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군인]][[분류:보르지긴 가문]][[분류:1811년 출생]][[분류:1865년 사망]][[분류:내몽골 자치구 출신 인물]][[분류:전쟁 사망자]] [include(틀:청사고)] [[파일:셍게린첸.jpg]] [[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ᠰᠡᠩᠭᠡᠷᠢᠨᠼᠡᠨ'''(보르지긴 성거린친) [[만주어]]: '''ᠪᠣᡵᠵᡳᡤᡳᡨ ᠰᡝᠩᡤᡝᡵᡳᠨᠴᡳᠨ'''(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중국어]]: '''博爾濟吉特 僧格林沁'''(박이제길특 승격림심) 생몰년: 1811. 7. 24 ~ 1865. 5. 18 [목차] [clearfix] == 개요 ==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은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염군]]의 난, [[후이족|둥간]] 혁명 등의 진압에 참전한 [[청나라]]의 몽골 귀족출신 군인이다. == 배경 == 셍게린첸은 [[내몽골]]의 호르친 좌익후기 출신으로 보르지긴 가문[* [[칭기즈 칸]]의 형인 주치 카사르의 후손이다.]의 일원이다. 몽골인이지만 그의 이름은 티베트어로 지어졌는데, "셍게(སེང་གེ)"는 [[사자]]를 뜻하고 "린첸(རིན་ཆེན)"은 보물을 뜻했다. 그가 어렸을 때 호르친 좌익후기의 자사그(사령관)이자 군왕(郡王)인 보르지기트 소드남도르지(博爾濟吉特 索特納木多布濟, 박이제길특 색특납목다포제[*병음 Bóěrjìjítè Suǒtènàmùduōbùjì])에게 입양되었다. 셍게린첸은 1825년 아버지의 지위를 세습했다. == 군사 경력 == === [[태평천국 운동]] === 1853년 [[함풍제]] 제위 시기에 셍게린첸은 [[수완구왈기야 싱포]]와 함께 청군을 이끌고 [[태평천국의 북벌]]군을 [[톈진]] 남부 교외에서 패퇴시켰다. 1855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청 조정은 그를 보두올레게타이 친왕(승왕 작위)에 봉했다. 같은 해 셍게린첸은 풍관둔으로의 공격을 격퇴하고 태평천국 지휘관 이개방을 생포했다. === [[제2차 아편전쟁]] === 1857년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셍게린첸은 톈진의 방어를 책임질 흠차대신으로 임명된다. 2년 후 2차 다구포대 전투에서 영미연합군을 패퇴시킨 뒤 그와 이조의는 청군의 방어력을 과대평가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3차 다구포대 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톈진을 점령하자 셍게린첸은 퉁저우로 후퇴했다. 영불연합군의 교섭단인 헨리 스미스 파크스와 헨리 로크가 평화 협상을 위해 퉁저우로 방문하자 셍게린첸은 이들을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한다. 근대적 외교에서 이는 모욕적인 행위이자 도발이었는데 그것으로 모자라 질병과 고문으로 사망자가 나왔고[* 파크스와 로크는 죽지 않았으며 같이 따라갔다 함께 구금된 [[타임스]]지 기자는 살해되었다.] 팔리교 전투에서 그가 이끄는 팔기몽고는 영불연합군을 공격했지만 전열보병의 위력을 무시한 채 나폴레옹과 붙은 [[맘루크]] 기병대마냥 기병의 기동성만 믿고 돌진하다가 총포탄이 불벼락처럼 떨어지며 팔기몽고 기병대는 완전히 섬멸되었다. 영국의 엘긴 백작은 베이징에 입성한 후 셍게린첸의 교섭단 납치와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영불연합군에 [[원명원]]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셍게린첸은 외침을 막아내지 못해 작위를 잃었으나 계속해서 흠차대신으로 재직했고, 황제와 군기대신들이 열하로 몽진한 사이 [[공친왕]] [[아이신기오로 이힌]]과 함께 수도에 잔류하며 [[베이징 조약]]을 맞았다. == 죽음 == 청 조정은 [[신유정변]] 후 [[염군|염군의 난]] 소식을 접했고 셍게린첸은 산동, 허난, 안휘성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65년의 전투에서 그는 허쩌의 요새 근처에 있는 선술집에서 뇌문광과 송정석의 염군에게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의 기병들은 전멸당했고 셍게린첸은 몇 안 남은 기병들과 함께 숲 속으로 피했지만 염군의 하급 지도자인 장평경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