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220_paolo_III.png|height=125]] || || 제219대 [[클레멘스 7세]] || → ||<#806600> '''{{{#FFF 제220대 바오로 3세 }}}''' || → || 제221대 [[율리오 3세]] || ||<-10><:> [[파일:external/ceroart.revues.org/img-5-small580.jpg|width=276]] || ||<-3><:> '''교황명''' ||<-7><(> 바오로 3세 (Paulus III) || ||<-3><:> '''본명''' ||<-7><(>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Alessandro Farnese) || ||<-3><:> '''출생지''' ||<-7><(> [[교황령]] || ||<-3><:> '''사망지''' ||<-7><(> [[교황령]] [[로마]] || ||<-3><:> '''생몰''' ||<-7><(> [[1468년]] [[2월 29일]] ~ [[1549년]] [[11월 10일]] (81세) || ||<-3><:> '''재위기간''' ||<-7><(> [[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 (15년 28일) || ||<-3><:> '''문장''' ||<-7><#ffffff><:> [[파일:external/www.finanzaonline.com/1836571d1386685098-domine-dirige-nos-alla-scoperta-della-city-london-corporation-stemma-paolo-iii-farnese-pont.-1523-1534-.jpg|width=100]] || * [[라틴어]]: Paulus III * [[이탈리아어]]: Paolo III * [[영어]]: Pope Paul III [목차] == 개요 == 제220대 [[교황]]. 본명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신성 로마 제국]]([[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이 불꽃처럼 번지는 가운데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가톨릭]]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개혁운동을 착수한 동시에, [[르네상스]] 예술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교황]]으로도 유명하다. 전임 교황들이 저지른 친족 등용과 직권 남용을 그대로 이어받아 비판받긴 하지만, 종교 개혁의 확산을 막고 전대인 [[클레멘스 7세]]가 젊은 혈기로 말미암아 [[교황령]]을 둘러싸고 온갖 분란을 벌인 것을 그럭저럭 수습했다는 평을 받는다. == 재임 전 == [[이탈리아]] 카니노 지역의 명문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 출신이다. [[고대 로마]] 시대 귀족 후예로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이나, 콜론나 가문만은 못하지만 그럭저걸 뼈대는 있는집안인데 파르네제 가문은 원래 용병대장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와 [[피렌체]]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하였고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 늙어서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소싯적에는 날마다 사교 클럽에 참가하여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하는 [[호색한]](!)이었고, 그의 누이 줄리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교황의 애첩인 누이 줄리아 파르네제의 덕으로 25세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이전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특히 한 정부와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보았을 정도였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는 쉴드가 있지만 사실무근인 게, [[https://en.wikipedia.org/wiki/Pier_Luigi_Farnese,_Duke_of_Parma|장남 피에로 루이지가 1503년생이다.]]-- 뱃속에서 20년은 있어야 가능--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사제(성직자)|사제]]독신 규정이 느슨한 시기에 한 여인에게서만 낳았다는 점이다. 이 중 장남이자 파르마 공작인 피에로 루이지의 차남 오타비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파르마 공작이 되었고, 훗날 [[교황]]의 파트너인 [[카를 5세]]의 서녀와 혼인하게 되며[* 그 아들이 스페인 제국군의 명장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제]]], 장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는 추기경 자리에 오른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성품성사|서품]]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마음을 다잡은 후,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런 벼락 출세 뒤에는 그의 누이 줄리아가 [[알렉산데르 6세]]가 가장 아끼는 첩실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509년 [[알렉산데르 6세]]와는 원수지간이던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도 파르마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등 도합 6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 교황 재임기 == 원래 [[하드리아노 6세]]의 사망 후에도 [[교황]] 선출이 유력했으나, 누나 줄리아 파르네세가 [[알렉산데르 6세]]의 첩실인 인연으로 치맛바람으로 [[추기경]]이 된 [[흑역사]]에다가, 성직에 있으면서도 사생아를 넷이나 두었기 때문에 에지디오 추기경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무산되었다. 15년 후라 그런 흠에 대한 비판은 약해졌고, 무엇보다 67세에다가 맡은 직책마다 유능했기에 쉽게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들의 오점인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라는 잘못을 바오로 3세도 저질렀다. 자신의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의 퍼주기의 일환으로 나이가 고작 16살, 14살에 불과한 두 손자를 추기경단에 입회시켰고, [[알렉산데르 6세]]가 체사레에게 퍼주었듯이 차남 피에르 루이지를 [[교황령]] 군대의 최고 지휘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파르마와 피에첸차를 퍼주려고 전쟁을 벌인 것은 큰 오점으로 꼽힌다.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를 카메리노 군주에 심어주고 메디치 가문의 마르게리타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파르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200년간 파르네제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다.[* 파르네제 가문이 대가 끊긴 후 파르네제 가문의 상속녀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계비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맏아들 [[카를로스 3세|카를로스 왕자]]가 물려받았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조]]과 [[나폴리 왕국|나폴리]]-[[시칠리아 왕국]]과 교환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카를로스 왕자의 동생 [[필리포 1세(파르마)|펠리페 왕자]]에게 넘어가 [[보르본 왕조]]의 파르마계가 창설되었다.] 기존에 폐지된 사육제(謝肉祭)[* [[가톨릭]] 국가에서 [[사순 시기]] 직전의 3일 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가면을 쓰고 행렬하거나 연극과 놀이로 즐거이 노는 날.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까지의 약 40일간으로,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며 회개와 보속과 절제로 경건하게 보내는 시기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때 [[판공성사]]도 본다.) 때문에 사순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실컷 놀자는 것.]를 1536년 부활시켜서 로마에서 투우 경기를 열고 무도회와 연회를 벌였고, 건축 분야에선 로마 줄리아 거리에 팔라초 파르네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맡겼고 안토니오 상갈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맡긴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한가운데 옮긴 것도 이 시기의 일. 재임 초기의 그는 [[개신교]]에 대해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사용하여 관대하게 처우하는 한편, 수십년 간 지켜봐 온 [[교황청]] 내부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내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추기경단을 물갈이하고 [[수도회]]를 일신시켰다. 또한 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세속 군주인 [[카를 5세]]와 맞서다 [[사코 디 로마|처참하게 개발살난 꼴]]도 목격했기 때문인지, 가급적 원만한 관계를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교황령에서 종교로 말미암은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국가교회화 시킨 [[헨리 8세]]에게는 매우 단호하게 대처했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현재의 [[성공회]]와 같다고 보긴 어렵다. 거의 모든 교리가 [[가톨릭]]과 일치했고, 분열이 영구적이리라고 본 견해도 많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에서 성공회로 이름이 바뀐 것도 19세기 이후.] 사건의 발단이 된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은 이미 전대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잉글랜드 왕국]]과 [[교황청]]의 불화는 바오로 3세 재임기에 극대화되었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자 불같이 화를 낸 바오로 3세는, 1538년 즉각 파문 조치를 취하여 [[잉글랜드 국왕]]을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이 시기 이후 바오로 3세는 처음의 관대한 모습에서 강경파로 돌변했다. 1542년에 로마에 이단심문소를 창설하여 교황청 차원의 [[개신교]] 교인 색출 및 처벌이 진행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루터교회]] 신자들과 대치 중인 [[카를 5세]]에게도 적극적인 활약을 주문했고 [[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 헤르만 5세 폰 비트를 [[파문]]하여 결국 물러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스페인]]에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주도로 창설된 [[예수회]]를 공인하여 [[가톨릭]]의 강경화 및 국외 포교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결속하기 위해 1545년 반(反)종교개혁 차원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고 각종 규범을 확립하여 그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가톨릭을 쇄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더욱 결연한 태도로 개신교와 맞서게 되었고 교황청의 입지는 탄탄해진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훗날 [[바오로 4세]]가 되는 카라파 추기경도 있었다. 카라파 추기경의 보고서는 성직매매와 [[면벌부]], 주교관할구에서 축재등 기존 관행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교황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를 대놓고 비판했다. 그 외에 끝물로 접어든 [[르네상스]]를 후원하였으며 이를 통해 '르네상스를 후원한 마지막 교황'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최후의 심판]]을 완성할 수 있게끔 지원했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으며 교황의 긴급 피난처인 산탄젤로성을 [[프레스코화]]로 세련되게 꾸몄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기면서 그에게 설계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재임 15년만인 1549년에 82살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다. 1547년 아들 피에르 루이지의 영지 [[피아첸차]]에서 폭동이 일어나 아들이 살해당했고, 게다가 [[파르마]]도 바오로 3세에 항거하여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난데다가, [[교황령]]의 보복을 염려하여 도시를 통째로 카를 5세에게 들어바치려고 했다. 이에 관계된 [[추기경]]을 [[로마]]로 소환하여 추궁하고 그의 모자를 뺏어 집어던지고 격분한지 몇 시간 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같은 바오로 3세의 업적은 교회 개혁, 학문과 예술의 진흥,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등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에 크게 결속한 [[가톨릭]]은 후대로 가면서 더더욱 강경해져 [[개신교]]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 기타 매체의 바오로 3세 == 교황청 비밀 도서관에 있는 마법서를 읽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 마법서를 비밀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 숨기라고 다시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교황이 이 바오르 3세이다. === [[튜더스]]에서 === 배우는 [[아일랜드]]의 대배우 [[피터 오툴]]. 시즌 1에서는 언급만 되다가 시즌 2에 특별 게스트로 간간히 등장. "우리에게는 [[헨리 8세]]나 카를 5세와 같은 군대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힘이 있다"며 노회하고 경륜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앞에서는 로마를 순례중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조차 어버버하며[*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때 분명하게 말하거나 읽지 못하고 더듬는다.], 교황이 "이교도 때려잡을 거지?" 하면서 등떠미니 왕이 분위기상 어쩌지 못한다. --근데 [[프랑스]]로 돌아가자 쌩깐 건 함정--[* 실제로 가톨릭 군주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려고 이교도인 [[오스만투르크]]와 손을 잡아서 교황청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벽화를 그리게 하는 장면에 미켈란젤로가 아주 짤막하게 지나간다. 회의 와중에 장손 알레산드로[* 이름은 교황의 속명과 같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방문하자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른 추기경들에게 손자가 좋은 추기경이 될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예수회]]를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http://glasmoon.egloos.com/5393910|여기]]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파르네세 가문]][[분류:1468년 출생]][[분류:1549년 사망]][[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분류:라치오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