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2> '''{{{+1 范質[br]범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3A151BB-3AD8-4DCE-AEEC-084D7FD97ACD.jpg|width=100%]]}}} || || '''작호''' ||노국공(魯國公) || || '''성씨''' ||범(范) || || '''이름''' ||질(質) || || '''자''' ||문소(文素) || ||<|2> '''출생''' ||911년 || ||[[후량]] 대명부(大名府) 종성현(宗城縣) || ||<|2> '''사망''' ||964년 || ||[[북송]] 개봉부(開封府) || || '''부친''' ||범수우(范守遇) || || '''국적'''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 → 북송(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재상. 자는 문소(文素). == 생애 == === 초기 === 범질은 911년에 범수우(范守遇)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명부(大名府) 종성현(宗城縣) 출신이었다. 범질은 9살에 능히 글을 지었고, 13살에 상서를 익히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후 [[후당]] 장흥 4년(933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충무군(忠武軍)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고, 봉구현령(封丘縣令)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범질의 임용을 담당했던 화응(和凝)이라는 관리가 범질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여, 범질이 지은 시문을 열람하고는 그의 재주를 총애하여 13등으로 급제시켰다. 이것은 화응 본인이 과거시험에서 13등으로 급제하여 대신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화는 전의발(傳衣鉢)이라고 칭하는데, 본디 전의발은 불교에서 제자에게 학문이나 도를 전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지공거와 같은 등급으로 급제한 사람을 전의발이라고 불렀다. === [[후진]] 시기 ===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들어섰을 때, 범질은 뛰어난 문장력을 발휘하여 당시 후진의 재상이었던 상유한에게 그 문장을 인정받아 감찰어사가 되었으며, 상유한의 주청으로 태령 절도사와 진창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상유한이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면서 범질은 주객원외랑, 직사관으로 승진하였고, 한림학사, 비부낭중, 지제고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후진 말기, 거란이 후진의 변경을 침공하자, 당시 황제였던 [[석중귀]]가 [[유지원]] 등 15명의 장수에게 거란을 막을 것을 명령하는 한편, 학사들을 불러 조칙을 작성할 것을 명하였다. 범질은 궁성이 이미 닫혔는데 학사들을 다시 모으면 기밀이 누설될 것이라 우려하여, 홀로 조칙을 작성하여 석중귀에게 바쳤는데, 이때 뛰어난 문장력으로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시기 ===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한 뒤, 범질은 중서사인, 호부시랑이 되었다. 그리고 후한 말에 [[곽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한 조정에서 범질에게 사자를 보내 범질이 쓴 조서를 통해 군사업무를 처리하였다. 곽위는 조령을 기초한 사람이 범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범질을 실로 재상이 될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뒤에 곽위가 군사를 일으킬 때 범질은 민간에 숨어다녔는데, 곽위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제발로 곽위를 찾아간다. 곽위는 범질이 왔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하여, 자신의 포의를 벗어 범질에게 입혀주었다. 또한 곽위는 그에게 태후의 명령서를 짓도록 하였고, 범질은 곽위의 청을 들어주어 그의 신임을 얻었다. === [[후주]] 시기 ===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후주의 초대 황제인 [[태조(후주)|태조]]이다. 후주가 건국되자, 범질은 중서시랑, 평장사, 집현전 대학사가 되었고 참지추밀원사를 겸임하였으며, 뒤에는 좌복야 겸 문하시랑, 평장사, 감수국사로 승진하였다. 범질은 곽위의 고평 정벌에 참가하고 사도, 홍문관 대학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세종(후주)|세종]] 치하에서는 수주(壽州)와 회남 정벌에 참가하였다. 범질은 재상으로서 세종에게 법률이 번잡하고 경중이 근거하는 바가 없어서 관리들이 이로 인해 간사한 짓을 일삼는다고 상주하여, 세종이 범질에게 특명을 내려 자세한 심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회남 정벌 당시 범질이 참가했는데, 이때 많은 조서를 범질이 작성하였다. 범질의 뛰어난 문장력은 회남에도 전해져 회남의 문사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범질이 세종을 따라 처음 회남 정벌에 참가할 때, 세종은 양주까지 정벌할 뜻이 있었지만, 범질은 [[왕부(북송)|왕부]]와 함께 회남에 군대를 너무 오래 투입했다고 간언하여, 결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세종이 다시 회남을 정벌할 때는, 두의(竇儀)가 군사들의 보급에서 실책을 저질러 세종이 두의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범질이 두의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탄원하기도 하였다. 959년, [[공제(후주)|공제]]가 즉위하고, 범질은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소국공(蕭國公)으로 책봉되었다.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날 때 범질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진교의 변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계단에 내려가서 절을 하기도 하였다. === [[북송]] 시기 ===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이다. 이후 범질은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범질은 태조의 재상을 지내면서 조광의와 조광미에게 작위를 내리며, 황자와 황녀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작위를 줄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재상으로 [[여여경]]과 조보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범질은 장소, 유온수와 함께 옛날의 문물을 논의하며 남교행례도를 제정하여 태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범질은 태조에 의해 노국공(魯國公)으로 책봉되었다. 범질은 건덕(乾德) 2년(964년) 정월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강등되었으며, 9월에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범질은 장차 임종할 때, 자신의 아들인 범민(范旻)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묘비를 새기지 말 것을 타일렀다. 태조는 범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여 폐조하였으며, 범질에게 중서령을 추증하고, 비단 5백 필과 속맥을 각각 1백 석씩 내렸다. == 사후의 평가 == ||||{{{#!wiki style="margin:10px" ''' "능히 규구를 따르고 명성과 재능을 신중히 하며 깨끗한 절조를 지닌 재상들 중 범질보다 더 뛰어난 자는 없지만, 그가 세종에게 빚을 지고 한 번 죽었으니 애석할 따름이오." '''}}}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태종(송)|태종]] 조광의의 평가}}}}}} || ||||{{{#!wiki style="margin:10px" ''' "오대부터 주나라 세종에 이르기까지는 천하가 장차 안정되는 시기였다. 범질(范質), 왕부(王溥), 위인포(魏仁浦)는 세종에게 발탁되었고, 모두 재상의 그릇이 있었다. 태조가 황위에 오르며 좌명중신이 되었으니, 하늘의 뜻도 과연 사람의 능한 바를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범질은 유학자로서 군사에 정통하였고, 자신이 재상이 되자 청렴하고 신중하게 법도를 지켰다. 범질은 임종하며 후손에게 시호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타이르고 스스로 깊이 뉘우쳤다. 태종(太宗)은 범질을 평가하며 그가 세종에게 빚을 지고 한번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아아! 춘추필법에서는 현명한 이를 꾸짖었지만, 범질은 꾸짖음을 면할 수 있었구나!" '''}}}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송사]]의 평가}}}}}} || == 기타 == * 범질이 조정에 오를 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범질을 격려하자, 범질은 “관상을 잘 보는 이가 나에게 후일 재보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참으로 그 말과 같았으니, 배우지 않고서는 무슨 수로 정사를 처리하겠소?”라고 겸허하게 말하였다. * 범질이 천자의 칙령을 내릴 때마다 규율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자사와 현령들에게는 반드시 호구의 판적을 으뜸으로 조사하도록 명령하였고, 조정에서 매번 사자를 파견하여 민전을 시찰하고 옥송을 순시할 때, 범질은 이들을 모두 접견하여 천자가 우려하는 뜻을 진술한 뒤에 파견하였다. * 범질은 성품이 조급했고, 사람을 대면할 때 몹시 꾸짖기를 좋아하였다. 게다가 범질은 평소 청렴결백을 자임하여 사방에서 들어오는 뇌물을 거절하였고, 오대와 북송을 거치며 받은 녹봉과 하사품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범질 사후 집에 남아도는 재산이 없었을 정도. 범질은 집안 사람들에게도 엄격하여, 조카인 교서랑(校書郎) 범호(范杲)가 승진을 청하자, 범질은 시를 지어 범호를 타일렀고, 이때 범질이 지은 시가 당시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고 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11년 출생]][[분류:96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