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tv.pstatic.net/yonhapnews_28367729.jpg|width=150]] 朴永出 1909년 ~ 1975년 5월 20일 [[대한민국]]의 전 종교인, [[정치인]]이다. 1909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연수생을 수용하기 위해 숭덕 학사와 숭덕 교회를 설립했다. 1940년대 초반 숭덕 교회 [[목사]]로 취임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우익 정당인 [[대한국민당]]에 몸담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의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정우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2년경 대한국민당을 탈당하여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국회운영위원회|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5년 자유당 정치훈련원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측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출마했는데, 당시 박영출은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장으로서 "가톨릭 교인인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 장면 [[박사]]가 당선되는 날에는 우리나라를 [[바티칸]]의 [[교황청]]에 팔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회(현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계]] 밀수 사건으로 기소되어 1958년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자격이 상실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대한민국 참의원|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흥당 후보로 경상북도 의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오상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1967년)|신민당]] [[우홍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목사 일에 전념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