, 恥 등과 함께 't͡sʰi'로 분류되어 있다.] == 번외: 위구르풍 == 원나라는 몽골인 제일주의에 입각해 각 민족들을 4개의 계층으로 나누고 그에 맞게 대우했는데 1등은 당연히 [[몽골인]]이었고 2등은 [[색목인]], 3등은 [[여진족]]과 [[거란족]] 그리고 옛 [[금나라]] 치하의 북중국 [[한족]]으로 이뤄진 한인, 4등은 옛 [[남송]] 치하의 남중국 [[한족]]으로 이루어진 남인이었다. 당시 원나라의 인구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5%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족한 숫자를 커버하ㄱ ㅣ위해 색목인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래서 당시 고려로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을 따라 색목인 관리들도 고려로 많이 넘어왔다. 이 색목인들은 [[아랍인]], [[위구르족]], [[탕구트족]] 등을 말하는데 주로 위구르족들이 많았다. 이 위구르족들이 몽골을 따라 고려로 넘어오면서 위구르족의 문화도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고려로 넘어온 위구르족들을 고려에서는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는데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나오는 그 '회회아비'가 바로 '위구르족 남성'을 말하는 것이며 '쌍화'라는 것은 위구르식 [[군만두]]인 '삼사'를 말하는 것이다.[* 빵 안에 양고기로 만든 소를 넣고 구운 음식인데 지금도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많이 먹는다.] 쌍화(삼사) 말고도 고려로 귀순한 위구르족의 후손인 송도 설 씨가 만든 데서 유래했다는 '설적(薛炙)'이란 음식은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꼬챙이로 꿰어 구운 음식으로 [[터키]]에서 주로 먹는 [[케밥]]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먹는 [[사테]]와 매우 유사한 음식이다. 고려에서 거주하던 위구르인들은 [[위구르어]]를 쓰고[* 당시 몽골에서는 편지를 쓸 때 위구르 문자로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고 위구르족 출신 관료들도 고려 조정 내에 많았기 때문에 고려 후기~조선 초기까지 [[역관]]들이 배우는 필수 [[외국어]] 과목 중 하나로 위구르어가 있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개경에서 예궁(禮宮)이라 부르는 이슬람 사원을 짓고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 예궁에서 예배를 거행하고 이맘의 인도 하에 이슬람의 예배 의식인 대조회송축을 조정에서 거행하기도 했었다고도 한다. 이를 보면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도 한반도에 더 먼저 전파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교는 외국인들의 종교로만 남고 고려인에게까지는 전해지지 못해 한국인의 종교로 들어온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여전히 기독교(정확히는 [[가톨릭]])가 최초다. 이후 [[공민왕]] 시기 들어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들을 숙청하면서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몽골풍을 금지했고 아울러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조선에서 거주하던 위구르족들이 자신들의 풍속을 고수하며 이질적으로 생활한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들과 융합되지 않는다고 하여 위구르족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조선 사회로 동화시켜 버리면서 몽골풍과 함께 들어왔던 위구르풍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분류:고려의 문화]][[분류:한몽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