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한민국 국군의 배식, rd1=한국군 병영식, other2=야전에서 먹는 식량, rd2=전투식량)] [목차] == 개요 == '''병영식'''([[兵]][[營]][[食]], ration)은 [[군대]]에서 배급하는 식사를 가리킨다. 대개 일반식을 가리키며, [[전투식량]](combat ration)은 별도로 인식된다. 대부분 조리 또한 부대 내에서 직접 하며, 이를 전담하는 병 신분의 군인을 [[조리병]]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병식'''(兵食)이라고도 했으나, 한국군의 경우 병이라는 용어가 [[사병]](enlisted) 가운데서도 [[부사관]](Non Commissioned Officer, Petty Officer)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2009년부터 병영식이라는 용어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공식 군 용어로 채택되었다. 이 밖에 '[[짬밥]]'이란 속어로도 불린다. == 중요성 ==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전쟁터의 군인들이 색욕에 굶주려 있는 것처럼 묘사해 놓는 경우가 많다. 규율이 잡히지 않은 군대가 강간을 포함한 대민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욕보다는 밥 생각이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배를 든든히 채운 뒤에야 비로소 성욕이 생겼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간단하지만, 당연히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만 다른 욕구도 생기는 법이다.[* 가장 최근의 예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민간인 마트와 각종 식량을 마구잡이로 약탈해 배를 채운 뒤에 강도, 강간과 학살을 비롯한 본격적인 끔찍한 전쟁 범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전쟁 때 보급이나 먹거리 잘 챙겨 먹은 군대로 유명한 미군에서도 한국전쟁 때 처음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보급 문제[* 미국이 보급품을 만들 능력이 없거나 그걸 수송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 지도에 그려진 도로가 미국에서 보던 깔끔한 도로라고 잘못 알고 엉터리 보급계획을 짜는 바람에 수송트럭이 병사들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지게와 조선낫으로 무장한 미국군 병사들이 태백산맥을 뚫고 악전고투하며 보급을 전달했을 정도.]를 겪은 일이 있는데, 이때 참전용사[* 제임스 카디널(James Cardinal) 당시 미육군 1기병사단 5기병연대 I중대 소속.]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소대원들끼리 통조림 하나를 나눠 먹는 게 다였고. 그렇다 보니 틈만 나면 먹는 거 생각하고, 동료들끼리 집밥 먹은 거 틈만 나면 이야기 하고, 밤에 꿈을 꿔도 먹는 꿈을 꿨다고 한다. 오죽하면 생각도 못한 개고기를 먹고는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었다고 회고할 정도.[* 하도 배가 고파서 부대에 있던 한국인(카투사)들에게 달러를 주고 먹을 것 좀 구해오라고 보냈는데, 소나 닭을 가져올 줄 알았던 카투사가 잡종개 한 마리를 끌고 왔다고. 당연히 제임스와 미군들은 이걸 어떻게 먹냐며 식겁했지만, 결국 3주 후에 굶주림에 지쳐 잡아 먹어버렸다.]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전쟁터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을 줄 수 있기도 하다. 목숨 걸고 굴렀더니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별사탕도 안 들어간 건빵을 주면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장병들을 장기간 굶기거나 맛없는 음식만 먹일 때는 아무리 강력하게 통제하려 해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관 살해]], [[항복]], [[약탈]], [[탈영]], [[반란]] 등 각종 대형사고가 터졌고, 반대로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줘서 사기를 올렸다는 기록은 복붙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주 나온다. 먹는 즐거움은 예로부터 인간의 원초적인 스트레스 해소방식인 것이다. 이렇듯이, 배불리 먹이지 못하면 매일 약 4,000kcal를 소모하는 군인들의 체력을 보충할 수 없고, 맛있는 밥을 먹지 못하면 군인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PTSD]] 등의 전투피로를 회복할 수 없어 정신적인 건강상태마저 나빠진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모된 부대는 전투력도 약해질 뿐더러 같은 명령을 받아도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 [[북한군]]에서 군인을 굶겼다가 별의별 막장 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것만 봐도 군대에서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 병영식의 역사 == === 고대([[기원전]]~[[6세기]]) === [[스파르타]]에선 평민이건 왕이건 다 같이[* 한번은 왕이 결혼기념일이라 왕비와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서 신하에게 밥을 궁전으로 배달해 오라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신하의 반응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오십쇼 안 오시면 밥 없습니다"''' 였다.] 공동식당에서 보리로 만든 딱딱한 빵에 선지를 넣은 고기[[잡탕]]같은 검은 국, 물 탄 포도주와 약간의 치즈와 말린 무화과 정도를 먹었다. 이들 중 [[https://www.youtube.com/watch?v=oqQzWg9pXmg|검은 국]]은 주로 [[돼지]]의 [[앞다리살]], [[뒷다리살]] 같은 퍽퍽한 고기에 [[선지]]를 섞고 [[식초]]로 맛을 냈는데,[* 돼지는 가축 중에 양과 더불어 누린내가 심한 축에 속한다. 현대에야 향신료와 조미료, 숙성 등으로 누린내를 잡지만 저 당시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누린내나는 고기에 비린내나는 선지까지 때려넣고 채소 한점 없이 딸랑 소금과 식초만 썼으니 맛과 향이 어떨지 짐작할 만 하다.] [[아테네]]인이 "이런 건 아테네의 [[돼지]]도 먹지 않는다."며 까자, 스파르타인은 "이런 걸 먹으면 아테네의 돼지도 스파르타인과 같은 용사가 될 수 있다."며 [[정신승리]]를 했다. 이건 '''고대부터 짬밥은 맛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다만 검은선지고깃국은 평시상황에서 병영에 있을 때나 먹인 거고, 전시상황에선 현지에서 사냥을 하든 거기까지 끌고 간 [[가축]]을 잡든지 해서 신선한 고기를 먹었다. 이외에도 스파르타 시민은 국가에 빵, 치즈, 무화과, 포도 같은 것을 바칠 의무가 있었는데, 스파르타가 무역을 중시하던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이건 당연히 군대를 먹이기 위해 걷은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저런 똥국을 먹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식사 및 전투조인 피디티온의 구성원들이 매월 1인당 정해진 양을 납부하는데 미납부시 해당 조원은 '''시민권을 박탈해버렸다.'''[* 물론 스파르타 시민권자라면 헤일로타이들이 농사지은 수확물을 받을 수 있어 어지간해서 못 낼 일은 없었다.] [youtube(4-l_EbXE3LU)] [[로마군]]은 밀가루로 끓인 폴렌타[* Polenta. [[옥수수]]가 전래된 이후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이탈리아의 아침 식사용 스프를 가리킨다. [[아스테릭스]]에서 등장한다.] 를 주식으로 먹었는데, 보리의 경우 흔히 말 먹이로 쓰이던 것으로 보리를 식량으로 배급받는건 일종의 처벌이었다. 빵은 하루에 800~1000g 정도로 배급되었는데, 이때 배급된 빵은 단단한 [[건빵]]으로, 보존성과 휴대성이 높았다.[* 당시 로마인들의 취향은 폭신폭신한 빵보다 단단한 빵이 인기가 더 있었다. 부풀려서 만든 빵은 양을 속이는 듯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런 건빵을 와인이나 우유에 적셔서 먹었다. 그 밖에 [[포도]]나 [[호두]], [[무화과]], [[올리브]] 등을 군영 주변에 심었고, [[당근]], [[렌즈콩]], [[셀러리]], [[배(과일)|배]], [[복숭아]] 등의 채소나 과일도 먹었다. 대부분 가공해서 보존 기간을 늘릴 수 있는 식재들인데, 실제로 [[건포도]]나 건과류, 말린 무화과는 행군 할 때 주로 먹는 [[전투식량]]의 역할을 하는 음식이었다. 행군할 때는 불을 사용한 음식을 금지했는데, 이는 [[등화관제|적군에게 위치를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10명 분대 단위로 재료를 모아 단체로 조리하여 먹었다.[* 불을 사용할 수 있을 경우 끓인 물에 건빵을 넣어 죽처럼 만들고 거기에 말린 고기나 무화과등을 넣어 만들었다. 조미료가 귀했기 때문에 맛은 없었다.]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트라야누스 아래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베이컨]] 지방, [[치즈]]와 신 [[포도주]](larido, caseo et posca)[* 사실상 [[식초]]. 맛은 접어두더라도 건강에는 좋았을 것이다. 실제 大카토는 평소에 시어진 포도주를 물에 타서 마셨고, 매우 피곤할 때만 제대로 된 포도주를 마셨다. 그 덕분인지 카토는 당대에 85세라는 상당히 많은 나이까지 장수했다.][* 로마 병사들은 이 식초가 된 포도주에 물과 [[꿀]], [[허브(식물)|허브]], [[소금]]을 타서 마셨다. '''포스카(Posca)'''라고 불린 이 음료수는 박테리아에 오염되기 쉬운 맹물을 식초의 [[아세트산]]으로 살균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스카를 지급하지 않고 그냥 물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가혹행위 혹은 형벌이었다. 여기에 약간의 소금을 첨가하여 전해질 보충을 하기도 했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스포츠 음료]]와 정수제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갈증을 호소할 때 그를 안쓰럽게 여긴 로마 병사가 해면에 포스카를 적셔 건네준 바 있다.]를 먹었다고 적었으며,[* SHA, Hadrian X, 2] 황제가 된 후에도 비슷하게 조촐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고기를 먹는 일은 드물었는데, [[소고기]]는 꿈도 못 꿨다.[* 로마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만 소의 도축이 허용되었다.] 보통은 닭이나 양, 돼지의 고기를 먹었고, 이것도 생고기가 아닌 [[염장고기|소금에 절이거나]] [[육포|말린 종류]]였다. [[소시지]] 같은 [[가공육]]도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기가 없을 때는 양젖/염소젖으로 만든 [[치즈]]가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군단병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치즈를 직접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치즈를 굳히는 효소는 무화과 줄기에서 추출했다. 이집트콩, 렌즈콩 등의 콩류도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기는 잘 먹지 못했지만, 생선류는 그런대로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원래 지중해 지역을 근거지로 삼는 나라들의 상황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생선을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썼다. 대구나 장어 등을 많이 먹었는데, 생으로 먹기보다는 주로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서 보통 구워서 먹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나오는 생선도 말린 대구였으며,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되살아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먹은 것도 구운 대구였다. 군단병은 다른 장비와 마찬가지로 배급되는 식량도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받은 월급을 떼서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군단 차원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주변 신민들로부터 징발하거나, 전투가 끝난 후 약탈하거나, 군단을 따라다니며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Sutlers)에게서 구매하는 것이었다. 징발한 식량은 군단장이 지정한 도로 근처의 위치에 먼저 가져다 놓도록 요구되었고, 징발 후에 지불하는 보상금의 양은 전적으로 군단장의 재량인 복불복이었으며 언제나 시가보다 쌌다. 식량의 징발은 비-로마 신민에게 추가적인 세금 부담처럼 작용하게 되었다.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은 로마에 비해 고기를 더 잘 먹었는데, 이들은 목축과 수렵 문화가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와 달리 숲이 울창해서 사냥감이 많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주로 마신 로마인들과 달리 켈트족은 맥주를 마셨다.[* 켈트인들도 포도주를 마시기는 했지만, 손님에게 대접하는 등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의 경우 [[초한전쟁]] 당시에 [[항우]]가 [[콩밥|밥에 콩을 반이나 섞고 있다]]고 하니 철군을 결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평시에는 몰라도, 전시에는 쌀밥을 줘서 사기 유지에 노력했다는 증거이다. 삼국시대 [[촉한|촉나라]] 군대는 [[무(채소)|무]]와 [[순무]]를 반찬으로 즐겼다. 제갈량은 장기간 주둔할 기미만 보이면 둔전을 해서 무를 심었는데, 그 이유가 첫째로 영양가가 좋고, 둘째로 뿌리와 순을 모두 먹을 수 있으며, 셋째로 저렴하기 때문에 버리고 가더라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술]]의 군대나 오나라에서는 물풀이나 [[다슬기]] 같은 것을 강에서 채집해서 반찬으로 먹었다고 한다. === 중세([[7세기]]~[[15세기]]) === 당시 군대의 식량 보급방식과 조리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기본적으론 지원임무를 맡은 부대가 전투부대의 식량을 챙겨준다. * 전장으로 가는 와중에 미리 지원을 약속한 군주나 도시에서 식량을 사서/보급받아 챙겨간다. 유럽의 경우는 쉬운 일례로 [[십자군 전쟁]] 때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십자군들을 태워다주거나 도시나 귀족들 영지에서 마련한 식량을 실어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식량이 될 동물을 몰고 간다. 냉장고도 없는 시절이니 신선한 고기를 먹이려면 살아있는 동물을 끌고 가야 하니까. * 민간에서 약탈한다. [[삼국지]]를 보면 이게 엄청 흔하게 나온다. 군용물자의 종류가 많지 않았고 운송기술과 식품가공기술이 형편없었던 시절이라 약탈은 반쯤 필수였다. 손자병법에서도 군량을 적지에서 취하는게 가장 상책이라고 적혀있을 정도[* 다만 손자병법에서 취하라는 건 적의 군량이지 민간이 아니다.] * 조리할 때는 10명 정도의 분대단위로 취사조를 짜서 각자 알아서 조리해먹는다. 대개 [[장교]]들에게는 따로 식사를 제공하는 [[조리병]] 혹은 [[당번병]]들이 있다. 군대의 보급은 약탈과 수송의 중간에 위치해있었다. 전적으로 약탈에 의존하지도 않았고 전적으로 수송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둘은 함께 이루어졌으며 어느 한쪽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른 비율의 문제일 뿐 둘 다 행해진다는 것을 감안하고 계획이 세워졌다. 하단의 내용은 군대가 약탈에 의존했다는 통설에 반박하기 위해 수송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약탈을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중세에 수송은 아주 비싸고 제약이 큰 행위였다. [[곽거병#s-3.3|약탈이 일상이라고]] [[무타구치 렌야|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약탈을 주 보급수단으로 삼게 되면 전쟁지속능력이 사라진다.[* [[손자병법]]의 예를 드는 경우가 있으나, 손자는 이전 장에서 '명장은 보급로를 길게 늘이지 않는다' 등으로 보급의 중요성을 몇번 강조하고 있다. 손자병법 내부에서 약탈을 권장하는건 '''남의 것을 뺏어서 내가 쓰면 적에게 수십곱절 손해니까 요긴하게 쓰라'''는거지, 눈 돌아가서 약탈하란 소리가 아니다.] 가장 먼저 약탈의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기에 충분한 보급을 취할 수 없다. 비료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잉여 농산물의 양은 제한되었으며 대부분의 농민은 세금을 바치고나면 한 해를 겨우 넘길만한 양식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몇 개를 약탈해봤자 몇천몇만의 군대에 있어서는 하루 식량도 되지 않으며 간혹 큰 도시를 털어 식량을 꽤 얻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이지 않기에 약탈만 믿고 보급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소리다. 약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던 바이킹들조차도 식량과 물부터 확보하고 원정을 진행했으며, 식량이 떨어지면 본거지로 돌아가든 주변에 주둔지를 만들고 거점부터 굳혔다. 또한 [[청야전술]]에 취약하다. 약탈을 주 보급수단으로 삼으면 주민들이 스스로 기반을 없애버리고 도망치는 경우 속절없이 굶어죽게 된다. 게다가 정복이 목적인 경우 약탈한 땅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 적대적인 사람이 살고있는 형태가 돼버려서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만 보는 장사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약탈이 이루어졌지만 여튼 그 당대에 작성된 기록에서도, 약탈을 장려하는 장수는 그 본국에서도 좋은 평을 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규모 전쟁에서는 대개 군주가 우호 지역을 지나가면서 식량을 사기로 미리 계약을 맺거나 일부 대영주들에게 병력을 대신 군자금과 식량을 지원하도록 했고, 그러한 계약을 명시한 계약서가 왕실 서고 등에서 흔히 발견된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보급이 의도치 않게 중단되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일단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식량 보급의 품질은 당시 기준으로 퍽 풍족한 편이었다. 중세 시대의 군인은 다들 [[용병]]이기 때문에 계약에서부터 식량의 질과 양을 깐깐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희멀건 꿀꿀이죽을 먹는 삶을 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은 전황이 최악의 사태로 다다를 때에 한정되며, 그쯤 되면 탈영이나 용병들의 계약 파기가 일상다반사인 상태다. 중세 군대에는 항상 며칠에서 몇주의 식량을 쌓은 짐수레가 잔뜩 따라다녔는데, 15세기 말 독일 기록에는 [[보병]] 12,000명을 위해 650대의 짐수레가, 3,000명의 [[기병]]을 위해 300대의 짐수레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독일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 역시 이러한 보급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600명으로 구성된 주둔부대의 6개월치 식량 보급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60t의 밀이 들어가서 그중 1/3인 20t을 비스킷으로 굽고 나머지는 갈아서 [[밀가루]]로 사용했다. 콩과 완두콩은 42t, 와인은 105갤런짜리 큰통으로 두 통(800리터), 식초는 두 통, 기름 1통, 버터 1통, 소금 1톤, 각종 양념과 향신료 50파운드, 아몬드와 사프롱 같은 주전부리도 몇 파운드 넣어주기로 돼 있고, 황소 100마리(약 10톤~15톤의 고기), 양 160마리(약 8톤의 고기), 가금류는 원하는 만큼, 장어 1,000마리(약 2톤의 고기), 청어 25통. 이 기준과 여러 기록을 통틀어서 볼때, 중세 시대의 군인들의 하루 식단은 빵 혹은 비스킷 1.5kg 가량, '''신선한 고기 1파운드''' 가량에 '''달걀이나 염장 고기, 치즈와 버터''' 약간과 채소를 포함해 하루 4천2백~5백 킬로칼로리 가량으로 계산된다. 이는 현대 성인의 평균 식단의 칼로리 2배에 가까운 양이고, 현대 군인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MRE로 3끼를 먹으면 3600킬로칼로리 가량 된다. 재밌게도, 전투중인 현대 군인들은 하루에 최대 4200킬로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하니 의외로 딱 맞아 떨어진다. 당시엔 도보행군이 사실상 유일한 기동수단이라는 점를 오히려 칼로리 섭취가 부족한 걸수도 있다.[* 물론 '전투 중'인 현대 군인들이 4200킬로칼로리를 소모하는 것이고, 중세 병사들은 행군만할때나 주둔만 할때도 저만큼 먹었다] 물론 이런 보급 계획이 항상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중세 군인들이 잘 먹었고 보급에도 상당히 신경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장거리 보급을 할 역량은 없었기 때문에 원정이 길어지는 등의 상황에서는 위의 기록들처럼 제대로 된 음식이 공급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보급 분야만큼은 통제력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예니체리]]나 카피쿨루 군단이라도 일단 먹여 주지 못한다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명령 불복종,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깐. 병영에 주둔해 있을 때 예니체리나 카피쿨루같은 오스만 장병들은 하루에 약 3,000칼로리 정도의 열량을 섭취할 수 있을 정도의 식사를 했다. 320g의 빵, 160g의 건빵, 160g의 쌀에 192g의 양고기, 80g의 버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에는 5만 명이 넘는 수도의 예니체리를 위해 오스만의 유럽 영토에서 300,000마리의 양떼가 보내졌다고 한다. 그 외에 대추야자와 같은 각종 후식도 보내졌다. 17세기 프랑스의 여행자 Jean de Théveno는 오스만 군대는 절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으며, 온 땅으로부터 그들의 주둔지로 음식을 가져온다고 평했다. 발칸의 경우 오스만은 이 지역의 수많은 강들을 이용해 원정군에게 비교적 많은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스탄불부터 해서 오스만 지배 헝가리(오스트리아와 항상 일전을 벌여온...)까지 멘질-하네(menzil-hane)라고 불리는 식량 창고가 있어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이곳에서 보급을 받고, 적진으로 넘어가면 그제서야 같이 가져온 식량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군대가 한번 움직일 때 대체 얼마 정도의 식량이 필요했을까. Perjes의 연구에 따르면 90,000명의 병력과 40,000필의 말이 30일간 움직일 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려면 낙타 30,000마리가 7,600t의 양을 운송해야 했다. 무라드 4세의 1638년 바그다드 원정 시 하루에 1인당 최소로 필요로 했던 식량이 약 600g의 빵과 600g의 비스킷이었는데, 20,000명의 예니체리와 시파히 군과 말과 운송용 소를 먹이려면 두세 달 간의 원정기간동안 35,000~55,000마리의 낙타가 필요했다고 한다. 물론 빵과 비스킷만 먹인 것이 아니라 고기도 먹였는데, 같은 원정에서 21개월 동안 217,279마리의 양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발칸과 같은 지역이라면 흑해나 강을 통해 해상 운송이 가능했지만, 이라크와 같은 동방 지역의 경우는 쌩으로 육로 운송을 해야 했으니 오스만 군이 그 지역에서 특히나 고전을 한 게 무리는 아니었다.[[http://egloos.zum.com/harmless/v/3084835|#]] 중세 군대에 [[요리사]]가 항상 붙어있거나 단위 병력 수준에서 조리가 이루어진 것 역시 식량이 조리된 상태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 [[장교]]들은 그를 따라다니는 당번병 혹은 고용된 민간 요리사가 조리를 했고, 일반 [[사병]]들도 [[밀가루]], 고깃점, 물고기, [[야채]], [[과일]] 등의 원재료를 일정량 보급을 받아 5~10여명 수준의 배식조 단위로 직접 조리해 먹었다. 조리를 전담하는 [[조리병]]이 생긴 것은 고작 100년밖에 안됐을 정도로 상당히 최근이다.[* 조리병이 생겨난 것은 1차대전 이후, 정확히는 1차대전 초반 이후이다.([[http://blog.daum.net/nasica/6862616|관련글]])][* 또한 개개인, 혹은 몇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이 각자 조리도구를 챙겨야 했는데, 크기와 무게탓에 가지고 다니기 번거로워 조리도구의 종류나 수량, 크기등이 제한되면서 짬밥의 질이나 종류에 큰 한계가 생기기도 했다.][* 해군은 예외였는데, 불을 피우기 어렵고 한번 보급 받은 것으로 잘 분배해 써야 되는 해군 특성상 예전부터 식량 담당이 따로 있어 식사를 분배하거나 일괄 조리했다.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요리 계열 인원 파워가 쎈 이유가 다 있는것.] 그런데 만약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비상 사태가 나거나, 취사할 여건이 전혀 안 되거나, 급히 부대를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밥도 못 먹고 급하게 이동하거나 뜻하지 않게 건너뛰는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다만 위의 글들은 고대 게르만 쌍무적 계약관계→중세 봉건제로 이어진 서양 기준에서 쓴 글이다. 군주가 도시와 계약을 맺거나 영주가 식량을 군주에게 보급하거나 중세 군인들이 대부분 용병이라 계약하면서 음식의 질을 따졌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와는 잘 맞지 않다. === 근세([[16세기]]~[[18세기]]) === [youtube(fKNGPMefJ_A)] 스튜와 해쉬로 된 군인들의 식단 재현 영상.[* 단, 이건 재료가 풍족한 때나 만들어 먹는 고급이며 물자가 부족한 야전에서는 풍족한 식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들에게 보급된 건빵은 무식하게 딱딱해서 오직 바구미같은 벌레들만이 쉽게 갉아먹을 수 있었는데, 해군 함선같이 동물을 키울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있을 경우 그 벌레들을 [[닭]]에게 먹여 키워서 나중에 닭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고, 상황이 극단적으로 처절하다면 닭을 거치지 않고 벌레를 그냥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식]] 항목을 보면 단백질 섭취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효율적인 방법이긴 했겠지만, 위생이나 심리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일부 인원들은 벌레먹은 건빵이 이리저리 난 구멍 덕에 덜 딱딱해 먹기 쉽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한편 짐을 줄이고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물은 끌고 가지만 조리기구는 챙겨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짐승을 잡아서 그 생가죽을 솥 삼아서 걸고 그 안에 물과 고기를 집어넣어 삶아 먹었다. 그냥 태우면 잘 타는 소재라도 물이 끓는 동안은 그릇이 타지 않기 때문이고, 가죽은 방염 피복으로 쓰일 만큼 내화성도 있다. 수천년 전 금속기를 사용하지 않은 문명이 가죽 냄비에 달군 [[돌]]을 넣는 방식을 고안한 이래 나름대로 오래 검증된 방식이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조리하면 생가죽의 누린내까지 음식에 우러나와 버린다. 충분한 조미료가 있다면 어떻게 수습이 되었겠지만, 조미료를 따로 챙겨줄 환경이면 조리기구도 챙겨줬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는 계급에 따라 천자호반, 지자호반, 인자호반이라 불리는 3가지 유형의 밥상을 받도록 규정되었다.[*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명에서 하던 것처럼 은자로 식량을 사려고 하니 살 수가 없어 보급 문제가 발생했고 약탈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총관이 규정한 것이긴 하나, 이건 약탈에 대비한 배급 기준에 가깝지 실제로 매번 이렇게 지급되었다 보긴 어렵다.] 고급군관은 천자호반이라고 하여 밥과 채소, 절인생선, 고기, 두부, 술 3잔을 받았고, 하급군관은 지자호반이라 하여 밥과 채소, 고기, 두부를, 일반 병사들은 인자호반이라 하여 밥과 절인새우/새우젓과 두부를 받았다. 여기서 보면 두부는 항상 들어가 있는데, 명나라군은 조선 측에 말단 병사까지 반찬으로 두부를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두부는 콩으로 만드는 음식이라 가격도 과히 비싸지 않은 데다, 조선 두부가 맛있다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두부를 먹는 명나라 군대야 입이 즐거웠겠지만, 그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고, 갈고, 짜서 굳히는 백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 때 맞춰 두부를 만들지 못했다고 조선 관리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조선군의 경우는 이전 버전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편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군대는 중앙 세수만으론 유지가 어려워 [[군산복합체]]마냥 군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을 해서 유지비용을 충당했기 때문이다. 가령 육군은 둔전이나 광산을 운영하고 수군이면 둔전, 염전, 어업, 유통업, 조선업을 하는 식으로 재정을 확보했는데 훈련도감은 화폐 주조권도 받아서 재정을 충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부대 자금 사정이 좋으면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육군의 경우 전시상황에는 보통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가 쌀이나 보리등을 운반해 본대에 보급했고 찬거리는 이동 중에 관아나 민가에서 구매하거나 얻어오는 식으로 해결했다. 일례로 [[병인양요]] 당시 병사들은 밥 1그릇에 국 1그릇, 김치 및 장류가 기본이었고 형편이 좋으면 여기에 고기와 생선이 추가되었다. 또한 호궤(犒饋)라 하여 어가 호송을 맡은 병사나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주는 행사가 간헐적으로 이뤄졌다. 예를 들면 만기요람 재용편에 능에 거동하는 어가를 호송하는 병사들을 호궤할 때 내리는 식품들이 적혀있는데 종사관 및 중군 이하 군졸들은 1인당 술 3사발, 콩 2홉 5작,[* 홉보다 더 작은 부피 단위로 10작이 1홉이다.] 소금 1작, 쇠고기 1꿰미 즉 1관(약 3.75kg)이 주어지고, 여기에 하급군관인 장교(將校)는 6인당 대구 1마리, 군병은 1인당 명태 1마리를 추가로 받게 되어있다. 수군의 경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로 대략 알 수 있는데, 고위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술을 자주 먹었다는 기록이 많다. 한 번은 수영 전체가 밤새 1천 동이 넘는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난중일기를 보면 병사들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군대에 술은 사기유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했다. 전투와 훈련으로 인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술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군납비리|술을 훔치거나 빼돌리는]] 놈들은 알짤 없이 [[장형|패대기쳤다.]]] 이순신은 고기를 육해공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육고기는 소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 개고기 등을 제주에서 지원 받았다고 하고,[* 표범고기도 있는데 약으로 쓴 듯 하고 가죽은 조정으로 보냈다.] 물고기는 전복, 대구, 청어, 숭어, 조기, 고래 등을 먹었다고 한다. 특히 청어잡이에 중시하여 청어를 많이 잡아 [[과메기|식량으로 대는]] 한편, 이렇게 낚은 잉여 청어를 팔아서 곡식과 무기도 조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수군영과 가까운 통영 거제 일대의 앞바다에는 미역과 김 같은 해조류가 많이 나서 이를 채집하여 군량으로 댔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지휘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에서 일패도지하여 미역으로 연명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먹은 미역은 통영 거제 일대 특산물로 이름난 견내량 돌미역이다. 조선 수군은 물론, 왕실에까지 진상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이순신 본인도 미역국을 즐겨 먹었고, 공무가 다망할 때에는 그냥 미역을 밥에 섞어 먹었다.] 날짐승은 꿩을 빼면 기록에 없는데, 닭은 따로 군영에서 키우거나 보급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선시대 기록을 봐도 닭보다는 꿩을 더 많이 먹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시대 토종닭은 '''무진장 질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먹을 만하게 만들려면 조리시간도 4~5시간 가량으로 굉장히 길다. 괜히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남아있는 게 아니다.] 이 밖에 난중일기에서 수군이 먹은 것들로 여러 가지 떡, 국수, 약식, 칡, 팥죽, 홍시와 곶감, 참기름, 꿀, 무, 연포, 수박, 동아전, 그리고 귀한 진상품인 귤(!) 등이 나오는데, 주식 외에도 간식류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것을 볼 수 있다.[* 먼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도 [[쿼츠#s-3|아이스크림]]을 비롯한 간식의 확보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감안하면, 수세기를 앞서간 선진적인 병영 복지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고기 반찬과 함께 먹는다고 가정하면 해군의 병영식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군은 둔전, 염전, 어업, 유통업, 조선업 등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재정확보수단이 다양하였기에 먹거리를 보급할 여력이 충분한데다, 수군이 다들 기피하는 병종이기 때문에 충무공이 현대의 해군처럼 식단에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사기를 진작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배부르게 먹고 살기는 평상시에도 힘들었고 더구나 전쟁통이라 끼니를 걱정하거나 굶어죽는 사람은 더욱 많았던 시절이다.[* 배식량 부족문제가 없어진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없어진 건 1970년대 들어서이며, 베트남전 당시에도 고기 반찬이 안 나와서 느끼한 C-레이션의 주식을 대용 고기 반찬으로 생각하며 먹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군대의 배식량에 대한 불만은 1990년대까지 계속 나왔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당시 공식 기록들을 찾아보면 수군을 잘 먹이는데도 신경썼지만 [[둔전]]을 병행하며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 가족들의 생계까지 동시에 챙기려 노력하고,[* 난중일기와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 해안 인근 9개 고을에서 조세를 거둬 식량을 해결하려 했으나, 조정과 육군의 반대로 자체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1593년 윤11월 선조에 장계를 올려 둔전 승인을 받아냈을 정도.] 병영에 물자를 공급하는 농민들이나 상인들을 보호하는데도 많은 신경을 썼다.[* 병영이 위치한 전라도에서 조정이 걷어가는 쌀과 세금이 과다해 병영을 유지하는 농어민들까지 힘들어지자 조정에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려 세금량을 줄인 기록도 있다.] 그러다 보니 '''풍요롭고 다양한 병영식과 식자재 제공은 탈영과 사건사고를 막고 사기를 올려 승리하는데 굉장한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병영에서 야반도주한다고 해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는 부자들도 전쟁통에는 못 먹는 귤까지 챙겨주는 수군에 남는 것이 이득이었고,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굶주리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차라리 군에 소속되어 목숨걸고 싸우는 쪽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국시대 당시 [[아시가루]]들이 농번기 때에는 농사일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로 일하는 구조였다. 그랬기 때문에 대부분 농번기 때는 전투를 쉬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로 인해 군용 보급식량 역시 그렇게 긴 보존기간을 갖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농민=병사 였다보니, 지급되는 쌀과 부식 외에는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으며 쌀은 1일에 6홉, 소금은 10인에 1홉, 된장은 10인에 2홉이 지급되었다. 1홉은 약 0.18리터 인데, 6홉은 약 1.1리터(약 900g)에 달하는 양으로. 양으로 밥으로 지으면 대략 2.1kg에 달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 오늘날 국군의 1일 쌀 섭취량이 규정상 300~400g(조리하기 전의 쌀 무게)인것을 보면 무려 현대인의 3배를 섭취한 셈이다.] 대개는 하루 두끼를 2홉씩 먹었지만 전투하느라 밥을 지을 시간이 없을 경우 밥은 하루에 한번만 하여 2홉을 바로 먹고, 나머지 4홉은 허리에 동여메고 나중에 먹었는데[* 대개 떡이나 볶아서 과자처럼 만든 현미, 또는 쪄서 말린 밥이 지급되었다] 보통 현미가 지급되었으며, 정미된 흰쌀도 있긴 했으나 하급 병사들에게는 지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지휘관급 이상의 무사들에게 지급되었으며, 부식은 거의 없었고 위에서 언급된 소금과 된장만으로 밥을 먹었다. 매실장아찌나 절인야채, 때에 따라서 생선포 등의 보존식품은 각자 집에서 만들어 챙겨와야 했는데, 이 때문에 농민을 병사로 부리던 다른 다이묘와는 달리 상비군 체계로 군을 움직인 노부나가의 경우 한 병영에서 공동생활을 시켰던지라 다른 부식을 챙길 방법이 없었기에 병사들의 피로나 사기에 악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된장은 대개 토란 줄기에 절여서 토란줄기를 잘라 씹어먹거나 물에 넣어 즉석으로 국을 만들어 먹을 때 사용되었으며 필요한 경우 콩과 누룩을 짚단에 넣어 전쟁중 즉석으로 된장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소금의 경우 대개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국에 넣어 간을 맞추며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중 시간이 없을 땐 그냥 밥과 같이 집어먹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짐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조리도구 등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때문에 대개 먹을 그릇은 아시가루들의 가사(삿갓 모양의 투구)를 뒤집어 이를 밥그릇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근대([[19세기]]~[[1940년대]]) ===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 육군은 병사들에게 [[염장고기|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베이컨]])와 [[건빵]], 커피를 지급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해 먹는지는 병사 개개인의 역량에 맡겼기 때문에 병사들은 [[괴식|괴상한 식사]][*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전통인데 일단 먹을 수 있는 것을 한 냄비에 넣고 끓이는 것이다. 이렇게하면 건빵은 부드러워지고 말린 음식들도 향미가 살아나기 때문. 로마에서는 건빵과 무화과를 물에 끓여 죽처럼 먹었으며 남북전쟁 시기는 건빵과 절인고기, (만약 있을 시)약간의 야채를 같이 끓여 먹었다. 물론 시대를 초월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듯 맛은 끔찍했다고 한다.]를 만들어내거나 고참들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야 했다. 건빵의 경우, 하드택(Hardtack)이라고도 하며 여유가 있으면 그냥 먹기보다 으깨어서 가루로 만든 다음 소금과 후추 등 조미료를 첨가해 [[죽]]처럼 끓여먹거나 반죽을 해서 오늘 날의 팬케이크처럼 다시 불에 구워 먹었다고 한다. 혹은 베이컨을 굽거나 삶을 때 나오는 기름에 튀겨 먹기도 했다. 북군보다 열악했던 남군 육군은 식량으로 [[땅콩]]을 지급했는데, 이걸 삶아먹기도 하고 볶아서 커피 대용으로 차를 끓이는 등 알아서들 먹었다. [youtube(v2-4kT0lqDs)] 1차 대전 때 [[영국 육군]] [[영국군 근위대|왕실 근위대]] 소속 [[리버풀]] [[연대]]의 스미스 [[이병]]이 경계근무 중 점심식사 시간이 되자 스스로 잡탕 [[콘비프]] 스튜를 만드는 영상이다. [[서리(범죄)|현지에서 확보한]] 신선한 감자와 당근[* 영국군도 채소를 배급하긴 했지만, 나레이션의 언급에 따르면 배급 채소는 대개 동결건조되어 비쩍 마른 것이라 맛이 없었다. 그래서 신선한 채소는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나레이션에 나오듯이 몰래 서리하거나 텅빈 농장에서 가져오거나 했다.]을 썰고 염장된 쇠고기 통조림을 따서 조금씩 넣고[* 교대 근무자도 만들어 먹어야 하기에...] 맛을 돋우기 위해 배급받은 비스킷을 부셔서 같이 넣고 물을 살짝 부은 후[* 나레이션의 언급으로는 물을 너무 많이 부으면 핑크색 요리가 된다고 한다(...).] 참호 모래주머니를 칼로 잘라서 연료로 써서 불을 붙힌 후 재료를 모두 섞은 반합뚜껑에다 숟가락을 이리저리 저어가며 익었다 싶을때 동료와 함께 사온 민간용 HP소스를 넣고 좀 더 섞어준 다음에 남은 20분의 점심시간 동안 먹는다. 1시간 동안의 점심식사 시간에 제때 못 만들면 조리가 다 되었던 말던 입에 일단 전부 쑤셔넣어야 한다는 나레이션의 언급에서 1차 대전 당시 병사들의 열악했던 처우를 볼 수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더럽고 진창인 [[참호전]] 상황에선 이렇게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 영상처럼 점심시간에 따뜻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장소에 머무른다는 것만도 특권이자 사치였다. 참호에선 일단 불을 피우고 연기가 나면 그 자리에 포격이나 적병의 화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잔가지로 연기가 나지 않게 불을 피우던가, 그것조차도 어려우면 차가운 깡통이나 날음식을 그대로 먹어야만 했다. 최전방 참호라면 적병의 습격을 경계하는지라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차가운 음식을 먹어야 했으니 편안히 조리하는 것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1,2차 세계대전 중 각국 군인들이 보급의 여유와 휴식시간이 있을 땐 열량보충을 위한 부식과 함께, 홍차나 커피 등을 마시며 짤막한 [[티타임]]을 갖는 일 자체는 흔했으나, 특히 영국의 경우는 아래 영상처럼 정규식 못지 않게 병영식에서 티타임을 중시하고 집착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티타임에 정신이 팔린 보병들의 사망 사례는 그냥 흔한 일이었고, 심지어 티타임 준비하러 물을 끓이려고 밖에 나갔다 사망한 [[전차병]]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던지, 티타임에 정신이 팔려 격침된 군함의 사례까지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현대의 [[챌린저 2]] 전차 등은 과거 전훈과 사고사례를 반영해 차내에서 [[저격]] 등의 위험없이 홍차를 끓여마실 수 있도록 물끓이는 기계까지 장비해 두었다.] [youtube(rCjjkIuto2k)] 이번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티타임을 다룬다.[* 재현영상 출처는 영국 Royal Navy and Royal Marines Charity로 영국 군인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는 공식 재단이라 고증이 잘 되어 있다.] 포격 소리가 들리는 전투 중인데도 티타임 시간이 되자, 열심히 허겁지겁 수통의 물로 머그컵 한 잔의 홍차를 만들어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국군이 이렇게 실전 상황에서도 티타임에 집착했던 건 과장된 영상이 아니라, 세계대전사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으며 [[디스커버리 채널]]등의 다큐멘터리까지 자주 언급될 정도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은 영국군의 문화이며 각박하고 위험한 전장서도 잠깐의 이완과 휴식은 효율성에 영향을 크게 미치기 때문에 득이 실보다 커서 없애지 않는 듯 하다.] 루리웹의 한 유저가 1, 2차대전의 병영식을 재현 했다. 많은 사진과 설명으로 따라 만들기 쉽다.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77501?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1차대전 영국군 참호요리]][* 위에서 소개된 스미스 이병의 짬밥이다. 사용한 반합은 무려 2차대전때 쓰이던 물건이라고 한다.]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3408?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1차대전 영국 해군 함상식(씨 파이+플레인 스튜)]]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2948?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1차대전 독일군 슈니첼과 맥주수프]]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79605?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2차대전 미군 덤플링 치킨 스튜]]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0081?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2차대전 미군 엘 란초 스튜]]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6773?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미군 미트볼 스파게티]][* 정확히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허버트 소블]]이 만들라고 요구한 스파게티를 재현한 것.] [[https://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618859|2차대전 미군 고등어 캐서롤]]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96730?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미군 + 일본군 카레]]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95397?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영국군 카레]]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95989?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호주군 카레]]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5655?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독일군 굴라시]] [[https://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627383|2차대전 독일군 피셸스타이너 거뮤제아인토프]]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2772?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2|2차대전 소련군 보르시]]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17/read/30588807?search_type=name&search_key=%EA%B9%8C%EB%82%98%EB%94%94%EC%97%A5&page=1|2차대전 소련군 까샤 + 쿨레시]] [youtube(IEt4rrtEN_k)] (미 육군의 야전 병영식 리인액트.) 미 육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전 상황에서 밥차로 병영식을 지었는데, 이 때는 통조림과 동결 건조 재료로 구성된 B-레이션을 정해진 메뉴에 따라 대량 조리하여 배급했다. 식사 시간은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해 해 뜨기 전 아침과 해진 후의 늦은 저녁에 실시되었고, 점심은 [[전투식량/미군|전투식량]]인 C-레이션과 K-레이션으로 해결했다. 격전지에서는 당연히 밥차가 올 수 없었으므로 전투식량으로 때워야 했다. == 국가별 병영식 == 참 당연한 것이지만 결국 군대의 병영식이라는 것은 그 나라의 빈부(貧富)가 큰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다. 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의 병영식은 퍽 호화롭거나 일반 집에서도 꽤 먹을 만해 보이는 반면, 익히 알려진 빈국의 군대 밥은 거의 개밥으로 보일 지경. 그래도 밑에 다 읽어보면 좋은 소리 나오는건 별로 없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15/0200000000AKR20180715024000014.HTML?input=1179m|파라과이 군에 있다가 한국군에서도 복무하는 장병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군은 파라과이 군보다 짬밥 질이 좋다고 한다.]]--대체 얼마나 개판이기에???--] 몇몇 지역에서는 아무리 잘해주고 싶어도 종교적 이유로 병영식 개선에 난감한 곳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약이 많은 [[코셔 푸드]]와 힌두식이 그렇다. 종교에 따라 금기시되는 음식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할랄 푸드]]가 그나마 양질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 === [[대한민국 국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국군 병영식)] === [[독일 연방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