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미치코 상황후)]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아키히토]] 상황의 아내인 [[미치코 상황후]]의 고된 시집살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항목이다. 평민 출신으로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한 [[미치코 상황후|쇼다 미치코]]는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가 되었다.[* 말이 평민이지 당시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였던 닛신(日清) 제분의 사장인 아버지와 구 화족(백작)가문 소에지마(副島) 일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벌가 영애였다.] 이런 출신 신분의 차이로 인해 시어머니 [[고준 황후]]를 비롯한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다음은 세간에 드러난 사건들이다. 당연하지만 이 외에도 여러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것이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물론 신체적 폭력은 없었지만, '''이쪽은 [[왕따|정신적으로 말려 죽이는]] 형태라 더더욱 공포스럽다.'''] == [[장갑]][* 장갑에 대한 에피소드(?)는 [[미치코 상황후]]의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 작은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사건 == || [[파일:DAFA55BA-4743-4795-9E7A-E837536ABFD3.jpg|width=100%]] || ||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 어머니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 1959년 1월,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의 일이다. 쇼다 가문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덴노를 알현한 역사가 없던 쇼다 가문은 시부모가 될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 내외에게 첫 인사를 드리러 황궁에 가야 하는 미치코에게 무슨 옷을 입혀 내보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사숙고하여 의상을 골라 미치코에게 입힌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궁내청]]에 보내어 "이 차림으로 괜찮을까요?"라고 문의했다. || [[파일:external/blog-imgs-34.fc2.com/women0520100825.jpg|width=100%]] || || 당시 쇼다 가문이 궁내청에 보낸 미치코의 사진이다. || 직원은 '''"짧은 [[장갑]]이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했지만 평민인 쇼다 가문은 황실에서나 쓰는 [[오페라 글러브|긴 장갑]]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직원이 보내 준 긴 장갑을 끼고 미치코는 무사히 알현과 기자회견을 마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처음에 직원에게 보낸 위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밥 먹고 참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인~~ 옛 황족들과 [[화족]]들은 바리바리 쇼다 일가에 전화를 걸어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라는 식으로 불같이 항의했다. 쇼다 가문은 해명하지도 못하고 일일이 정중하게 사과하느라 혼이 났다. 이 사연은 30여 년 후, 미치코 상황후의 친정어머니였던 쇼다 후미코에 의해 진상이 밝혀졌다. 외손자 [[나루히토]]와 [[후미히토]], 외손녀 [[구로다 사야코]]가 딸을 오해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이세 신궁]] 사건 == 결혼식 전, 미치코는 [[아키히토]]와 함께 [[이세 신궁]][*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궁이다.]에 참배하러 갔다가 이세 신궁의 [[신관]]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 [[메이지 덴노]]의 7녀다. 측실 [[소노 사치코]]의 소생으로, 결혼 전 이름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이다.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고,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후사코는 바로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시마즈 하츠코]][*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후, [[고준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의 할머니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미치코'''가, 후사코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던 것이다. == 시숙부와 시숙모로부터 부녀(父女)가 당한 모욕 == 본인만이 아닌 '''친정아버지도 모욕을 당했다.''' 쇼다 히데사부로는 대기업 회장에 처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이 옛 [[화족]]이고, 아버지 쇼다 데이이치로가 [[귀족원(일본)|귀족원]] 칙선 의원을 역임했던 경력이 있었던 만큼 황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큰딸 미치코를 황실에 시집보낸 후, 히데사부로는 큰사위 [[아키히토]]의 숙부인 [[노부히토]][* [[다이쇼 덴노]]의 3남이다.]을 만나자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었던 노부히토는 쇼다 히데사부로를 싹 무시했다. 평민과 인척 관계가 되어 불쾌하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미치코 상황후]]가 2번째 [[임신]]을 했다가 [[유산(의학)|유산]]했을 때, 노부히토의 아내 [[키쿠코 비]]는 '황실의 후사'를 운운하며 미치코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작 키쿠코 비는 [[임신]]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음[* 이는 [[노부히토]]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세츠코 비]][* [[아키히토]]의 숙부이자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야스히토]]의 아내다.]와 [[키쿠코 비]]는 형님 [[고준 황후]]나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다. [[이방자]]의 이모이기도 하다.]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미치코 상황후]]와 친하게 지냈다.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미치코 상황후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후미히토]]에게 [[서예]][* 키쿠코 비의 외가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방계 황족)은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서예 기법이 있었다. 키쿠코 비는 친정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이를 배웠다.]를 가르치기도 했고, [[구로다 사야코]]의 약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반면 [[고준 황후]]와 마츠다이라 노부코는 죽을 때까지 끝끝내 변하지 않았다. 마츠다이라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는 등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마츠다이라 노부코는 [[미치코 상황후]]가 황실로 시집올 때 황족들과 화족들을 선동하여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1969년에 향년 만 82세로 죽을 때까지 미치코를 두고두고 미워했다. == [[창문]] 사건 및 자녀교육 문제 == || [[파일:external/blog-imgs-71-origin.fc2.com/201504131931139c2.jpg|width=100%]] || || 옆에 앉아 있는 심술궂은 표정의 여성은, 당시 동궁(東宮)의 [[시녀|궁녀장(宮女長)]]인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이다.[br]마키노 스미코는 마츠다이라 노부코에 의해 동궁 궁녀장으로 손수 추천된 인물이니, 어떤 사람일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다.[* 마키노 스미코는 [[미치코 상황후]]의 일거수 일투족을 [[고준 황후]]에게 고자질해서 이간질을 부추겼다거나, [[나루히토]]가 어렸을 때에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해서 황태자 부부와 나루히토로부터 '''악마 아줌마'''로 불렸다는 등,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 다만 유독 저 사진에서 심술궂게 찍힌 것인지, 저때 찍힌 다른 사진들을 보면 그냥 평범한 표정이다.] || [[1960년]] [[2월 23일]], 결혼한 이듬해에 미치코 상황후는 [[궁내청]] 병원에서 후계자이자 첫 아이 [[나루히토]]를 출산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동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 [[기자]]들이 갓 태어난 왕자의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미치코 상황후는 그들을 배려하여 '''[[창문]]'''을 살짝 열어주었는데, 이 일로 [[시어머니]] [[고준 황후]] 및 여러 사람들로부터 '''"귀한 [[아기]]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었느냐!"'''고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둘째 [[후미히토]]와 막내 [[사야코 공주]]를 낳고 퇴원할때는 남편 [[아키히토]]가 옆에 있어줬는데, 본래 남성 황족은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자동차 안쪽에 앉아야 하는 원칙을 깨고 '''아내인 미치코를 안쪽에 앉힌 후 본인이 직접 창문을 내렸다.''' 또한 얌전했던 첫째 [[나루히토]]와 달리 말썽꾸러기였던 둘째 [[후미히토]]가 심한 장난을 쳐서 [[미치코 상황후]]가 훈육하려고 하면, [[고준 황후]] 및 황실 사람들은 '''"(미천한 평민 출신 주제에) 감히 귀한 황자에게 손을 대다니!"'''라며 미치코 상황후를 꾸짖었다. 대략 이해가 가겠지만, 우리나라(조선시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역사 속에 있었는데, 바로 왕의 [[후궁]]이 자기가 낳은 자녀를 대할 때이다.[* [[효종(조선)|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자신의 친딸인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에게 한 번 "너"라고 반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효종이 노발대발 화를 냈다. 오히려 효종의 정실 [[인선왕후]] 장씨 등이 말려서 겨우겨우 좋게 넘어갔다.] 그때도 그나마 [[세자]]나 [[원자(왕족)|원자]]를 대할 때 정도에 해당하지 예의는 갖춰도 이 정도로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진 않는다. 즉 황족들과 화족들은 끝까지 미치코 황태자비를 [[첩]]처럼, 어쩌면 그보다 아래로 취급한 것이다. 미치코 상황후는 엄연히 [[아키히토]]와 법률혼으로 맺어진 정실부인이자 유일한 아내이며, 고준 황후의 손주들인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친어머니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후미히토]]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없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고, 그 결과 후미히토와 그의 처자식들이 저지른 사고들로 약 40년 후인 현재 [[일본 황실]]이 뒤집어지는 [[마코 공주/결혼소동|나비 효과]]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 토카 악당 사건 == [[천황]]이 거처하는 궁전인 [[고쿄]](皇居, 황거)에는, [[고준 황후]]의 환갑을 기념하여 지은 '토카 악당(桃華樂堂)'[* [[고준 황후]]의 오시루시(お印)인 [[복숭아]](桃)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시루시란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인데,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단 식물이 아닌 다른 사물이 오시루시인 경우도 있다.]이라는 건물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시설인데, 여기에 황족 및 [[화족]]들이 초대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만 반갑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으며, 미치코 상황후는 못 본 것처럼,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한다. == 공항 사건 == '''미치코 상황후가 시집 온 이래 최대이자 최악의 모욕이었던 사건이다.''' [[미치코 상황후]]가 시집온 지 17년이나 된 1976년, 시부모인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 내외가 [[미국]] 순방을 떠날 때였다. 황족들은 모두 [[공항]]까지 따라 나가서 배웅을 했다. 그런데 고준 황후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큰며느리를 싹 무시'''하고, 옆에 있던 아키히토한테만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는 고준 황후가 자신의 행동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망각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도 일반인들은 말로만 듣던 궁중 [[이지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종교 문제 == [[미치코 상황후]]의 친정인 쇼다 일가는 [[가톨릭]] 집안이며, 그래서 미치코 상황후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쭉 가톨릭 [[미션스쿨]]을 다녔다. 생 모르 수녀회[* 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다. 아직 [[대한민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에서 운영하는 후타바(雙葉) 여학원[* 미치코 상황후의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와 그녀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쌍둥이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 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도 후타바 여학원 출신이다.]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성심수녀회]][* 1956년에 대한민국에도 진출해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 시어머니 [[고준 황후]]의 친정인 구니노미야 저택이 있던 터에 세워졌다.] 중등과와 고등과를 거쳐,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시동생 [[마사히토]]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마사히토는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형수에게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미치코 상황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어른들에게 들켜, 미치코 상황후만 또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사실 [[아키히토]]는 어린 시절 [[개신교]] 신자인 [[미국인]] 바이닝 부인으로부터 교육받은 적이 있고, [[고준 황후]]와 그녀의 딸들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본 황실]]의 종교는 [[신토]]이며, 패전 이전 천황과 그 일가는 [[국가신토|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니 고준 황후에게 있어서는 첫째 며느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좋은 트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 [[미치코 상황후]]의 종교 문제는 이전에도 거론되었다. 1993년 9월, [[유럽]] 순방 중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것도 미치코 상황후의 요청이었는데, 고준 황후가 이를 트집잡아서 제대로 구박하는 바람에 미치코 상황후가 한동안 [[실어증]]을 얻은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세속적인 면이 강하지만, [[일본 황실]]은 보수적이다. 때로는 [[신사(신토)|신사]]의 [[신관]]을 맡아야 할 [[천황]]의 가족으로써 [[신토]]를 제외한 타 종교, 특히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딱 좋은 공격거리였다. 현재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을 뿐, 미치코 상황후는 아직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의 비교 == 시동생 [[마사히토]] 아내 [[하나코 비]]는 옛 화족 츠가루(津輕) 가문의 딸이며, 전통적 황족ㆍ화족 학교인 [[가쿠슈인]] 출신이다.[*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現 가쿠슈인 여대) 문과(영어 전공) 졸업생이다. 넷째 시누이 [[이케다 아츠코]]도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출신이다.(문과→가정생활과)]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 [[고준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었다. 평민 출신이며 가쿠슈인 졸업생도 아닌 미치코 상황후는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 비교당하며 더욱 괄시를 받았다. 다만 하나코 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어서[* 사실 [[하나코 비]] 본인보다 남편 [[마사히토]] 쪽에 문제가 있어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식이 셋([[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이나 있는 미치코 상황후보다는 여러모로 열악했다. 하지만 [[마사히토]]와 [[하나코 비]] 부부가 자녀를 출산했다고 해도, 아키히토와 미치코 상황후 부부를 앞질러 [[일본 황실]]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지는 불확실하다. [[미치코 상황후]]가 딸만 낳고 [[하나코 비]]만 유일하게 아들을 낳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장남이라 천황 승계 서열 1위에 [[황태자]] 지위를 갖고 있던 아키히토와 달리, 마사히토는 차남으로 쇼와 시대였던 1960~1980년대 당시에는 천황 승계 서열 2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아키히토]]의 장남, 차남 내외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다만 아들이 없고 [[아이코 공주|무남독녀]]밖에 없는 [[나루히토]], [[마코 공주|딸]] [[카코 공주|둘]]은 물론 천황의 대를 이을 수도 있는 [[히사히토|늦둥이 아들]]을 [[출산]]한 천황 승계 서열 1위 [[후미히토]]는 모두 자식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자식 문제와 천황 승계 문제 등으로 사이가 험악한 형 [[나루히토]] & [[마사코 황후]] 부부와 동생 [[후미히토]] & [[키코 비]] 부부와 달리, [[아키히토]] & [[미치코 상황후]] 부부와 [[마사히토]] & [[하나코 비]] 부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쇼와 덴노]]가 살아 있었던 시절까지는 자식 문제와 아내들의 출신 성분 문제로 사이가 미묘하긴 했었으나,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새 일본 천황이 된 이후에는 어느 정도 많이 좋아진 편이다. 만약 [[하나코 비]]가 남편 [[마사히토]]와의 사이에서 [[임신]]에 성공해 자녀를 낳았다고 해도, [[고준 황후]]는 장남 소생과 차남 소생의 손주들을 서로 차별하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미워하는 며느리가 낳았다 해도 손주는 할머니로서 끔찍이 아끼며 싸고 돌았으니 말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둘째 손자 [[후미히토]]가 어렸을 때 [[미치코 상황후]]가 훈육하려던 것을 트집을 잡아 야단치며 후미히토를 싸고 돌았던 일화가 있다.] 하지만 2000년 노환으로 병사할 때까지 평생토록 [[미치코 상황후]]를 미워한 [[고준 황후]]는 자식 교육 문제 등으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미치코 상황후를 괴롭혔을 가능성이 크다. == 의상 문제 == || [[파일:external/blog-imgs-80.fc2.com/20150802140406e57.jpg|width=100%]] || || 다른 황족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미치코 상황후 혼자서 양장을 입고 있다.[br]물론 중간에 양복을 입은 남편 [[아키히토]]와 시동생 [[마사히토]]도 보인다. || || [[파일:external/blog-imgs-80-origin.fc2.com/20150708224332bec.jpg|width=100%]] || || 사진은 1965년에 일본 적십자사 전국대회에 출석했을 때 촬영되었다.[br]왼쪽에서부터 [[유리코 비]][*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다카히토]]의 아내다.], [[키쿠코 비]], [[세츠코 비]], 미치코 상황후다.[br]시숙모들은 남색 양장을 입었는데, 미치코 상황후 혼자서 흰색 양장을 입었다. || 이건 정말이지 유치하기가 그지 없는 짓인데, 공식 석상이나 행사에 참석할 때면 미치코 상황후만 쏙 빼놓고 자신들끼리만 무슨 옷을 입을지 미리 짰다고 한다. 옛날 사진들을 보면 [[미치코 상황후]] 혼자서만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 나오거나, 다른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미치코 상황후만 [[원피스]]나 양장을 입고 나온 모습들이 있다. '''혼자만 튀어 보여서 무안해지게 하려는 고도의 이지메다.''' 게다가 '''혼자 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인]]들의 문화'''[* 물론 요즘에는 개인주의가 많이 퍼져서 훨씬 나아졌으나, '''그 당시에는 집단주의가 엄청 심했다.''']를 생각하면, 미치코 상황후가 느꼈을 무안함과 황족들이 품은 악의는 현대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안 그래도 외모에서부터 압살하는 미녀 [[미치코 상황후]]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며, 한낱 방계 황족 부인 따위와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의 클라스 차이를 느끼게 해 준다.~~ == 황후가 된 후 == 1989년 시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남편 [[아키히토]]가 125대 덴노로 즉위하자, 미치코 상황후도 황후가 되었다. 1989년에는 [[고준 황후]]의 남편 [[쇼와 덴노]]뿐만 아니라 고준 황후의 사촌 언니인 [[이방자]], 여동생인 [[오타니 사토코]], 셋째 딸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줄줄이 사망했다. 고준 황후에게는 정신적인 충격이 꽤나 컸을 시기였다. 그러나 [[고준 황후]] 본인은 꼬장꼬장 정정하게 살아서 계속 [[미치코 상황후]]를 괴롭혔고, 고준 황후와 함께 하는 세력들은 그 후로도 언론 등을 동원하여 미치코 상황후를 향해 "미치코 상황후 때문에 [[쇼와 덴노]]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상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는 등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비난들'''을 퍼부었다. [* [[키코 비]]의 경우에도 비슷한 소문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키코 비의 경우는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게 정설이다. [[궁내청]] 직원들마저도 그녀의 시종이 되는 걸 꺼릴 정도였다.] 결국 [[미치코 상황후]]는 못된 시어머니한테 마구 구박을 받아서 심신이 미약해졌고 59세 생일인 1993년 [[10월 20일]]에 쓰러져 '''[[실어증]]''' 증세를 보였다. 최악의 생일 선물이었던 셈이다. 실어증은 이듬해인 1994년에야 회복되었다. 그러다 '''[[2000년]] [[6월 16일]]'''에 [[고준 황후]]가 향년 97세로 사망하면서 장장 40여년간 이어져 왔던 미치코 상황후의 지옥같았던 시집살이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각주] [[분류:인물별/생애]][[분류:일본 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