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목차] == 개요 == [[1945년]] [[2월]] [[태평양]] [[마셜 제도]] 밀리환초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http://omn.kr/1v0ly|관련 기사 : 기아지옥에 버려진 일본 군인들... 급기야 이런 일도]] [[일본 제국]]은 1942년 마셜 제도에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지었지만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후 마셜 제도 상륙작전(부싯돌 작전)에서 [[미군]]이 콰잘린 환초를 기습점령하고 나서 콰잘린 비행장을 기점으로 미군의 봉쇄작전이 시작되었고 섬 자체도 산호초였기 때문에 토질이 좋지 않아 [[둔전]]을 할 수 없었으니 식량이 늘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6월 [[미군]]이 마셜 제도의 대부분의 섬을 점령한 후에는 미군의 봉쇄작전이 심해지면서 섬에는 식량 보급이 끊겼다. 그래서 병력을 섬 전역에 분산시켜 가면서 [[고난의 행군|자력갱생]]을 도모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시였기 때문에 미군은 고기잡이를 나온 일본군에게 거침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대북확성기|선전방송]]까지 곁들여[* [[도쿄 로즈]]에 대한 보복 목적도 있었다. 참고로 조선인들이 징용되어 온 것을 의식해 [[아리랑]]을 틀기도 했다고 한다. 덕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미군 측에 무더기로 투항한 것은 덤.] 속을 박박 긁어 댔다. 이렇듯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심화되자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불만도 고조되어 갔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중후반에 들어서는 (밀리환초는 아니었지만) 미군이 상륙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힘을 합쳐 봉기하거나 일본군에게 피의 보복을 행한 조선인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미군은 눈앞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곡괭이로 일본군 기관총 사수를 처참하게 살해한 경우도 목격했다고 한다.] == 조선인 학살 ==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던 가운데 어느 일본군이 웬일로 자신이 먹던 '''[[고래고기]]'''를 지나가던 조선인 군속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 주었다. 조선인들은 저 사람들이 갑자기 웬일이지 싶기도 하면서 이것을 의심하지 않고 먹었지만 며칠 뒤 무인도로 고기를 잡으러 간 조선인들은 [[소일렌트 그린|섬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살점이 도려내진 조선인들의 시체'''를 목격한 것.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몰살을 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1945년]] [[2월 28일]] 밀리환초 내 체르본섬에 살던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감시하던 일본군 감시인 11명을 살해한 뒤 미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숲으로 유인한 뒤 살해했다. 그러나 11명 중 7명만 살해했고 4명은 끝내 놓치고 말았는데 이는 다음날 끔찍한 결말로 돌아왔다.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15명이 체르본섬에 상륙해 섬 안에 있던 조선인 100여명을 학살한 것이다. 더불어서 15명의 [[원주민]]들도 조선인들에게 가담했다는 혐의로 학살을 면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았고 둔기나 곡괭이를 휘두르거나 돌과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고 결국 전부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해군 내전]] == 일본군의 만행과 충격적인 일화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인육 사냥은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같은 일본인까지 대상으로 했다. 일본군 [[장병]]들 중 가장 희생이 많았던 것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편성되었던 [[일본 육군]] [[보병]] 제107[[연대(군대)|연대]] 제3[[대대]]였다. 이 부대가 파견되었을 때는 이미 3,000명 이상의 [[일본 해군]]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심각하던 차에 식량 보급까지 끊기면서 육해군은 서로 '''진짜 적대관계'''가 되었다. 식량을 훔친 장병이 사살되는 건 기본이고 [[해군]]이 지하호에 감추어둔 식량을 [[육군]]에게 나누어주지 않자 아예 상호간의 총격전까지 발발했다. 육군들끼리도 식량 배분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고 [[프래깅]]과 [[자살]]이 빈번했다.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흘러가면서 같은 일본인이고 뭐고 [[식인|서로]] [[동족포식|잡아먹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전후 복원선 에이가와 마루에는 대대 총원 1,000명 중 3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만 탈 수 있었다. 밀리환초에 미군이 상륙한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참극. == 기타 == 한편 이웃한 윗제 환초에서도 식인 사건이 빈번했다. 일본군 제7포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실종되고 인육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던 상황에서 1945년 5월~6월 사이에 덜미가 잡혀 인간 사냥꾼 전원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같이 충격적인 사건마저도 뒤에 일어난 [[치치지마 식인 사건]]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밀리환초보다 더 막장인 게 해군까지 작당했다.] 밀리 환초는 기아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치치시마는 그런 문제도 없이 단순히 재미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식량의 부족으로 인육을 먹는 사건은 [[독소전쟁]]에서도 이따금 발생한 일이지만 단순히 재미로 식인하는 행위는 같은 일본군조차도 미친 짓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사건을 주도한 [[타치바나 요시오]]는 학대를 당해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고 현직 군인이었음에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심지어 학대한 사람 중엔 [[임팔 작전]] 당시 생환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람조차도 '''"[[무타구치 렌야]]도 이런 명령은 안 했다!"'''며 일갈했을 정도다.] 2006년 설치된 [[대한민국 정부]]의 강제동원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분류:1945년 범죄]][[분류:태평양 전쟁/전쟁범죄]][[분류:식인 사건]][[분류:일본의 학살]][[분류: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분류:일본의 전쟁 범죄]][[분류:민족 말살 통치기/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