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박충식(동명이인))] ||
'''{{{#000 박충식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fff [[삼성 라이온즈|{{{#ffffff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 || || [[김성길]][br](1989~1992) || {{{+1 →}}} || '''{{{#0047ab 박충식[br](1993~1999)}}}''' || {{{+1 →}}} || [[전병호]][br](2000~2008) || ||<-5> '''{{{#ffffff [[해태 타이거즈|{{{#ffffff 해태}}}]]{{{/}}}[[KIA 타이거즈|{{{#fff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이강철]][br](1989~1999) || {{{+1 →}}} || '''{{{#f01e23 박충식[br](2000~2001)}}}''' || {{{+1 →}}} || [[이강철]][br](2002~2005) || ||<-5> '''{{{#ffffff [[KIA 타이거즈|{{{#fff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15번}}}''' || || [[강영식]][br](2000) || {{{+1 →}}} || '''{{{#f01e23 박충식[br](2002~2003)}}}''' || {{{+1 →}}} || [[허준(1970)|허준]][br](2004)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5100201000128600006621.jpg|width=100%]]}}} || ||<-2> '''{{{+2 박충식 }}} [br] 朴衷湜 | Park Chung-Sik''' || ||<|2> '''출생''' ||[[1970년]] [[9월 3일]] ([age(1970-09-03)]세) || ||[[광주광역시]] [[동구(광주)|동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광주중앙초 - [[무등중학교|무등중]] -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 - [[경희대학교 야구부|경희대]][* 1989학번]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언우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s-3.2|1993년 2차 1라운드]] (전체 7번, [[삼성 라이온즈|삼성]]) || ||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3~1999)''' [br] [[해태 타이거즈|해태]]-[[KIA 타이거즈]] (2000~2003) || || '''지도자'''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9~)[*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자격증 취득은 2021년.] || || '''프런트''' ||[[질롱 코리아]] 단장 (2018~2019) || || '''경력'''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 (2012~2016) || [목차] [clearfix] == 개요 == ## 현 나무위키 편집지침에서 상단 요약문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축구선수 개요문단 선수 비교 및 서열 서술(ex: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21세기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등)은 금지된 상태입니다. 볼드체 사용하지 마세요. 또 개요부분에는 간략한 설명만 해주세요.## >당시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까지도 던졌을 거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던지겠느냐고? 물론이다. 그게 내가 아는 야구다. > -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회상하며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출신 [[야구 감독|감독]]. [[이승엽]]이 만개하기 전, 원조 라이언 킹으로도 불린다.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시절 ===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으로 [[광주 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뛰었다. 광주상고는 198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 여담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가 청룡기 출전 前, 광주상고가 대통령배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광주일고는 선수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얼차려를 실시했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http://culture.joins.com/sub/sub4_2_view.asp?num=450&page=8|관련기사]]]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인 활약은 없었다.[*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학교]]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4년에 새로 창단한 [[송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계속 팀을 이끌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대학 리그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1차 지명에서 [[이종범]]과 [[성영재]]를 놓고 고민하다 이종범을 지명한다.[* [[성영재]]는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박충식과 성영재 모두 말년을 고향팀에서 보냈지만 박충식이 부상을 자주 당한 관계로 비율스텟은 박충식이, 공헌도는 성영재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연고 구단인 해태에서조차 전혀 주목하지 않은 박충식을 지명한 것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박충식 본인도 삼성이 2차 1라운드라는 빠른 순번에 자신을 지명한 것에 놀랐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다만, 경희대 야구장으로 삼성스카우터가 몇번 찾아온적은 있다고 하며, 삼성에서도 제구력 좋은 것 하나 믿고 뽑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당시 [[경희대학교 야구부|경희대]] 선배들의 구타와 기합을 무서워해서 야구부 기숙사를 탈출하다가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 기숙사를 탈출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LG 트윈스]])과 종종 마주쳤다고 한다. 박충식에게 대학야구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며 대학 중퇴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이 훗날 프로야구선수, 프로야구 [[선수협]] 사무총장, 대학야구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선수들의 권리 보호 및 복지 증진, 구타 등의 악습을 폐지시키는 데 밑바탕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이후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과도한 기합과 구타를 경험하며 야구계의 악습 폐지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파일:external/thumbnews.nateimg.co.kr/2012222173632kkg6kan_T5_1456.jp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1n74113_2.jpg]]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198/1234415841_file_image_1.jpg]] '''입단 첫해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거두면서 언더스로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등판,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181구''' 2실점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삼성 팬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91&issue_item_id=6742&office_id=224&article_id=0000001380|당시 그의 활약상]])[*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이건열]]이 술회하기를 도저히 박충식의 공을 때릴 자신이 없어 거울을 보면서 박충식의 투구를 맞는 연습을 미리했다고 한다. 룸메이트였던 [[홍현우]]는 '선배님 뭐 하세요'하고 웃으면서 물어봤던 건 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양준혁이 술회하길 이 당시 진루타를 치는 데 집중했어야 하나 송유석의 공을 만만히 보고 욕심을 부리다가 파울 플라이를 치면서 결국 3차전을 승리로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욕심이 어떻게 보면 박충식의 선수생명을 갉아 먹게 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감정이 있다고 밝혔다.] . 1994년에도 14승을 올리면서 [[성준(야구선수)|성준]]과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기록했고, 1995년과 1996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각각 9승과 8승 12세이브,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556|1990년대 중반 삼성의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했다. [[삼성 라이온즈/1997년/5월/4일|1997년 5월 4일]] 삼성이 [[정경배|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운 경기의 승리투수이기도 하다.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엔 투구각도가 딱 사이드암이었다.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바뀐 건 프로 2년째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1994년]]부터.] 최고 구속이 140㎞/h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 최근에는 [[임창용]], [[심창민]] 등 사이드암이라도 150㎞/h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꽤 있지만, 1980-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는 직구의 구속은 120-130㎞/h대에 불과 하였고, 슬라이더나 싱커 등 변화구 위주의 투수가 대부분이었다.]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99년]]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다가, 2000년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된다. 당시 삼성 구단에서는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야구)|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다.] === [[해태 타이거즈]] 시절 === [[파일:99박충식보상.jpg]]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12202163961006120.jpg]] [[선수협]] 파동과 열악한 해태의 재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중간계투]]로 나서서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홀드를,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한몫했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해 2003년은 재활로 보내며 결국 시즌 종료 뒤 은퇴하고, 가족들이 있던 [[호주]]로 건너갔다. 훗날 [[박동희(기자)|박동희]]와의 [[https://m.blog.naver.com/chesare7/50042504048|인터뷰]]에서 고향 팀으로 이적한 후 없다시피한 재활 시스템과 열악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개판 5분 전이었던 해태의 시설, 그리고 쌍팔년도 수준의 구타, 폭력에 황당했다고 밝혔다.[* 삼성에서는 부상 선수가 재활할 때 트레이너가 1:1로 붙어 직접 재활 프로그램을 짜 주고 관리해 줬는데 이에 반해 해태는 선수 스스로 정보를 얻어 직접 재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무등구장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 있었는데 역기에 무게추 대신 돌멩이가 올려져 있었다고...거기에 200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던 상명하복식 문화와 집합, 코칭스태프의 구타가 잦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해태로 트레이드된 [[손혁]]도 해태 합류를 거부하고 돌연 은퇴한 뒤 잠적해버렸을 정도였고 3년 후인 2003년에도 두산에서 기아로 트레이드된 [[최용호(야구)|최용호]] 역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기아의 구타와 악폐습은 박충식이 은퇴한 이후 [[김성한 구타 사건]]의 영향과 [[이종범]]이 주장을 맡을 당시 구타를 금지하면서 거의 사라졌고 미흡했던 트레이닝 시설 역시 2012년 [[기아 챌린저스 필드]]의 개장 이후로 해결되었다.] == 은퇴 이후 == [[호주]]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유소년 야구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가 2011년 10월에 귀국했고, 11월에 [[양준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창단한 '멘토리 야구단[* 저소득층 자녀나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뤄진 유소년 야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18년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 창단하는 한국 선수팀 [[질롱 코리아]]에 초대 단장으로 취임했으나 1년 만에 사임했다. 2019년에 새롭게 창단되는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529&aid=0000055333|인터뷰]] 그러나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 정식 등록이 되지 않다가[* 협회 사이트에는 2020년에는 전 삼성, KIA 선수였던 [[유용목]](현 신성대 감독)이, 2021년에는 박상민 전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코치가 각각 감독으로 나와 있었다.] 2021년 8월이 돼서야 비로소 등록이 되었다. 2021년 11월 9일에 열린 두산과 삼성의 KBO 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에 앞서 시구자로 낙점되었는데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투혼의 피칭을 펼쳤을 당시의 유니폼을 입고 시구에 나섰다.[* 이 경기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라팍]]에서 열린 첫번째 포스트시즌 경기 이기도 했다.] === 선수협 사무총장 === 2012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회장인 [[박재홍(야구)|박재홍]]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그였기에 오히려 사무총장으로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그를 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권시형 전 사무총장이 측근을 통해 '박충식이 거액의 도박빚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박충식은 도박은 일절 인한 사람이다. 완전히 음해.] 또한 권시형 파에 속했던 [[현재윤]], [[이혜천]], [[박명환]], [[김상현(1980)|김상현]] 등이 이사회에 참여도 하지 않고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진행되었다는 주장과 긴급이사회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적힌 반대성명을 내 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90357|박재홍이 인터뷰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언론에 퍼졌던 박충식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나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했다.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6.jpg]] 현역 선수 시절. 가운데가 박충식이다.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5100201000128100006571.jpg]] 2015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이만수]]와 [[양준혁]]과 함께 초청되어 시구를 맡았다. == 연도별 주요 성적 == ||<-17>
{{{#ffffff 역대 기록}}}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1993 ||<|7> [[삼성 라이온즈|삼성]] || 32 || 155⅔ || '''14'''[br](3위) || 7 || 2 || - || 0.667 || 2.54 || 122 || 10 || 51 || 97 || 51 || 44 || 1.04 || || 1994 || 32 || '''203⅓'''[br](3위) || 14 || 8 || 3 || - || 0.636 || '''2.35'''[br](2위) || 174 || 16 || 38 || 130 || 64 || 53 || 0.99 || || 1995 || 19 || 128 || 9 || 6 || 0 || - || 0.600 || 3.16 || 106 || 10 || 39 || 72 || 55 || 45 || 1.04 || || 1996 || 29 || 89⅔ || 8 || 2 || '''12'''[br](5위) || - || 0.800 || 2.01 || 67 || 4 || 14 || 56 || 23 || 20 || 0.83 || || 1997 || 31 || '''170⅔'''[br](5위) || 13 || 6 || 2 || - || 0.684 || 4.32 || 174 || 18 || 45 || 92 || 91 || 82 || 1.19 || || 1998 || 24 || 159⅓ || 11 || 10 || 0 || - || 0.524 || 3.25 || 163 || 14 || 40 || 100 || 68 || 61 || 1.18 || || 1999 || 3 || 4 || 0 || 0 || 0 || - || 0.000 || 0.00 || 2 || 0 || 1 || 3 || 0 || 0 || 0.75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2000 ||<|4> [[KIA 타이거즈|KIA]] ||<-15> 1군 기록 없음 || || 2001 || 23 || 31 || 3 || 2 || 3 || 1 || 0.600 || 3.19 || 23 || 5 || 7 || 18 || 11 || 11 || 0.87 || || 2002 || 48 || 47⅔ || 5 || 3 || 8 || '''12'''[br](3위) || 0.625 || 3.97 || 46 || 5 || 8 || 33 || 21 || 21 || 1.07 || || 2003 ||<-15> 1군 기록 없음 || ||<-2> '''[[KBO 리그|KBO]] 통산''' [br] (11시즌) || 241 || 989⅓ || 77 || 44 || 30 || 13 || 0.636 || 3.07 || 877 || 82 || 243 || 601 || 384 || 337 || 1.05 || ||<-3>
{{{#ffffff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 1993년 || 7완투 || 2완봉 || || 1994년 || '''13완투'''[br](2위) || 3완봉 || || 1995년 || 4완투 || 2완봉 || || 1996년 || 2완투 || 0완봉 || || 1997년 || 3완투 || 0완봉 || || 1998년 || 4완투 || 0완봉 || || '''[[KBO 리그|KBO]] 통산''' || 33완투 || 7완봉 ||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KIA 타이거즈/선수단]]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야구 감독]][[분류:동구(광주) 출신 인물]][[분류:1970년 출생]][[분류:1993년 데뷔]][[분류:2003년 은퇴]][[분류:삼성 라이온즈/은퇴, 이적]][[분류:우완 투수]][[분류:우언우타]][[분류:해태-KIA 타이거즈/은퇴, 이적]][[분류:광주중앙초등학교 출신]][[분류:무등중학교 출신]][[분류:광주동성고등학교 출신]][[분류:경희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