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from=김법민, other1=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rd1=김법민(양궁))] [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문무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신라의 왕자/태종 무열왕 ~ 경순왕)] ---- [include(틀:역대 신라 태자)] ---- [include(틀:역대 낙랑군공/낙랑군왕)] ---- [include(틀:한국신화의 신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30대 국왕[br]{{{+1 문무왕 | 文武王}}}'''}}}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unmuwang123.jpg|width=100%]]}}} || ||<-2> {{{-2 {{{#fbe673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문무왕 표준영정. [[김기창|{{{#fbe673 김기창}}}]] 작.[* 무열왕 표준영정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당나라에서 받아 온 복식대로 [[금관]] 대신 복두를 쓰고 단령을 입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증 오류가 있다. 다만 670년 이후 시점을 그린 그림인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의 무덤 벽화 예빈도에서 신라 사신이 여전히 당인들과 달리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열왕]]이나 문무왕 등 7세기 중반까지는 사모단령과 기존 복식이 혼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687|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문무왕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p91r_0040_0010_0100|상]]이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문무왕의 영정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 }}} || ||<|2> '''출생[br]{{{-3 (음력)}}}''' ||[[626년]][*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생년이나 수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생년은 문무대왕비에 기록된 '왕이 죽었을 때 56세'라는 내용으로 역산한 것. 《[[삼국유사]]》에서 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의 만남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에서 이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선덕여왕]]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다. 문희와의 에피소드가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해석하는 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생겼다. 게다가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신라)|김인문]]이 629년 생인데 그 역시 진평왕 때 태어났다. 그로 볼 때 위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신라]] [[서라벌|금성]][*A 現 [[경상북도]] [[경주시]]] || ||<|2> '''사망'''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향년 55세) || ||[[통일신라|신라]] [[서라벌|금성]][*A 現 [[경상북도]] [[경주시]]] 궁 침실 || || '''능묘'''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의 태자}}}''' || ||[[655년]] [[3월]] ~ [[661년]] [[6월]] {{{-2 (6년)}}} || ||'''{{{#fbe673 제30대 국왕}}}''' || ||[[661년]] [[6월]] ~ [[681년]] [[7월 1일]][* 양력 7월 21일] {{{-2 (20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 || || '''휘''' ||법민(法敏) || || '''부모''' ||부왕 [[태종 무열왕]][br]모후 [[문명왕후]] || || '''왕후''' ||[[자의왕후]] 김씨 || || '''형제자매''' ||동생[br][[김인문(신라)|김인문]],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 김개지문, 김차득, 김마득[br]여동생[br][[김고타소]][* 642년 이전 혼인.], 여동생[* [[요석공주]]라는 설이 있지만, 이 사람은 설화적 성격이 강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고, 설령 실존인물이라 할지라도 6두품인 [[원효대사]]와 혼인하는 것을 보면 적녀가 아닌 서녀로 추정되며, 적녀만을 지칭하는 "딸 5명"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요석'은 이름이 아니고, 거처하던 궁의 이름이다. 태종 무열왕 치세(654~661)에 재혼. 과거의 [[노처녀]] 기준을 생각하면 첫 결혼은 650년 정도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소부인|김지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기준 3녀. 655년에 혼인.], 여동생[*B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안승]]의 장모이기도 한데 그녀의 딸이 혼인 당시 결혼 적령기였다면 그녀는 665년 정도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동생[*C [[신목왕후]]의 모친] || || '''자녀''' ||태자 [[신문왕|김정명]][br]--왕녀 포정(抱貞)의 어머니, 정완(貞苑)의 어머니--[* 일단은 둘 모두 [[성덕왕]]의 고자매(姑姉妹)라고는 하는데, 아버지의 관등이 각각 [[5두품]]인 [[나마]], [[4두품]]인 [[대사]]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정황상 위의 왕자들처럼 당나라에 보낼 때 왕족이라고 포장하려고 그런 듯하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포모(泡母)는 충주 사람이며 시호가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왕녀가 확실해 보인다.] || || '''종교''' ||[[불교]] || || '''신장''' ||약 160cm 이상[* [[문무왕릉비]]에 문무왕을 지칭하는 듯한 대왕의 풍모가 뛰어났다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5_0010_0020_0030&position=-1|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평균키인 [[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0|160cm]]보다 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 '''시호''' ||'''문무대왕(文武大王)'''[*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23&totalCount=23&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08r_0020_0380&position=6|#]]] || || '''골품''' ||[[진골]](眞骨) || ||<-2> '''군사경력''' || || '''임관''' ||[[병부령]](兵部令) || || '''참전''' ||[[백제멸망전]][br][[고당전쟁]]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문무왕릉비.jpg|width=100%]]}}} || || {{{#FBE673 '''[[문무왕릉비|{{{#fbe673 문무왕릉비}}}]]'''}}}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30대 [[임금]]이자 통일신라의 첫 군주. 부친은 제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였다. 남동생으로 [[김인문(신라)|김인문]]이 있었고,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었다. 왕비는 [[자의왕후]]였다. 또 다른 여동생 [[김고타소]]는 [[김품석]]의 부인인데, 알다시피 [[대야성 전투(642년)|대야성 전투]]로 일찍 죽었다. 그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지하고, 한때 [[동맹]]국이었던 [[나당전쟁|당나라와의 총력전]]까지 승리하여 최후의 승자로 남을 수 있도록 한 [[군주]]'''였다. 다시 말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지도자이며, 동시에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이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겸비|문·무 양면에서 활약해서]] 왕명도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화전양면전술]]의 달인. 거대한 국력을 가진 세계제국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전양면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사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였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의 시대는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이후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벌어지는것을 정면으로 감당해야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그시대 최강국가였으며 [[백제]]를 관리하는 [[웅진도독부]]와 [[고구려]] 지방을 관리하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부의 수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위세는 굉장해서 신라에서도 당나라에게 숙이고 들어가자는 의견이 상당히 많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유신]]도 나당전쟁이 끝나기전에 노환으로 죽었는데 신라의 큰 거목이 사라지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처자식을 데리고 당나라로 도망가려 한 귀족마저 있을정도였고, 이름난 장수들도 줄줄이 사직을 청하여 상황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문무왕은 이렇게 나라의 의견이 분열되고 당나라는 주기로한 백제땅을 주려고 하지도 않으며 여차하면 고구려 멸망시킨 힘으로 너희도 없애겠다고 협박해오는 시대 속에서 모든것을 이겨내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 [[문무왕/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문무왕/생애)] == 가계 == * 증조부: [[진지왕]] * 증조모: ?[* 지도부인 또는 비형랑=김용수 설을 따를 경우 도화녀.] * 조부: [[김용수(신라)|김용수]] * 진외증조부: [[진평왕]] * 진외증조모: ?[* [[마야부인(신라)|마야부인]] 또는 [[승만부인]], 혹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후궁.] * 조모: [[천명공주]] * 부: [[태종 무열왕]] * 외증조부: [[김무력]] * 외조부: [[김서현(신라)|김서현]] * 외외증조부: [[김숙흘종]] * 외조모: [[만명부인]] * 외숙: [[김유신]] * 외숙: [[김흠순]] * 이모: [[보희]] * 모: [[문명왕후]] * 처: [[자의왕후]] * 아들: [[신문왕]] * 며느리: [[폐비 김씨]] * 며느리: [[신목왕후]] * 손자: [[효소왕]] * 손자: [[성덕왕]] * 손자며느리: 성정왕후 * 증손자: [[김중경]] * 증손녀: [[사소부인]] * 손자며느리: 소덕왕후 * 증손자: [[효성왕]] * 증손자: [[경덕왕]]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 《삼국사기》 6권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15&categoryId=49798|《삼국사기》 〈문무왕 상〉]]''' 一年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夏六月 숙위 인문과 유돈 등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다 一年秋七月十七日 [[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一年秋八月 대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를 타이르다 一年秋九月十九日 대왕이 총관과 대감의 서약을 받다 一年秋九月二十五日 군사들이 옹산성을 포위하다 一年秋九月二十七日 옹산성을 쳐서 항복을 받다 一年秋九月 옹산성 함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一年秋九月 웅현성을 쌓다 一年秋九月 상주 총관 품일이 우술성을 함락하다 一年秋九月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에게 관직과 토지 등을 내려주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사신이 와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황제가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고 명령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 사신이 왕을 책봉을 하다 二年春一月 문훈을 중시로 삼다 二年春一月 양식을 싣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다 二年春一月十八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풍수촌에서 묵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산양에 이르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성천 등이 이현에서 적의 군사를 물리치다 二年春二月一日 아홉 장군이 당의 군영에 사람을 보내다 二年春二月六日 아홉 장군이 당 군사에게 군량미를 전하다 二年春二月 아홉 장군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물리치다 二年春二月 왕이 유신과 인문에게 재물과 토지, 노비를 내리다 二年春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春二月 [[탐라국]]이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다 二年秋七月 김인문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秋八月 흠순 등이 백제의 남은 적을 물리치다 二年秋八月 진주와 진흠 등을 죽이다 二年秋八月 여동이 벼락에 맞아 죽다 二年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남산신성에 장창을 짓다 三年春一月 부산성을 쌓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열성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함락하다 三年夏四月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 해당 문서를 들어가면 알 수 있듯이 실질적인 행정 구역은 아니었다.]로 삼고 왕에게 대도독의 관작을 내리다 三年夏五月 영묘사의 문에 벼락이 치다 三年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과 함께 부흥을 꾀하다 三年冬十月二十一日 지수신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四日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四年春一月 [[김유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다 四年春一月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다 四年春一月 부인들에게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다 四年春二月 여러 왕의 능원에 백성을 이주시키다 四年春二月 [[김인문(신라)|김인문]], 유인원, 부여륭 등이 [[웅진]]에서 맹약을 하다 四年春三月 반란을 일으킨 백제의 무리를 물리치다 四年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성천과 구일 등에게 당 음악을 배우게 하다 四年秋七月 인문 등에게 고구려 돌사성의 공격을 명령하다 四年秋八月十四日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다 四年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다 五年春二月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다 五年春二月 이찬 문왕이 죽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다 五年秋八月 왕이 유인원, 부여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를 맺다 五年秋八月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다 五年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로 옮기다 五年 비단 한 필의 기준이 바뀌다 六年春二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六年夏四月 나마 한림과 삼광이 당에 들어가 숙위하다 六年夏四月 왕이 당에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의 이적과 학처준이 연정토의 항복을 받다 七年秋七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七年秋七月 당 황제가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다 七年秋七月 대나마 즙항세를 보내어 당에 조공하다 七年秋七月 [[당 고종]]이 신라 군사가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다 七年秋八月 왕이 장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七年秋九月 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 七年冬十月二日 영공이 대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七年冬十一月十一日 왕이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리다 七年冬十二月 중시 문훈이 죽다 七年冬十二月 왕이 대장군의 정절을 받다 八年 아마가 와서 항복하다 八年春三月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다 八年 파진찬 용문을 비열홀주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꼬리별이 천선을 지키다 八年夏六月十二日 유인궤와 김삼광이 당항진에 도착하다 八年夏六月二十一日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六月二十二日 고구려의 군, 성이 귀순하고 인문 등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七日 왕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九日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하다 八年秋七月十六日 당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다 '''八年秋九月二十一日 [[평양성 전투(668년)|고구려 왕이 항복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二日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五日 국원 사신 용장의 잔치 대접을 받다 八年冬十一月五日 고구려 포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八年冬十一月六日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을 찾다 八年冬十一月十八日 전쟁에서 죽은 자를 포상하다 八年冬十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九年春一月 신혜 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다 九年春一月 승려 법안이 자석을 구하다 九年春二月二十一日 신하에게 교서를 내리다 九年夏五月 천정군 등 세 군의 백성을 진휼하다 九年夏五月 당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하다 九年 사찬 구진천이 당에 들어가 [[쇠뇌]]를 만들다 九年 여러 신하에게 목장을 나누어 주다 十年春一月 당에 억류되었던 양도가 죽다 十年春三月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十年夏四月四日 [[설오유]]와 [[고연무]]가 [[말갈]] 군사를 크게 무찌르다 十年夏六月 [[검모잠|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어 귀순하자 이들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다 十年夏六月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은 여자에게 벼를 주다 十年秋七月 백제의 남은 무리를 여러 곳에서 물리치다 十年秋七月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고 책문을 전하다 十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冬十二月 중시 지경이 물러나다 十年冬十二月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다 十年冬十二月 수세와 진주가 백제의 남은 무리를 진압하다 === 《삼국사기》 7권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8&cid=49615|《삼국사기》 〈문무왕 하〉]]''' 十一年春一月 이찬 예원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一月 백제에 쳐들어갔다가 당주 부과가 죽다 十一年春一月 말갈 군사의 목을 베다 十一年春一月 당 군사의 침공에 대비하여 옹포를 지키게 하다 十一年春一月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가다 十一年夏四月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一年夏六月 장군 죽지 등이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다 十一年夏六月 당 군사와 석성에서 싸우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당 총관 설인귀가 왕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다 十一年秋九月 당 장군 고간 등이 대방을 쳐들어오다 十一年冬十月六日 당 조운선을 치다 十二年春一月 백제의 고성성을 공격하여 이기다 十二年春二月 백제의 가림성을 이기지 못하다 十二年秋七月 당 장수 고간과 이근행이 평양에 군영을 설치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와 싸우다 十二年秋八月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살별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나다 十二年秋九月 왕이 당에 용서를 구하다 十二年 사람들이 굶주리다 十三年春一月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떨어지다 十三年春一月 강수를 사찬으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서형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夏六月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다 十三年秋七月一日 [[김유신]]이 죽다 十三年秋七月一日 반란을 일으키려던 아찬 대토를 죽이다 十三年秋八月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秋八月 사열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秋九月 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다 十三年秋九月 서해를 지키게 하다 十三年秋九月 당과 [[말갈]]·[[거란]]의 군사를 아홉번 싸워 물리치다 十三年 당과 거란·말갈 군사가 고구려의 여러 성을 공격하다 十三年 주군에 외사정을 두다 十三年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다시 두다 十四年春一月 대나마 덕복에 의해 새 역법을 사용하다 十四年春一月 당이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다 十四年春二月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十四年秋七月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다 十四年秋八月 왕이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四年秋九月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다 十四年秋九月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다 十四年秋九月 영묘사 앞 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육진 병법을 보다 十五年春一月 각 관청 및 주군에 구리 인장을 만들어 내려주다 十五年春二月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다 十五年秋九月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기다 十五年秋九月二十九日 이근행이 매초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十五年秋九月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十五年秋九月 안북하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소나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거란·말갈 군사가 칠중성을 포위하자 유동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열여덟 번 싸워 전과를 올리다 十六年春二月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 十六年秋七月 살별이 북하와 적수 사이에서 나타나다 十六年秋七月 당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자 거시지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六年秋七月 양궁을 짓다 十六年冬十一月 '''사찬 시득이 [[기벌포 전투|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나당전쟁]] 종전) 十六年冬十一月 재상 진순이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안석과 지팡이를 주다 十七年春三月 왕이 강무전 남문에서 활쏘기를 보다 十七年春三月 좌사록관을 설치하다 十七年春三月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치다 十八年春一月 선부에 령 1인을 두다 十八年春一月 좌이방부와 우이방부에 경을 각각 1인씩을 더 두다 十八年春一月 북원소경을 설치하다 十八年春三月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삼다 十八年夏四月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다 十八年夏五月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치다 十九年春一月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다스리다 十九年春二月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치다 十九年夏四月 형혹이 우림을 지키다 十九年夏六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고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十九年秋八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八月 각간 천존이 죽다 十九年秋八月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十九年秋八月 사천왕사가 완성되다 十九年秋八月 남산성을 늘려 쌓다 二十年春二月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年春三月 보덕왕 [[안승]]에게 예물을 주고 왕의 여동생의 딸과 혼인시키다 二十年夏五月 보덕왕 안승이 왕의 생질과의 결혼을 감사하다 二十年夏五月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다 二十一年春一月一日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둡다 二十一年春一月 사찬 무선이 정예군사를 데리고 비열홀을 지키다 二十一年春一月 우사록관을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二十一年夏六月 천구가 서남쪽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六月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다 一年秋七月一日 문무왕이 죽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보장왕]]과 더불어 책 2권 분량 기록을 갖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시대]] 모든 왕[* [[고구려]]는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백제]]는 [[온조왕]].]들 중에서도 기록이 가장 많으며 [[고려]] 시대의 웬만한 왕들을 능가할 정도. == [[문무왕/대중매체|대중매체에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문무왕/대중매체)] == 기타 == * 불교 신자임에도 절간에 대한 토지 지급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줄이는 정책을 하며 [[현종(고려)|고려 제8대 현종]]보다 종교 문제에 대해 성공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불교에 대한 개혁 정책을 가장 처음 실시했다. 비록 미완이었지만 유교적 시각에서도 꽤 높은 평을 받은 군주였다. * 역대 신라의 군주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였던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고 능력과 공적 위주의 논공행상이나 인사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말갈]]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맹장]] [[소나(신라)|소나]]를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벼슬인 잡찬(신라 17관등 중 3위)에 추증한 점이나, 군공을 세워 김유신의 추천을 받은 장군 열기를 사찬 벼슬에 올려준 사례가 있다. 열기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가문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는 데다가 김유신의 추천을 받았을 때도 문무왕은 처음에 "사찬은 너무 지나친 상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던 기록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골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열기의 사례는 문무왕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유신이 "관직은 공평한 그릇이니 공을 세운 자에게 보수로 주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뒷날 열기는 [[김유신]] 사후 [[김유신]]의 아들 [[김삼광]]에게 청해서 삼년산군 태수 자리를 받아내기도 한다.] * [[사극]]에서는 아버지 무열왕이나 외삼촌인 김유신에 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삼국 통일기의 전쟁에서 문무왕의 활약은 아버지나 외삼촌 못지 않은데, 태자 시절 백제 공격 때는 김유신과 함께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고 고구려 멸망이나 나당전쟁 승전은 문무왕 치세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삼국 통일기를 다룬 사극들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무열왕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세대 뒤의 문무왕은 그저 이들이 주도한 통일 사업을 마무리하는 군주 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 [[제갈량]] 사망까지만 상세하게 나오고 그 뒤는 아예 생략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도 비슷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업적이나 중요도에 비해 사극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한 역사 인물이다. 《삼국지》도 그렇듯 후반부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제대로 다루기엔 전반부터 달려온 작가의 필력과 근성 문제나 사극의 경우 전쟁씬 연출의 체력적ᆞ비용적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다만 대중적으로는 아버지나 외삼촌에 비해 이미지가 더 좋은 편. 삼국통일이나 당으로부터 삼한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죽기 전 유언의 무게감이나 대왕암 전설의 신비한 이미지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2003년 4월, [[충무공이순신급]] 2번함(DDH-976)이 문무대왕함이란 함명으로 진수되었다. 2009년 4월,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일명 청해부대)에 다른 함선들과 순환 파병되기 시작했다. 2021년 7월, 문무대왕함이 파병을 갔을 때 [[청해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발생한다. * 2021년 4월, [[경주시]] 면 지역 명칭 변경의 유래가 되었다. (양북면 → [[문무대왕면]]) [[https://www.gyeongju.go.kr/news/page.do?mnu_uid=1336&parm_bod_uid=209387&step=258|#]] * 2021년 7월 21일, [[경주시]] [[감포읍]]에 짓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분원을 문무대왕과학연구소라고 명명한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072117225588733|#]] [[감포읍]]은 [[문무대왕면]] 바로 옆에 있는 해안이다. [[원자력 발전소#s-4.5.1|소형모듈원전(SMR)]] 연구를 중점적으로 할 예정이며, 2025년 완공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가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던 한국원자력연구원을 경주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분원을 크게 짓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문무왕)] ---- [include(틀:신라 왕실)]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각주] [[분류:문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