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바이마르 공화국)] [목차] == 개요 ==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1933년]] [[나치당]]의 집권 이전까지 실시된 총선 결과를 다루는 문서다. == [[대공황]] 이전 == === 초대 총선 (1919) === ||<-7> 1919년 1월 19일[br]{{{-2 총원: 423석, 과반의석: 212석}}} || ||<-3><#e3000f> '''[[필리프 샤이데만|{{{#fff 샤이데만}}}]] {{{#fff 내각}}}'''[br]{{{-2 {{{#fff '''331석'''}}}}}} ||<-4> 야당[br]{{{-2 92석}}} ||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ffca08> [[독일 민주당|{{{#000 민주당}}}]]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aa0000> {{{#fff 독립사회민주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aacc66> {{{#fff 기타}}} || || 165석 || 91석 || 75석 || 44석 || 22석 || 19석 || 7석 ||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11월 혁명]]에 의해 처음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헌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독일 역사상 최초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으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고 선거연령이 25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 당시 투표율은 83%를 기록하였다.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이 37%를 득표하며 제1당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독일 중앙당|중앙당]], [[독일 민주당|민주당]]과 흑적황 연정을 구성했고, [[필리프 샤이데만]]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후 개각을 거치며 총리는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로 교체되었지만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정이라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범을 지지한 친(親)민주주의 정당들이 압도적, 안정적 과반을 유지한, 사실상 유일한 시기였다. === 제2대 총선 (1920) === ||<-9> 1920년 6월 6일[br]{{{-2 총원: 459석, 과반의석: 230석}}} || ||<-3><#221144> '''[[콘스탄틴 페렌바흐|{{{#fff 페렌바흐}}}]] {{{#fff 내각}}}'''[br]{{{-2 {{{#fff '''168석'''}}}}}} ||<-6> 야당[br]{{{-2 291석}}} ||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ffca08> [[독일 민주당|{{{#000 민주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신임 인준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거나 [[내각불신임결의]]에서 정부 측에 힘을 실어주는 등, 사실상 '''[[신임 공급]]에 준하는 협력'''이 이뤄진 경우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각의 핵심 정책 추진을 돕거나 일부 당원이 당의 묵인 하에 개인 자격으로 내각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aa0000> {{{#fff 독립사회민주당}}}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aacc66> {{{#fff 기타}}} || || 65석 || 64석 || 39석 || 103석 || 83석 || 71석 || 20석 || 4석 || 10석 || 제헌의회에서 헌법이 제정된 이후, 새로운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국가의회(Reichstag)를 선출한 첫 선거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립정부는 출범 1년여만에 과반을 상실하였다. 이에 제1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기존의 3당 연정에 [[독립사회민주당]]을 포함하는 연립정부를 구상하였으나 독립사회민주당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독일 인민당|인민당]]을 포함해 과반을 확보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으나 이는 정작 사회민주당에서 미온적이었다. 결국 [[독일 중앙당|중앙당]]-[[독일 인민당|인민당]]-[[독일 민주당|민주당]]이 소수연정을 구성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이 내각에는 참여하지는 않되 외곽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차대전 전후협상 문제로 연립정부 내 이견이 커지자 페렌바흐 내각은 1년만에 사임하였다. 이후에도 가까스로 연정이 세워졌다가 [[내각불신임결의]]나 내부 이견으로 내각이 교체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 제3대 총선 (1924.5) === ||<-9> 1924년 5월 4일[br]{{{-2 총원: 472석, 과반의석: 237석}}} || ||<-3><#221144> '''[[빌헬름 마르크스|{{{#fff 마르크스}}}]] {{{#fff 2기 내각}}}'''[br]{{{-2 {{{#fff '''138석'''}}}}}} ||<-6> 야당[br]{{{-2 334석}}} ||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ffca08> [[독일 민주당|{{{#000 민주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신임]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885522> {{{#fff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aacc66> {{{#fff 기타}}} || || 65석 || 45석 || 28석 || 100석 || 95석 || 62석 || 32석 || 16석 || 29석 || 선거 직전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를 중심으로 소수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독일 중앙당|중앙당]], [[독일 인민당|인민당]], [[독일 민주당|민주당]]의 합산 의석은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독일 공산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고,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을 통해[* 1923년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사실상 불법화되었고, [[히틀러]]를 비롯한 당 간부들은 체포되었다. 이에 나치당 잔존 세력은 [[https://en.wikipedia.org/wiki/German_V%C3%B6lkisch_Freedom_Party|독일민족자유당]]과 통합하여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나치당원들은 우회적으로 원내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히틀러가 석방되고 나치당이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어 나치당에 흡수되었다.] 나치당원들이 처음으로 원내에 진입하며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는 것은 선거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결국 별수없이 내각의 일부만 교체하여 동일한 정당 구성으로 빌헬름 마르크스 2기 내각이 출범하였다. === 제4대 총선 (1924.12) === ||<-9> 1924년 12월 7일[br]{{{-2 총원: 493석, 과반의석: 247석}}} || ||<-4><#707070> '''[[한스 루터|{{{#fff 루터}}}]] {{{#fff 1기 내각}}}'''[br]{{{-2 {{{#fff '''242석'''}}}}}} ||<-5> 야당[br]{{{-2 251석}}} ||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ffca08> [[독일 민주당|{{{#000 민주당}}}]][*신임] ||<#885522> {{{#fff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aacc66> {{{#fff 기타}}} || || 103석 || 69석 || 51석 || 19석 || 131석 || 45석 || 32석 || 14석 || 29석 || [[빌헬름 마르크스]] 2기 내각이 소수연정이라는 한계로 인해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자, 7개월 만에 의회를 해산하여 실시된 선거이다. 1921년부터 독일 경제를 추락시킨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점차 진정되며 독일 공산당과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의 의석이 크게 줄었다. 그 결과, 당적이 없음에도 이전 내각들에서 장관으로 중용되어오던 [[한스 루터]]를 중심으로, [[독일 민주당|민주당]]의 지원을 받는 [[독일 국가인민당|국가인민당]]-[[독일 중앙당|중앙당]]-[[독일 인민당|인민당]]-[[바이에른 인민당|바이에른 인민당]] 소수연정이 구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로카르노 조약]]에 반대해 [[독일 국가인민당|국가인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했고, 이후 정국 불안정 속에서 개각이 여러차례 이뤄졌으나 모두 단명하였다. === 제5대 총선 (1928) === ||<-9> 1928년 5월 20일[br]{{{-2 총원: 491석, 과반의석: 246석}}} || ||<-5><#e3000f> '''[[헤르만 뮐러|{{{#fff 뮐러}}}]] {{{#fff 2기 내각}}}'''[br]{{{-2 {{{#fff '''301석'''}}}}}} ||<-4> 야당[br]{{{-2 190석}}} ||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ffca08> [[독일 민주당|{{{#000 민주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885522> [[나치당|{{{#fff 나치당}}}]] ||<#aacc66> {{{#fff 기타}}} || || 153석 || 61석 || 45석 || 25석 || 17석 || 73석 || 54석 || 12석 || 51석 || 4년 전 선거에 비해 사회민주당이 22석을 늘리며 독보적인 제1당이 되었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독일 중앙당|중앙당]], [[독일 인민당|인민당]], [[독일 민주당|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이 연립하는 대연정인 [[헤르만 뮐러]] 2기 내각이 성사되었다. 헤르만 뮐러 2기 내각은 1년 9개월 동안 유지되며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존속했으나 결국 1930년 3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사임한다. 이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처음으로 헌법 상의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하여 의회의 인준 없이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하는 '대통령 내각'을 구성한다. 이 내각에는 [[독일 중앙당|중앙당]], [[독일 인민당|인민당]], [[독일 민주당|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 그 외 보수우파 소수정당들이 참여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브뤼닝 1기 내각부터는 모든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서만 세워졌다.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이 일상(...)이 된 것이다. 즉, 공식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얻어 출범한 내각은 뮐러 2기 내각 이후로는 없었다. == [[대공황]] 이후 == === 제6대 총선 (1930) === ||<-10> 1930년 9월 14일[br]{{{-2 총원: 577석, 과반의석: 289석}}} || ||<-5> '''[[하인리히 브뤼닝|브뤼닝]] 1기 내각'''[*비상대권A 의회의 동의 없이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선거 이전의 내각이 교체 없이 지속됨] [br]{{{-2 '''183석'''}}} ||<-5> 야당[br]{{{-2 394석}}} ||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ffca08> {{{#000 국가당}}}[*A [[독일 민주당|민주당]]이 다른 군소정당과 합당하여 창당한 정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aacc66> {{{#fff 기타}}}[* 중간계급제국당 23석, 기독교국가농민당 19석, 보수인민당 4석]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신임] ||<#885522> [[나치당|{{{#fff 나치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국가인민당은 본래 1930년 3월에 결성된 브뤼닝 1기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국가인민당 소속 장관이 1930년 7월 탈당하여 기독교국가농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야당이 되었다. 국가인민당 내 대다수는 애초부터 브뤼닝 내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aacc66> {{{#fff 기타}}} || || 68석 || 30석 || 20석 || 19석 || 46석 || 143석 || 107석 || 77석 || 41석 || 26석 || 브뤼닝 내각의 국정운영은 입법이 아닌, 입법부를 거치지 않는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에 의존해 이뤄졌다. 급기야 예산안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통과되기에 이르자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헌법에 따라 독일 공산당, 나치당, 국가인민당과 연합해 해당 대통령 비상대권을 무효화시키며 정부에 비협조하였다. 이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예 의회를 해산했고,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민심은 끊임없이 정국 불안정이 반복되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이 민심을 파고들며 선전하였고, 특히 나치당의 득표율은 2년만에 2.6%에서 18.3%로 수직상승했다. 이러한 나치당과 공산당의 상승세에 놀라 정국 안정을 급선무로 받아들인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브뤼닝 내각에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정치 노선을 전격 선회하였다.[* 심지어 브뤼닝 내각이 적극적으로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한 민심 이반이 심각했음에도 사회민주당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브뤼닝 내각은 국정운영에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 제7대 총선 (1932.7) === ||<-9> 1932년 7월 31일[br]{{{-2 총원: 608석, 과반의석: 305석}}} || || '''[[프란츠 폰 파펜|파펜]] 내각'''[*비상대권A] [br]{{{-2 '''37석'''}}} ||<-8> 야당[br]{{{-2 571석}}} ||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B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성립된 파펜 내각과 슐라이허 내각은 국가인민당 인사들을 장관직에 기용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가인민당이 여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인민당은 애초부터 두 내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특히 슐라이허 내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885522> [[나치당|{{{#fff 나치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ffca08> {{{#000 국가당}}}[*A] ||<#aacc66> {{{#fff 기타}}} || || 37석 || 230석 || 133석 || 89석 || 75석 || 22석 || 7석 || 4석 || 11석 || 우익 권위주의 성격이 짙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 내각이 사회민주당의 협조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는 [[나치당]]에게 총리직을 제외한 장관직을 양보해서라도 보다 우익 성향이 짙은 정부가 자리잡기를 희망했다.] 이에 1932년 6월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을 활용해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였고, 연이어 의회까지 해산하면서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나치당]]이 37.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처음으로 원내 1당에 등극했다.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공산당]]의 의석을 합산하면 과반을 넘겼기에, 다른 정당들이 어떻게든 힘을 합쳐도 연정을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파펜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바탕으로 하는 임시방편으로서 유지된다. === 제8대 총선 (1932.11) === ||<-9> 1932년 11월 6일[br]{{{-2 총원: 584석, 과반의석: 293석}}} || || '''[[쿠르트 폰 슐라이허|슐라이허]] 내각'''[*비상대권B 의회의 동의 없이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새롭게 내각이 교체됨] [br]{{{-2 '''51석'''}}} ||<-8> 야당[br]{{{-2 533석}}} ||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B] ||<#885522> [[나치당|{{{#fff 나치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ffca08> {{{#000 국가당}}}[*A] ||<#aacc66> {{{#fff 기타}}} || || 51석 || 196석 || 121석 || 100석 || 70석 || 20석 || 11석 || 2석 || 13석 || 1932년 9월, [[독일 공산당]]이 파펜 내각에 대해 [[내각불신임결의]]를 발의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물론 [[나치당]]도 불신임에 찬성하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했다. 이에 4개월 만에 총선이 다시 열렸다. [[나치당]]은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4개월 전보다 득표율 및 의석수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정국은 여전히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교착 상태였다. 이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내 전직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회복을 위해 히틀러의 총리 임명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의 설득 끝에 1933년 1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하였다. === 제9대 총선 (1933.3) === ||<-9> 1933년 3월 5일[br]{{{-2 총원: 647석, 과반의석: 324석}}} || ||<-2><#885522> '''[[아돌프 히틀러|{{{#fff 히틀러}}}]] {{{#fff 내각}}}''' [br]{{{-2 {{{#fff '''340석'''}}}}}} ||<-8> 야당[br]{{{-2 307석}}} || ||<#885522> [[나치당|{{{#fff 나치당}}}]] ||<#00aeef> [[독일 국가인민당|{{{#fff 국가인민당}}}]] ||<#e3000f>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880000> [[독일 공산당|{{{#fff 공산당}}}]] ||<#221144> [[독일 중앙당|{{{#fff 중앙당}}}]] ||<#77eeff> {{{#000 바이에른[br]인민당}}} ||<#ffca08> {{{#000 국가당}}}[*A] ||<#007fff> [[독일 인민당|{{{#fff 인민당}}}]] ||<#aacc66> {{{#fff 기타}}} || || 288석 || 52석 || 120석 || 81석 || 73석 || 19석 || 5석 || 2석 || 7석 ||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된 직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다시 의회를 해산하며 치러진 선거로, '''바이마르 공화국 최후의 선거'''였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나치의 [[SA|돌격대]]와 [[슈츠슈타펠|친위대]]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며 테러를 자행하였다.[* 사회민주당에는 [[국기단]]이, 공산당은 전위대가 당집회를 보호하였지만 행정력까지 동원해 무작정 체포하는 탓에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중앙당 계열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자 나치 정부는 중앙당까지 탄압하였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에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당 정부는 이를 [[독일 공산당]]의 소행으로 단정하며 공산당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전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명을 체포했다. 다만 사회민주당으로의 좌파진영 표 결집을 막기 위해 공산당을 불법화하지는 않았다. [[나치당]]은 4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자그마치 288석을 확보했고, 연립여당 [[독일 국가인민당|국가인민당]]의 의석수를 합쳐 과반을 달성하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s-3.4|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 처음 총리직에 임명되었을 때는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의 의석 합이 과반에 못미쳤었다.]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한 나치당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묵인 속에 속전속결로 [[수권법]]을 발의하였다. 야당에 대한 탄압과 회유 속에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나치당의 권력은 공고해졌고 이후의 선거는 모두 나치당만이 존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일당독재 속에서 진행되었다. == 관련 문서 == * [[독일 총리]] * [[독일 대통령]] * [[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분류:바이마르 공화국]][[분류:독일의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