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fd88f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주요 수상 및 수훈}}}'''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자)] ------- [include(틀:역대 폴라음악상 수상자)] ------- [include(틀: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include(틀:역대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 || ||<-2> '''{{{#ffffff Мстисла́в Леопо́льдович Ростропо́вич}}}'''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1H-ziawtlS.jpg|width=100%]]}}}|| || '''본명'''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 [br] (Mstislav Leopoldovich Rostropovich) || || '''별칭''' ||슬라바(Slava) || || '''출생''' ||[[1927년]] [[3월 27일]][br][[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바쿠]] || || '''사망''' ||[[2007년]] [[4월 27일]] (향년 80세)[br][[러시아]] [[모스크바]] || || '''직업''' ||[[첼리스트]], [[지휘자]] || || '''국적''' ||[[러시아]] || || '''학력''' ||[[모스크바 음악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의 첼로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거장이다. 뛰어난 기술과 해석을 선보이며 첼로의 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 동시대의 유명 작곡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헌정 작품을 받아 첼로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시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라바'''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첼로의 [[천재]]'(Genius of the Cello)[* [[BBC]]의 표현이다.] 등의 수식어 또한 가지고 있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모차르트]] 시대에 첼로를 연주했던 사람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악기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정말 이해 가지 않는다.''' >----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mgz_seq=1768|출처]]] == 생애 == === 유년 시절 ===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당시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의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주했고, 이어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4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파블로 카잘스]]를 사사한 아버지에게 10살이 되면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16세가 되는 1943년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 청년 시절 === [[1945년]]에 있었던 소련 연주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권위있었던 [[스탈린|스탈린상]]을 받기도 했다. [[1955년]]에 그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인기 [[소프라노]]였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Galina Vishnevskaya)와 결혼했다. [[1956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첼로 교수가 되었다. === 음악 활동 전성기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ight_col_RIAN_archive_478141_Mstislav_Rostropovich__Dmitry_Shostakovich_and_Svyatoslav_Richter.jpg|width=100%]]}}}|| || 왼쪽부터 로스트로포비치, 쇼스타코비치, 리흐테르 || 로스트로포비치는 당시 소련 음악가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관계를 맺어왔다. [[1949년]] [[프로코피예프]]는 그를 위해 첼로 소나타(Cello Sonata in C major, Op. 119)를 작곡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2번도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한 것이었다. [[1950년]]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와 협연했다. 그의 국제적 경력은 [[1963년]] 리에주 음악원[* [[키릴 콘드라신]]과 함께했다.]에서, 그리고 [[1964년]] [[서독]]에서 시작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서유럽]]에서 수 차례의 콘서트 투어를 가졌고, 서방에서 많은 녹음을 하여 그의 명성을 굳혔다. 리흐테르와의 협연으로 베토벤 첼로소나타를 녹음하였고,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오이스트라흐, 리흐테르와 녹음한 베토벤 3중 협주곡은 불멸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아울러 셀이 지휘하는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오이스트라흐와 녹음한 브람스 2중 협주곡 역시 오늘날까지도 이를 뛰어넘는 녹음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서방 작곡가와의 교류도 깊었는데, 그 중에는 그에게 첼로 [[소나타]], 첼로 [[교향곡]]을 포함한 많은 첼로 곡을 헌정한 '''[[벤저민 브리튼]]'''도 있었다. 뛰어난 피아노 반주자이기도 했던 브리튼은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대표적인 명연으로 기억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녹음하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브리튼과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w161759.jpg|width=100%]]}}}|| || 로스트로포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 [[1968년]] [[8월 21일]], [[영국]]의 음악 축제인 '더 프롬스'에서 로스트로비치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과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연주했다. '''공교롭게도 전날 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고, 드보르자크는 [[체코]] 작곡가였다.''' 비록 그의 공연은 야유와 시위 이후에 진행되었지만, 공연 후 그는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드보르자크|작곡가]]의 고향이자 그가 사랑했던 도시, [[프라하]]를 향한 연대의 표시로 지휘자 악보를 하늘 높이 들었다고 한다. === 망명 === 로스트로포비치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인물이고, 그 결과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일찍이 [[1948년]]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동료인 [[쇼스타코비치]]가 교수직을 박탈당했듯이, 로스트로포비치 또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는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서 보호하며 그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그를 큰 정치적 위기에 빠뜨렸다. 외국 공연이 제한되었고, 소련 주요 도시에서도 그의 연주 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로스트로포비치는 [[1974년]] 가족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8년]]에는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1990년]]에서야 소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망명 이후 === [[1977년]]부터 [[1994년]]까지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맡았다. 그러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의 피아니스트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관계를 이어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동안,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벽 아래서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이 연주는 세계적으로 크게 유명해졌다.[[https://www.youtube.com/watch?v=FqIEdv3Q3-M|연주 영상 링크]]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부레 1번을 연주한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f43bfdb1ebeb6056365191fe8a7130a.jpg|width=100%]]}}}|| || 베를린 장벽 아래의 로스트로포비치 || [[1990년]]에 그는 소련 시민권을 회복했다.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때는 [[옐친]]을 옹호했고, 가장 단속이 심했던 시기였음에도 [[붉은 광장]]에서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여러모로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80년 4월 23~24일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였고, 이후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다시 내한해서 연주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당시 언론에선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1400099208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6-14&officeId=00009&pageNo=8&printNo=4392&publishType=00020|활기잃은 舞臺藝術界(무대예술계) 매일경제 6월 14일 기사]] === 말년 === 로스트로포비치의 건강은 [[2006년]] 악화되었다. [[2007년]]에는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크렘린 궁]]에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건강이 다시 급격히 악화되어, 그 해 [[4월 27일]]에 [[대장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 연주 스타일 및 음악 성향 == 살아생전 그의 연주스타일은 굉장히 화려하였고 거대한 톤으로 기억 된다. 당대로서는 한계가 있던 첼로주법을 뛰어넘어 무수히 많은 귀중한 첼로 주법을 만들어 내었고 이는 훌륭하고도 소중한 첼로계의 자산이 되었다. 살아생전 [[벤저민 브리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과 친구사이 였으며 많은 음악적 교류와 작곡을 사사 받기도 하였다. 주로 로맨틱 시대의 곡을 연주하기를 좋아했고 특히 지금도 명음반으로 회자되고 있는 [[안토닌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대단히 아끼고 즐겨 연주했다. == 악기 == 그가 평생 그의 분신처럼 아꼈던 악기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의 1711년작 duport(듀포르) 이다. 이 첼로는 1800년대 첼리스트 듀포르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당시 [[나폴레옹]] 앞에서 연주를하고 나폴레옹 의 치하를 받을때 잠시 그의 손에 잡혔다가 나폴레옹의 실수로 낸 큰 상처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1711년 부호의 위촉으로 제작된 이 첼로는 구매자인 부호가 스트라디바리에게 평소 첼로값의 두배를 줄테니 걸작 하나 만들어 주시게 라는 부탁을 받고 만들어 졌다고 하며 이에 자극받은 스트라디바리가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의 걸작이라 평가 받는다. 로스트로포비치 사후 일본 음악재단(nippon music foundation) 에서 미화 '''2000만불'''[* 우리 돈으로 무려 238억에 달한다!]에 매입 하였다. [[https://en.m.wikipedia.org/wiki/Duport_Stradivarius|관련 자료]] == 평가 == '''20세기를 빛낸 불세출의 명첼리스트'''로,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현대 첼로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카잘스가 현대 첼로계의 길을 제시하고 설계했다면 로스트로포비치는 그길을 세련되고 화려하게 디자인 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스타일은 카잘스의 그것을 넘어 당시로는 혁명적이게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며 많은 혁명적 주법을 고안해내었고 그만의 거대한 톤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도 로스트로포비치의 [[안토닌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 단조는 첼로계의 성서 이자 교과서로 불리우면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처럼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무수히 많은 첼리스트들 에게 많은 영감과 배움을 주고 있다. == 기타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gz_Sub_INT_20160211171431.jpg|width=100%]]}}}|| || 로스트로포비치와 카라얀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IAN_archive_70350_Opera_singer_Galina_Vishnevskaya_and_cellist_Mstislav_Rostropovich_with_their_daughters_at_home.jpg|width=100%]]}}}|| || 로스트로포비치-비시넵스카야 가족 || 제자[* 유수한 첼리스트들 중 유일하게 장한나의 (첫)앨범을 기꺼이 지휘해줌으로써 최애 ''''제자''''로 ''''인증''''됨.[[https://youtu.be/6Ttodc78yug?t=681|유퀴즈]]] [[장한나]]가 있다. == 수상 및 수훈 == 로스트로포비치는 평생 50여개의 상을 받았다. '''음악 관련 수상''' * '''[[그래미상]]'''(1984년, 루돌프 제르킨과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앨범) * '''[[폴라음악상]]'''(1995년)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1976년)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2012년) * [[울프상]] 예술 부문(2004년) * 런던 왕립 음악원 명예 회원 * 왕립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1970년) 외 다수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 [[대조국공훈훈장]](2007년, 1급 - 세계 음악에 대한 뛰어난 공헌 및 다년간의 창의적 활동) * 자유 러시아의 옹호자 메달(1993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용기와 헌신) * [[레닌상]](1964년) 외 다수 '''외국으로부터''' *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명예 훈장(2001년, 1급) * 아제르바이잔 '독립' 훈장(2007년) * 아르헨티나 자유의 훈장(1994년)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1989년) * 영국 명예 KBE(1987년) *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1987년) 외 다수 [[분류:러시아의 지휘자]][[분류:러시아의 첼리스트]][[분류:1927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분류: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분류:바쿠 출신 인물]][[분류:외국의 실향민]][[분류:대조국공훈훈장 1등급 수훈자]][[분류:대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분류:모스크바 음악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