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include(틀:백제삼서)] [목차] == 개요 == 百濟三書 [[백제]] 시대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묶어서 부르는 말. 이 책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일부 기록이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일각에선 이 책들이 방송에도 거의 노출된 적이 없는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 격인 [[정창원]]에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것 아니냔 희망 섞인 추측을 하기도 하나, 한 학자가 정리한 정창원 고문서 [[https://m.yna.co.kr/view/AKR20121122111300005|목록]]에 따르면 《백제삼서》는 없다. 신라시대 [[민정문서]]도 정창원에서 이미 1930년대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즉,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으나 현재로선 희박한 시각으로, 일본서기가 만들어진 이후로 그리 중요하게 생각된 책이 아니었고 따라서 책이 많이 인쇄되지않아 전란이나 지진 등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 특징 ==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 자체가 당대 일본 편찬자들의 덴노 중심주의, 애국 고취 --국뽕-- 의도가 강하게 담겨있다보니, 해당 서적들을 인용한 기록들을 보면 당시 [[백제]]가 마치 일본의 신하국이며, 거의 모든 일을 일본에 결재를 받고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서술이 윤색됐다. 때문에 비판 측에선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오히려 [[백제]]가 한 일을 마치 자신들이 한 것처럼 각색해서 기록해 놓았다는 의혹도 강하게 제기하는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 중 하나로 일본을 '고귀한 나라(貴國)' 혹은 '[[천조|하늘이 내려준 정권(天朝)]]'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면 [[고구려]]는 '짐승의 나라(狛)'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평양성 전투(371년)|371년 평양성에서 일어난 전투]] 이후 백제, 고구려 양 국가간의 악감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나, 당연히 일본측 입장에서 보자면 고구려와 그렇게 척을 질 사이가 아니기에,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백제 측의 사료를 인용하면서 마치 자신들과 연관 되었다는 듯이 각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이러한 오류는 따지고 보면 나름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야마토]] 정권의 수뇌부에 대거 흡수된[* 다만 백제계를 비롯한 한반도 출신 [[도래인]] 귀족이 제법 있었던건 맞아보이나, 비율이나 위상에 대해선 지금도 갑론을박이 좀 있다.] 국가였을 가능성하에, 이념적으로 재무장할 필요성이 있었던[* 663년 [[백강 전투]] 참패 이후 일본은 당과 신라 세력이 일본에도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를 대비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중앙집권적 율령국가 체제가 갖춰지게 된다.] 일본의 지배층들과 역사를 집필한 관료들은, 당대 상당수 귀족 계급들의 출신 성분인 백제계라는 정통성까지 자연스레 품으면서 옛 백제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투영했을 확률이 있다고 봐야 한다. 즉, 《일본서기》의 오류는 그들의 중심지가 반도 백제국에서 열도 일본국으로 갑작스레 바뀌다보니 빚어진 서술상의 혼선에, 일본이 반도 및 대륙과 결별하여 독립국가로 거듭나면서 [[일본 황실]] [[성역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프로파간다]]적 작업이 더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주장이다. 물론 백제삼서 편찬 당대엔 존재하지도 않는 천황과 일본이라는 호칭을 백제기를 인용하며 기술한 내용 등을 보면, 상술된 내용과는 별개로 사후에 의도적으로 사서를 윤색해 프로파간다용으로 활용한 것 역시 맞다고 볼 수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백제기, version=23)] [[분류:삼국시대]] [[분류:없어진 역사책]] [[분류:일본서기]] [[분류:백제의 도서]][[분류:한국의 역사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