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오호십육국 십육국)] [[파일:북위_북연_고구려.jpg]] ||<-3>
<:> {{{#d4cd99 {{{+2 '''연[br]燕'''}}} }}} || ||<-3><:>'''{{{#d4cd99 407년 ~ 436년}}}''' || ||<-2><:> '''{{{#d4cd99 성립 이전}}}''' ||<:> '''{{{#d4cd99 멸망 이후}}}''' || ||<-2><#6f00ff><:> [[후연|{{{#fecd21 '''후연'''}}}]] ||<#dc143c><:> [[북위|{{{#fff '''북위'''}}}]] || ||<:>'''{{{#d4cd99 별칭}}}'''||<-2><(> '''북연'''(北燕), 동연(東燕), 황룡국(黃龍國)[* 수도 화룡성에서 유래한 별칭] || ||<:>'''{{{#d4cd99 위치}}}'''||<-2><(> [[중국]] [[랴오닝]] || ||<:>'''[[수도(행정구역)|{{{#d4cd99 수도}}}]]'''||<-2><(> [[차오양시|화룡성]](和龍城) || ||<:>'''{{{#d4cd99 정치 체제}}}'''||<-2><(> [[군주제]] || ||<:>'''{{{#d4cd99 국성}}}'''||<-2><(> [[고(성씨)|고]](高) → 풍(馮) || ||<:>'''{{{#d4cd99 국가원수}}}'''||<-2><(> [[천왕]] || ||<:>'''{{{#d4cd99 주요 황제}}}'''||<-2><(> [[혜의제|혜의제 고운]][br][[풍발|문성제 풍발]] || ||<:>'''{{{#d4cd99 언어}}}'''||<-2><(> [[중고한어|중세 중국어]], 선비어, [[고구려]]어 || ||<:>'''{{{#d4cd99 문자}}}'''||<-2><(> [[한자]] || ||<:>'''{{{#d4cd99 종교}}}'''||<-2><(> [[불교]], [[도교]], [[유교]] || ||<:>'''{{{#d4cd99 종족}}}'''||<-2><(> [[한족]], [[고구려]]인, [[선비족]] || ||<:>'''{{{#d4cd99 현재 국가}}}'''||<-2><(> [[중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 시대의 나라 중 하나. [[후연]]의 북쪽 지방을 차지해서 북연이라 부른다. [[모용희]]를 시해한 [[혜의제|모용운]](慕容雲)이 세웠다. 어느 시기부터 북연으로 봐야하는지는 이견이 많다. 고운이 시해당하고 풍발이 즉위한 시점부터 북연이라고 보기도 하고 [[모용보]]가 화룡성으로 달아나 [[후연]]의 영역이 북쪽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으로 줄어든 시점부터 북연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고운의 통치 시기만 뚝 떼어 후연과 북연 사이의 대연 시기를 구별하자는 주장도 있다. 모용운은 [[모용보]]의 양자였고 모용희를 시해한 뒤 추대로 즉위했으니 후연을 계승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왕족인 고씨 출신이었고, 모용운 사후 즉위한 풍발과 풍홍은 둘 다 한족 출신이었으니 [[후연]]과 달리 선비족 왕조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체로 한족 왕조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창업 군주의 종족적 정체성을 강조[* 주민 구성을 봐도, 선비족의 침략으로 끌려온 수많은 부여인과 고구려인들이 있었다.]해 고구려계 왕조로 보는 관점도 있으며,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분류표에 북연의 민족을 [[고구려|高句麗]], [[한족|漢]]으로 표기한다. 모용운은 모용씨 일족을 쫓아내고 자신도 모용씨를 버리며 본래 성이던 고씨로 되돌렸다. 이후 본인의 조부 고화가 고구려 왕족이었던 것에 근거해 종족의 연을 맺기도 했다. 고운은 즉위 뒤 휘하 군대의 반발로 시해당하고 그 뒤를 풍발이 잇는다. 이후 [[거란]]과 [[해족]] 무리에게 귀선왕 직을 내리고 그들에게 교역을 허용, 농업을 권장했고 [[유연]]과도 혼인 동맹을 맺는 등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망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친선을 시도했으나 북위에 서쪽 변경 백랑성을 뺏기는 등 위협이 가시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골육상쟁 끝에 즉위한 [[풍홍]]은 북위가 아청과 고필이 이끄는 정예 기병 1만 명을 파견해 공격해오자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고구려는 [[갈로]]와 [[맹광]]의 지휘 아래 2만 대군을 북연의 수도이자 북위의 목표인 화룡성에 보냈다. 초반에는 선수를 친 친북위파가 친고구려파를 제압하고 화룡성을 접수해 성문을 열었으나 북위군은 이를 못 믿고 안 들어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때 고구려군이 화룡성에 들어가 북위군의 공격을 막고 풍홍은 지배층과 수만 백성들을 아예 고구려로 이주[* 행렬이 80여 리나 이어진 대규모 이주였다 한다.]시키는 선택을 한다. 이주 준비를 한 뒤 고구려군은 성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끝내 [[북위]]군은 화룡성의 황폐화된 빈 터만 얻었다. 고구려에 귀부한 풍홍은 그를 맞이하러 온 사신이 엄연한 천왕이었던 자신을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으로 하대[* 장수왕은 풍홍을 국왕급인 연왕도 아니고 용성왕이라 불렀다.]하자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는 것을 시작으로 의전, 월권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자 고구려 측에서 태자 풍왕인을 인질로 삼게 되고 그러자 풍홍은 [[송(남조)|송]]나라 망명을 계획한다. 풍홍의 부탁에 응한 송나라는 사신으로 왕백구를 파견했는데 [[장수왕]]이 손수와 고구를 보내 풍홍을 그 일족과 함께 처형시켰다. 이후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전사하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보내 그 군사들을 패퇴시키고는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나라로 보낸다. 송나라에서는 왕백구를 일단 감옥에 가뒀다가 나중에 석방[* 송나라도 중원의 패권을 둘러싸고 북위와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척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처리한 것. 송나라는 장수왕에게 직접 북위 정벌을 위한 말 800필을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장수왕 역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하였다. 풍홍은 소성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북연을 멸망시킨 북위 [[태무제]]는 훗날 화룡성에 진수한다. 모용씨는 [[위진남북조]] 말기에도 활약했고 풍씨는 북위 황실의 외척으로 세를 유지하게 된다. 중원의 변경으로서 번성했던 요서는 [[거란]]과 해족의 거점이자 고구려와 중원 여러 나라 사이 완충 지대로 바뀌며 연이라는 국호는 6세기 초에 취덕흥이 연의 부흥을 내세우며 일으킨 반란이나 [[오대십국시대]]에 유수광이 연왕을 자칭한 게 마지막이다. == 역대 황제 ==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1대 || 경종(景宗) || 혜의황제(惠懿皇帝) || [[혜의제|고운]] || 정시(正始) 407년 ~ 409년 || 407년 ~ 409년 || - || || 추존 || - || 원황제(元皇帝) || [[풍화(서진)|풍화]] || - || - || - || || 추존 || - || 선황제(宣皇帝) || [[풍안]] || - || - || - || || 2대 || 태조(太祖) || 문성황제(文成皇帝) || [[풍발]] || 태평(太平) 409년 ~ 430년 || 409년 ~ 430년 || 장곡릉(長谷陵) || || 3대 || - || 소성황제(昭成皇帝) || [[풍홍]] || 태흥(太興) 431년 ~ 436년|| 430년 ~ 436년|| - || == 기타 == * 백제의 인물 [[풍야부]]가 북연에서 백제로 유입된 인물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족들은 438년 장수왕에게 제거당했는데 이 때 백제로 유입했을 것이라는 가설[*출처 노중국, 「百濟의 姓氏와 貴族家門의 出自」, 대구사학 89, 2007. 74페이지 참조.]이다. * 북연과 관련된 고분으로 요녕성 북표시에 조성된 풍소불(馮素弗:?-415년)의 묘가 남아있다. 풍소불은 [[풍발]]의 동생으로, 이곳에서 초기형 등자가 유물로 출토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만주의 역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분류:5세기 멸망]][[분류:침투왕조]][[분류:고구려의 조공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