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원사)] ---- ||이름||벨구테이(영문명: Belgutei)(몽골어: Бэлгүдэй)|| ||출생||[[1156년]]|| ||사망||[[1255년]] '''(향년 99세)'''|| ||부모||아버지 [[예수게이]], 어머니 [[소치겔]]|| ||형제||이복동생 '''[[칭기즈 칸]]'''|| [목차] == 개요 ==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예수게이]]의 서차남이자 [[칭기즈 칸]]의 배다른 형이었다.[* 다만 장남 벡테르와 함께 서자 취급을 받았기에 3남이지만 적장자였던 테무진을 형으로 대우해야 했다.][* 집사에서는 칭기즈 칸의 생년이 벡테르와 같은 115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나이로도 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생애 == 《[[원사(역사책)|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온화하고 인정이 많은 성격에 민첩하며 지략이 많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했으며, 체격이 크고 힘이 매우 강했다고 전한다.[* 뒤에 나오겠지만 칭기즈 칸이 자신이 천하를 쥘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벨구테이의 힘을 말했으니 확실히 힘이 굉장히 강했을 것이다.] 그는 특히 [[도끼]]를 잘 다루었는데, 도끼로 나무를 조각하는 취미가 있을 정도로 손재주도 좋았다. 이름의 표기는 대체로 영어로는 "벨구테이"(Belgutei)라 하며, 몽골어로는 "벨구테이"(Бэлгүдэй)라 한다. 《[[원사(역사책)|원사]]》 등의 중국 문헌에서는 "별리고태"(別里古台)로 표기된다. 벨구테이는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이었던 예수게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게이는 첫번째 부인인 [[소치겔]]로부터 벡테르와 벨구테이 등의 두 아들을 얻었고, 두번째 부인인 [[호엘룬]]으로부터는 [[테무진]]을 포함한 네 아들을 얻었다. 첫번째 부인이었는데도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호엘룬 소생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밀려나 [[서자]]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옹기라트의 지체높은 올쿠누드 집안 출신이었던 호엘룬과는 달리, 소치겔은 계급이 낮은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 인들에게 독살당하는 바람에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설상가상으로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트 씨족([[카마그 몽골]] 제2대 칸 [[암바가이 칸|암바가이]]의 씨족)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자 예수게이의 유족들은 초원을 떠나 험한 산림에 들어가 가난하고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예수게이의 아들들 중에서 최연장자로서 가장 덩치도 크고 힘도 강했던 벡테르가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위계질서를 무시한 채 [[이복동생]]이자 적장남이었던 테무진과 그의 친동생 카사르를 상대로 사냥감을 다투며 가장 노릇을 하려 하자 이에 발끈한 테무진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벡테르는 자신을 활로 겨누고 있는 테무진을 보고는 죽음을 직감했는지 도망가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핏줄이 이어지도록 동생인 밸구테이만큼은 살려달라고 말하고는 곧 살해당했다. 이 일로 호엘룬이 테무진을 크게 꾸짖자,[* 서형제에 벡테르가 먼저 심기를 건드렸다고는 해도 형제간의 살해라 그런지 키야트 씨족과 대립하던 타이치우드 씨족에서는 이를 두고 테무친을 비난하는데에 써먹었다. 즉 당시 몽골에서도 굉장히 비난받을 일이었다.] 벨구테이는 아마도 집안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테무진의 근친살인 행각을 변호해주었다. 비록 벨구테이는 테무진에게 친형 벡테르를 잃었으나 이후로는 이복동생 테무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심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장성한 테무진은 그럭저럭 세력을 회복하는 듯 싶었으나, 메르키트 씨족이 테무진을 습격하여 그 아내인 [[보르테]]를 빼앗아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벨구테이의 어머니인 [[소치겔]]도 함께 끌려갔다. 1182년경, 테무진은 '안다'(의형제)이자 절친이었던 쟈다란 씨족의 [[자무카]], 그리고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 흔히 토그릴 칸, 옹 칸이라고도 한다.] 등의 지원을 받아 메르키트를 보오라에서 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되찾았다. 이때 벨구테이는 포로들을 심문하여 자신의 어머니인 소치겔이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소치겔은 메르키트족들로부터 매우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늙고 가난한 남자의 첩이 되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고. 자신을 찾으러 온 벨구테이를 본 소치겔은 아들이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럽다며 숲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는데, 이후 행적은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행방불명 또는 자살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생모의 비참한 말로에 분노한 벨구테이는 메르키트족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고 한다. 납치 가담자들을 '친척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도륙'했고, 그들의 여자들 중 '품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은 모두 제 여자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여러 기록에서 침착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벨구테이가 이토록 분노한 경우는 이때밖에 없었다. 테무진 칸이 13익의 전투(1190년)에서 자무카에게 패배한 후, 보르지긴 오복에 속하는 오로오드 씨족과 망고드 씨족 등이 치노스 씨족의 남성들을 팽형에 처한 자무카의 잔인한 성격에 학을 떼고, 테무진에게 귀부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테무진이 속한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친척이었던 키야트 주르킨 씨족[* [[카마그 몽골]]의 건립자였던 [[카불 칸]]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용맹무쌍하여 몽골 울루스 사람들이 '''키얀''', 즉 '급류'라고 불렀다. 이 '키얀'의 복수형이 '키야트'였고, 카불 칸의 자손들은 키야트 씨족으로 불렸다. '주르킨' 혹은 '유르킨' 씨족은 카불 칸의 장남이었던 오킨 바르칵의 후예들이었다. 따라서 카불 칸의 차남 [[바르탄 바아투르]]의 3남 [[예수게이]]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보다 서열이 높았다.]이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집안 어른들에게 술을 올릴 때,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보다 명목상 항렬이 높은 키야트 주르킨 씨족의 어른들에게 먼저 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벨구테이는 이를 막으려다가 주르킨 씨족의 장사였던 씨름꾼 부리가 휘두른 칼에 맞아 팔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해 키야트 보르지긴과 키야트 주르킨 사이에 한바탕 패싸움이 일어났다. 테무진은 벨구테이가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노발대발하여 주르킨 씨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했으나, 벨구테이는 >"나 하나 때문에 형제들간에 불화가 생겨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며 테무진을 말렸다. 이에 테무진은 마음을 다잡고 카마그 몽골 연맹의 결속을 유지했다. 이 일화는 당시 몽골인들에게 인상깊게 기억되었는지 《[[원사(역사책)|원사]]》에서도 따로 기록되었다. 1194년, 테무진 칸이 [[금나라]]와 연합하여 [[타타르]]를 정벌한 일('''코소토 시투엔 전투''')을 계기로 다시 초원의 강자로 떠오른 후에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항하던 주르킨 씨족을 토벌하여 그 족장인 사차 베키를 죽였다('''데룬 볼닥 전투'''). 이때 테무진은 벨구테이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혔던 씨름꾼 부리를 사로잡은 후, 그를 벨구테이의 손으로 죽이도록 해주었다. 또한 1204년 동나이만 정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테무진 칸의 통일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206년 경, 쿠릴타이를 통해 [[몽골 제국]]을 선포하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칭기즈 칸(테무진)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분봉을 하였을 당시, 벨구테이는 비록 서열은 낮은 편이었으나, 칭기즈 칸의 어머니 호엘룬과 친자, 그리고 칭기즈 칸의 동복 아우 중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카사르]] 등의 뒤를 이어 분봉을 받았다. 이후 벨구테이는 매우 장수하여, 1251년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몽케 칸]]의 즉위식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따르면 벨구테이는 1255년에 사망했는데, 사망할 당시 나이가 110세에 달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벨구테이는 칭기즈 칸보다도 나이가 20살 정도는 더 많아지는 데다가 아버지 예수게이랑 나이 차가 고작 12살밖에 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되는데 부자 관계라고 보기에는 나이 차가 말이 안되는데다 한 살 연상의 형인 벡테르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아마 실제로는 100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사망 시기를 1265년으로 보는 설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매우 장수했으며,[* 벡테르는 [[1176년]], 카치운은 [[1207년]], 카사르는 [[1219년]], 칭기즈 칸은 [[1227년]], 테무게는 [[1246년]]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형제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오래 산 셈.] 100세 정도까지 살았다는 점이다.''' 일설에는 벡테르가 칭기즈 칸보다 2세 연상이라고 하는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 이에 따른다면 벨구테이는 칭기즈 칸보다 1세 연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벨구테이는 비록 칭기즈 칸의 친형제는 아니라는 한계점이 있었으나 불온한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아 큰 신뢰를 받았다. 칭기즈 칸의 동복 동생 중 가장 공로가 컸던 카사르조차도 역모에 연루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별리고태(벨구테이)의 힘과 합살아(카사르)의 궁술 덕분에 내가 천하를 취하게 되었다." 고 할 정도로 벨구테이를 신뢰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전공을 세운 벨구테이였지만 그도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타타르 정벌 때 칭기즈 칸이 타타르를 몰래 학살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는데, 이를 타타르의 족장에게 벨구테이가 누설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타타르 학살 과정에서 [[최후의 발악]]이 벌어져 수많은 몽골족이 죽자 칭기즈 칸은 벨구테이를 한동안 쿠릴타이에 참석시키지 못하게 했다. 매우 장수한만큼 자손도 많았다. 과장이 좀 섞여 있겠지만, [[유승(전한)|거느린 부인과 자식이 각기 1백여 명이 될 정도라는 기록도 전한다.]]~~그 중엔 메르키트족 여성도 많았겠지~~ 워낙에 처자식이 많다 보니 어떨 때는 눈앞에서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의 아들들 중에서도 이름을 떨친 이들이 3명이 있었는데, 카르툭 · 예수부카 · 쿤부카 등이 이름을 떨쳤다. 이 가운데 카르툭은 성품이 용맹해서 [[몽케 칸]]을 따라 종군하기도 하였다. [[분류:보르지긴 가문]] [[분류:서출]] [[분류:1156년 출생]][[분류:125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