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 목록/한국사]]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전쟁)] [include(틀:평원왕)] ||<-3> {{{+1 '''배산 전투[br]拜山戰鬪'''}}} || || '''시기''' ||<-2> [[577년]](?) || || '''장소''' ||<-2> 배산[* 혹은 이산.]의 벌판 || || '''원인''' ||<-2> 사료 부족으로 인한 원인 불명[* [[고보녕]]을 두고 일어난 두 나라의 갈등, 고구려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북주의 침입 등 여러가지 가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다.] || || '''교전국''' ||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고려'''[br](공격)[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승'''}}}}}} || '''[[북주]]'''[br]{{{-3 (방어)}}}[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패'''}}}}}} || || '''지휘관''' ||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평원왕|평원태왕]]'''[br]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온달]]''' || 지휘관 불명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불명 || || '''결과''' ||<-2> '''[[고구려]]의 대승''' || || '''영향''' ||<-2> '''[[온달]]의 정치적 입지 강화''' || [목차] [clearfix] == 소개 == [[고구려]]와 [[북주]] 간의 야전이다. 다만 기록이 무척이나 부실한데 《삼국사기》 본기엔 기록이 없으며,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만 짤막하게 언급된다. 그 외에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나 [[이맥]]이 썼다는 《태백일사》[* [[위서]]인 《[[환단고기]]》에도 언급되는 그 책이다.]에도 해당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고, 《태백일사》의 경우엔 애초에 위서인 《환단고기》에 수록된 부분이므로 신뢰도가 없다. == 전투 ==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나 《[[동사강목]]》에는 평원왕 19년(577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북주에 의해 [[북제]]가 멸망한 577년 정월부터 [[우문옹|무제]]가 사망한 578년 6월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일단 《[[동사강목]]》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했을 때, [[북주]]의 [[우문옹]]이 군대를 내어 [[요동]]을 침공했고, 이때 [[평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병력의 수는 불명이다. >이때 북주의 [[우문옹|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오자,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떨쳐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 >'''《삼국사기》 <온달 열전>.''' ---- >그 뒤에 주(周)의 무제(武帝)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 >'''《조선상고사》''' 양측의 군대가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마주하게 되고 이어 [[회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이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 수십여명의 목을 베어 승기를 잡고, 이에 [[고구려]]군의 사기가 차올라 적들을 쓸어버렸다고 한다. == 밝혀지지 않은 것들 == * 북주가 어떤 이유에서 침공했는지는 알수가 없다. 《[[조선상고사]]》에는 고구려의 강함을 경계해 요동을 침공했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북주가 [[랴오닝 성|요서]]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요서의 패자를 가리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북한의 역사학자인 손영종은 [[북제]]의 영주자사 [[고보녕]]이 [[북주]]에 반기를 들었고, [[평원왕]]이 이를 지원해주다 북주와 충돌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 *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보고 있는 완질본은 [[조선시대]]때 재판한 '옥산서원본'과 '정덕본'이다. 이 두 판본에는 온달이 출전한 곳이 배산(拜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981년에 발견된 '성암본'에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암본'의 경우에는 앞의 두 판본과 달리 [[고려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이산이 옳은 표기고, 배산이 [[오기]]인 것인지, 아니면 배산이 이산의 이명인지[* 이 경우 배산(拜山)의 '배(拜)' 는 고구려어로 배우다(肄, 익힐 이, 배울 이)를 의미하는 단어가 된다.], 혹은 이산이 [[오기]]인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다. * 또한 배산이라는 위치도 현재까지 알 수가 없다. == 여담 == *《통천문》이라는 역사소설의 초반부가 해당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재만 차용한 것이고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9권, 21권에서 나온다. * [[달이 뜨는 강]]에서는 주인공 온달의 가장 중요한 전투인 만큼 당연히 나온다. [[분류:한국사/전투]][[분류:평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