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파일: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jpg]]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259호}}}]]''' || ||<-2> {{{#fff {{{+1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br]{{{-1 粉靑沙器 象嵌雲龍文 立壺}}}}}}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국립중앙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 || '''{{{#fff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분청 || || '''{{{#fff 수량/시설}}}''' || 1점 || || '''{{{#fff 지정연도}}}''' || 1991년 1월 25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15세기 후반) || [목차] == 개요 == 粉靑沙器 象嵌雲龍文 立壺. [[조선]] [[세종(조선)|세종]]~[[세조(조선)|세조]] 재위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분청사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대한민국 국보]] 제25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높이 49.7㎝, 입지름 15㎝, 밑지름 21.2㎝. 15세기, 1400년대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한국의 분청사기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인화점문 기법과 상감 기법이 극한으로 발전했던 세종조~세조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매병과는 달리 주둥이가 넓고 양감있는 안정된 모양을 가진 이런 종류의 항아리는 15세기 중반부터 크게 유행한 것으로, 흑백 상감기법과 일부 인화기법(印花技法)을 사용하여 [[여의주]]를 문 용과 파도를 새겼다. 그리고 여의두문 밖에는 작은 국화문이 인화기법으로 시문되어 있다. 약 6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자기로,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분청사기_상감운룡문_항아리|한국어 위키백과 :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6282&cid=40942&categoryId=33065|두산백과 : 분청사기상감용문호]] == 국보 제259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2590000,11&pageNo=5_2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粉靑沙器 象嵌雲龍文 立壺)]] >조선시대 만들어진 분청사기 항아리로 아가리가 밖으로 살짝 말리고 어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서서히 좁아진 모습을 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49.7㎝, 아가리 지름 15㎝, 밑 지름 21.2㎝로 기벽이 두껍고 묵직하다. > >도장을 찍 듯 반복해서 무늬를 새긴 인화기법과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목 둘레를 국화무늬로 새겼으며, 몸통에는 세군데에 덩굴무늬 띠를 둘러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위쪽 부분은 다시 꽃무늬 모양의 굵은 선을 둘러 구획을 나누고 위, 아래로 국화무늬와 파도무늬를 꽉 차게 찍어 놓았다. 몸통 가운데에는 네발 달린 용과 구름을 활달하게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쪽은 연꽃 무늬를 두르고 있다. > >15세기 전반 분청사기 항아리의 전형으로 안정된 형태와 용 문양 표현이 뛰어나다.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조선의 도자기]][[분류: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